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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109화 (109/250)

Chapter 109 - 존재하지 않으나 있을 법한 것들

"손에 딱 맞는 게 없는데 어쩌라고."

내가 쏘아낸 말에 지체 높은 분은 싹수가 없다며 길길이 날뛸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심상에서 쫓아내는 게 아닐까 각오까지 하고 내뱉은 것이다. 고립된 허깨비 따위에게 기세를 잡혀 이리저리 흔들릴 수는 없으니.

"쌓인 기운은 과할 정도로 충만한데 그걸 제대로 응용할 도구를 만나지 못했다라··· 실로 무인에게 있어 최악의 불행이로다."

"?"

그런데 화를 내기는커녕 진심으로 나를 불행하다고 평가하는 어투였다.

지직- 소리와 함께 공간이 흐트러지더니 그녀가 자리에서 가냘픈 손을 뻗는다.

"자세히 한번 보여라. 내 보고 판단할 것이다."

피부를 밀고 들어오려는 기운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기운을 받아들였다. 혹시 이게 머리를 타고 올라오려 하면 그냥 마나로 머리를 터트려 자살로 심상을 벗어나는 게 좋겠지.

부분부분 막히는 경로에 그녀는 내 생각을 짐작했는지 입가를 더 진하게 끌어올리며 웃었다.

"곰만한 덩치로 행동은 꼬리 여럿 달린 여우 같구나. 그리 겁먹지 말거라."

"···."

마나라기에는 조금 더 흉포한 느낌의 무언가가 목 아래 신체를 휘저으며 빠르게 주천했다.

"어디··· 선골이 아니니 환골탈태는 아니고 반로환동을 한 흔적도 없으니. 이 기막힌 몸뚱이가 많아봐야 이립(而立)이렸다? 하하하 -!! 재미있구나."

몸을 훑던 기운이 쑤욱- 빠져나가는 동시에 머리를 감싸 막고 있던 마나의 흐름을 풀어 냈다.

내 나이를 30밑이라 포괄적으로 때려 맞춘 그녀는 뻗고 있던 손을 내리고 의자에 등을 붙였다.

"이제 만족하셨나? 내가 좋은 걸 제법 많이 먹었지."

기막힌 몸뚱이라 하면 차곡차곡 먹어온 히든 피스 정도 아니겠나. 더한 의심을 받기 전에 자진해서 하나를 이실직고하니 그녀는 혀를 차며 내 말을 부정했다.

"쯧-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했더니···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겸양인가? 기본적인 오성(五性)도 갖추지 못했음에도 배가 터지도록 영약을 먹은 탐욕스러운 아귀(餓鬼)들은 지천에 썩어난다."

대단하신 분은 핏덩이인 내가 모르는 다른 게 보이는 건가?

여기서 궁금하다고 괜한 말을 꺼내지 않고 입을 꾹 닫고 있으니 그녀가 초승달처럼 웃고 있던 입가를 내리고 더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런 경우는 전지하지는 못해도 그에 준하다고 자신하는 본좌도 난감하구나."

"···뭐?"

보통 난감하다는 말을 입에 담고 본인을 저리 당당하게 올려치는 경우가 있나··?

지금 상황도 내가 이해가 안 된다면서 어딘가의 무균실 같은 심상에 잡아둬놓고.

티끌 하나 없는 진심으로 자신을 전지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저 무언가는 나사가 하나 빠진 무언가라고 기억하고 메모해두자.

이건 두 번의 인생 경험이 알려주는 절대 빗나가지 않는 꿀팁인데, 저런 쪽으로 맛이 간 부류는 길게 엮이면 재미있는 것보다 피곤함이 훨씬 크다.

어떻게 하면 빨리 얻을 것만 얻고 이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나갈 수 있을까? 짱구를 거세게 굴리고 있으니 난감하단 말 이후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 몸의 일생을 다섯 가지 모습으로 녹여내 진전을 남긴 이유는 개개인이 각자의 방식으로 과업을 헤쳐나가 힘을 얻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보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뭐."

관심 없으니 주절거리지 말고 검이나 내놓고 꺼지라고 하고 싶다.

배를 들이밀며 째라는 식으로 나가니 그녀의 감은 눈 위에 얹혀있는 눈썹이 처음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고는 했지만··· 끝까지 까칠한 아해로구나. 필요한 절차가 끝나면 무기는 돌려줄 터이니 진정하고 귀를 좀 열거라."

"···여긴 눈이 시려서 그리 길게 있고 싶지는 않거든. 빨리 끝내."

눈을 어디에 돌려도 흰색이다. 야밤에 터진 섬광처럼 눈에 주는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흐음··? 보기만 해도 아름답지 않느냐? 순백이란, 색(色) 중에서도 부정보다 긍정적인 뜻을 압도적으로 내포한 미의 결정이다만."

역시 나사가 빠진 년인지 놈인지 아무튼 제정신은 아니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내 정신에 피로감을 두껍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알겠으니. 본론으로 가자고···."

"아아- 그렇지. 이야기가 딴 길로 샐 뻔했구나. 이 몸의 진전을 이어간 아이들은··· 누구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혈통, 재력, 선심, 재능, 끈기 등 실로 시간이 남긴 역사가 평하기를 흠이라곤 없는 완벽한 호인들이고 위인들이지."

그 말을 들은 나는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거름망 없이 입으로 냈다.

"완벽? 나는 전혀 아닌데? 처음 조건인 혈통부터 글러먹었다고."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입꼬리가 이제서야 다시 올라가며 처음과 같은 웃음을 그렸다.

"그래. 이번에는 아니구나. 미술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조예도 없으니 이 아름다운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악의 없이 저렇게 말하는 게··· 이런 부류랑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내가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는 건 사실이라 발끈할 필요 없이 넘어가기로 했다. 또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향할까 그게 더 스트레스였다.

"···."

"하여 더욱이 신기하구나. 진흙 같은 시작점에서 아득바득 올라와 그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 시작한 아이들 보다 과업을 해치우는 속도는 비할 바 없이 빠르고··· 그렇다고 난세를 바로잡을 영웅이라 하기에는? 영웅호색이라는 말 이외에 어울리는 단어가 없어."

구사하는 언어에서 먼지 쌓인 책, 오래된 목재로 만든 다락방 같은 냄새가 난다. 그녀는 은근하게 신이 나서는 가르침 비스름한 걸 줄줄 입으로 흘렸다.

"첫 과업에서 어째서 '갱생'인가? 왜 이런 시련이 온 것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갱생'의 업에 대한 깊은 뜻과 의미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나찰이 가진 백염을 깨우친 것에만 기뻐했지. 이렇게 되면 본좌가 고심 끝에 내린 과업의 ㅡ··"

게임이랑 다르게 그런 점까지 평가하고 보는 건가? 실로 악독한 스킬이구나. 이제 첫 걸음마였는데··· 앞으로 다섯 번째까지 계속 이딴 자리가 또 있을 것 같아 정나미가 확 떨어지려 한다.

'다른 스킬로 가려면 뭘 하는 게 좋으려나···.'

주절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며, 이미 내 머리는 형상을 포기한다면 어쩔 것인지 다른 방향성과 대처법을 생각하며 고민 중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블인 로버트가 얻을 수 있는 귀속 무기는 볼트 후작가의 적법한 혈통임을 인증해야 하는데 그건 또 불가능하고.

"···본좌의 말을 듣고 있느냐?"

주제에서 내 관심이 하염없이 멀어지는 걸 눈치챘는지 그녀는 털고 있던 입을 멈추고 찜찜한 말투로 내 정신을 불러 잡았다.

"아··뭐."

안 듣고 있었는데 양심상 듣고 있었다 할 수는 없어 대충 대답하니 그녀의 입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하! 좋다···이제 앞으로의 과업을 위해 내 질문에 답하거라. 지금부터 일체의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거짓 없이 다 대답하면?"

"문제가 없다고 판별된다면 원래의 절차를 따라 무기를 하사하겠다."

"···물어봐."

그녀의 줄곧 감고 있던 눈이 아주 천천히 뜨였다.

눈두덩이 아래에 존재하는 것은 호박처럼 영롱한 금안. 그 황금빛 눈동자가 내뿜는 기운은 리케의 눈을 아득히 상회하는 아우라였다.

나는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당신은 '회귀자'입니까?"

아해라 부르더니 갑자기 당신이라 호칭이 변경되었다. 눈을 뜬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마냥 어조가 부드럽게 변하였다.

거기에 회귀자? 그딴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건가? 일단 난 아니다.

"아니."

"미래를 읽는 예지··혹은 천리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없어."

"앞으로의 과업과 그 해결법을 모두 알고 있습니까?"

뻔뻔하게 모른다고 하려다 그녀의 금안을 마주한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실토했다.

"···알고 있다."

내가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고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어갔다.

"그걸 알아낸 방법은 누군가와의 계약입니까?"

"아닌데··."

··

··

질문은 수차례 이어졌으나 직접적으로 내가 알아낸 방법을 묻는 질문은 없었다.

한창이나 뜨고 있던 눈을 감은 그녀는 의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본좌의 과업을 아해가 이어가는 건 일단 보류하고 깊이 생각해 봐야겠구나···."

"···나찰을 다시 가져간다거나 그러면 곤란한데."

솔직히 다섯 형상 중에 내게 제일 필요한게 나찰이었다. 그녀는 눈썹을 내리며 진짜 기분이 상했다는 표시를 냈다.

"이 몸은 준 것을 다시 빼앗을 정도로 속이 좁지 않다···! 거기에 약속은 약속이니 본좌는 말을 지키겠다. 무기라 하면 아까 아해가 선택했던··· 응?"

하던 말을 마무리하지 않고 갑자기 허공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는 제법 오랜 시간을 멈춰있었다. 불안감에 나는 그녀에게 슬쩍 물었다.

"왜? 갑자기 안 주겠다고 말 바꾸는 건 아니지?"

은근한 불안감에 쏘아붙이니 그녀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아예 듣지도 않고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순은 모순과 만난다. 과연···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섭리렸다?"

의자를 두드리던 손을 번쩍 들더니 한쪽 팔을 허공에 쑥 넣는다.

그녀는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그렸다. 심상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혼잣말도 저 정도면 병 아닌가··?

"무어냐? 그 불쌍한 걸 보는듯한 불경한 눈은?"

"아니, 아니다··."

공간을 뚫고 틀어박힌 손을 휘적휘적 움직인 그녀는 아무래도 좋은, 흥분감이 깃든 어투로 말했다.

"후후후- 이것 참 중매쟁이가 된 기분이구나. 기뻐해라 아해에게 가고 싶어 하는 참한 아이가 있으니··· 한번 보거라."

"가고 싶다니··· 나한테?"

진짜 혼인 중매라도 하는듯한 말을 하며 그녀는 아공간에서 손을 뽑아냈다.

촤르르르 ㅡ

"이 수줍음 많은 아이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처음이라 본좌는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기 그지없구나."

허공에서 검은빛이 감도는 사슬이 뽑혀 나와 그녀의 손 위에서 부드럽게 헤엄쳤다.

그녀가 빈 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행동은 내가 가진 인벤토리와 비슷한 느낌. 나는 멍하니 그 사슬을 지켜보았다.

"한때 걱정 많은 신들이 예언에 지레 겁먹고 늑대 한 마리를 묶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

공간을 헤엄쳐 물뱀을 닮은 움직임으로 내 쪽으로 꾸물꾸물 다가오는 쇄(鎖). 나는 이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다.

"고양이의 발자국 소리, 여자의 콧수염, 새의 침, 돌의 뿌리, 생선의 숨결, 곰의 다리 신경··· 이 아이를 만드느라 난쟁이들이 모두 써버려 한 세상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아해의 세상에서는 존재할지 모르나 그 아이가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모순의 상징이라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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