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 - 나만 없어!
[ 두 번째 형상을 발동합니다. ]
무신의 형상 그 두 번째는 첫 번째 나찰과 달리 선택을 필요로 한다.
형상의 이름은 세간에서도 유명한 그 천살성(天殺星).
뿌리는 도교에서 알리는 108개의 흉성. 36천강 72지살 중 하나다.
이것들은 중국의 수호전에 나오는 양산박의 호걸들이 각각 대응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유명한 주제이니 흔히 무협 게임이나 소설에서도 빼먹지 않고 등장하지 않는가.
다중 세계관을 주제로 사용하는 '아카라이트'인 만큼 달달한 떡밥이 가득한 무협을 빼먹을 수 없지. 당장 내 발길질만 해도 뿌리는 무협에서 나온 스킬이고.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바깥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원래 게임에서도 뻔히 아는 정보이긴 한데···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런 점들이 참 신기하고 남자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가?
맨손으로 거목을 날려버리고 쓰러뜨리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라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런 점들은 아직도 바로 적응하기 힘들다.
오히려 이 세계의 진짜 주민이라면 여신의 축복이니 하면서 의심 없이 즉시 받아들이겠지.
"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집도 아니고 공부를 하고 있을 리케도 안 보인다.
흔히 이런 건 붙일 이름이 없으면 심상 세계라 하더라. 그래도 무신(武神)의 심상이라 하면 제법 있어 보이기도 하고?
정신병원을 연상시키는 하얀 공간에 떠있는 건 마르지 않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 한 자루.
바로 옆에는 앙상한 백골이 쥐고 있는 서책이 하나 있다.
스킬이 내게 이 자리의 규율을 알려준다.
저 흉측한 두 개의 물건 중 하나를 고르라고- 생각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며 속삭인다.
저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감으로 고르게 하는 게 스킬이 의지라도 가진 것 마냥 실로 악질이었다.
저벅-
공간에 내가 발을 뻗으니 소리가 메아리친다. 끝이 어딘지도 모를 만큼 전체가 순백의 공간이라 눈이 시려왔다.
저벅-
내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제한 시간 안에 선택하지 않으면 어떤게 손에 들어올지 모르니, 애초에 바깥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머리에서 확정을 지어놓고 들어왔다.
일단 백골이 들고 있는 서책은 액티브 스킬로 무신이 무치(武痴)라 불린 2회차 인생.
무예밖에 모르는 바보라 불릴 만큼 무에 미쳐있던 두 번째 인생을 갈아 만든 검법이다.
'그래도 저 스킬은 대체재가 있고··· 나도 이제 귀속 무기 하나는 있어야지. 스킬은 차라리 네 번째에 고르면 돼.'
인벤토리가 있다 해도 나만의 시그니처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리케도 있고 에클레어도 있는데 정작 나눠준 당사자는 없다니?
피가 떨어지고 있는 이 칼을 완성하는 건 공략을 알고 있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완성만 된다면 바로 세 번째 형상으로 넘어가면서 훌륭한 귀속 무기를 얻을 수 있다.
찰칵-
자기 살점에 상처라도 난 것처럼 피를 뚝뚝 흘리는 검을 잡으니 흐르던 붉은 액체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이제 선택이 끝났으니 심상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가는 것만 기다리면 된다.
'응?'
1분 정도는 기다린 것 같은데 아직도 정신이 벗어나지 않고 심상에 머물러 있다.
쿠구구ㅡ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두개골 안에 천둥이 내리꽂힌 것처럼 강한 진동이 울려왔다.
"큭··!"
-네놈은 뭐 하는 녀석이더냐? 오랜 시간 진전을 이을 자들을 받고 보아 왔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구나.
귀로 들리는 게 아니다. 여성의 목소리가 머리 안에서 웅웅- 울린다.
-본좌가 내린 첫 번째 과업을 이렇게 빨리 끝낸 아해도 처음이고···두 번째 과업을 일체의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것도 처음이다. 단 하나의 의문조차 가지지 않고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행동하는구나.
이 순간에 타인의 개입? 플레이어블인 로버트로 아카라이트를 플레이하며 심상에 들어온 경우에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상황을 파악하는데 어설픈 말 한마디보다는 침묵이 좋은 법.
일단은 입을 닫고 통증이 가지 않은 머리를 잡은 채 흰색 공간을 뚫고 다가오는 존재를 지켜보았다.
-본좌의 뒤를 이은 자 중에 세상이 평하길 비범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자신이 살던 대륙을 통일한 아이가 있었고 단신의 무력으로 인류의 왕이라 자칭하고 다닌 천치도 있었느니라.
-살아가는 세상은 모두 다른 모양새를 하였지만 공통적으로 그곳에서 으뜸이자 최강···이라 불리었으나. 그 아해들도 해봐야 본좌의 손바닥 안이었다. 지금 같이 이해와 예측 두 가지 모두 벗어나는 경우는 없었지.
상대는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지만 발소리가 없었다.
"···."
-입을 여는 걸 금한 적이 없는데 말을 하지 않는구나. 농아(聾啞)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시간이 지체되는 일은 하지 말거라.
하얀 대지에 질질 끌리는 검은 장발. 맹인인지 그저 시각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지 눈을 감고 있는 여자였다.
감고 있지만 이곳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이 여자의 몸과 얼굴은···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머리가 길고 눈을 감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이외 정보는 뇌에서 인식이 되지 않는 느낌이다.
보는 순간에 계속해서 머리가 이 여자의 얼굴과 정보를 지워내는 토할 것 같은 감각. 치고 올라오는 구역질을 버티지 못한 나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호오? 제법 강한 정신력이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소리도 없이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나타난 여성에게서 시선을 재차 돌리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로만."
-흐음. 로만이라? 말이 짧은 건 넘어가 주마. 그래·· 왜 이 아이를 잡았지? 연유를 고하라.
내가 잡았던 칼이 사라져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행위에서 느껴지는 전능함은 이 공간이자 심상의 주인이라는 게 지당했다.
'그 무신이 여자라고? 아니지···심상이니 모를 일이다.'
상정 외의 이 상황은 내 입을 닥치게 하는 당황스러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냉정함을 최대한 유지하며 답을 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이거다!'라고 평할 것이 없었다.
고민을 수차례 거듭하고 나는 답을 냈다.
"그냥."
- 그냥? 그냥이라··· 타당하지만 답이 되지는 않는구나.
"타당한데 왜 답이 되지 않지?"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리에 직접적으로 울리는 목소리에 인상을 팍 쓰며 반박했다.
심상에서 죽는다면 현실로 쫓겨나는 것이지 실제로 죽지는 않는다. 이미 검증된 사실이니 겁먹을 필요도 없다. 형상 스킬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대체재를 찾아 나서면 되는 일.
-흐음~ 천성이 타오르는 불길 같은 아이구나. 답이 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몸의 육감이 고하기를 '그냥' 고른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의 존재에 대한 확신. 이 초월적인 무언가는 본인 나름의 몇 가지 답을 이미 내리고 있는 것 같다.
내 경험상 이렇게 답을 내기도 전에 확신을 가진 인간들은 대체적으로 성격이 아주 모난 편이다.
"그럼 본인이 말하는 육감을 믿으면 되는걸. 내 말을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물어본 거지?"
골통이 울리는 기분 나쁜 감각에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치며 짜증을 털어냈다.
흰색 공간이 지직- 거리며 잠시 흔들리더니 이제야 머리에서 울림이 멈췄다.
"이번 아해는 염화나 전음이 없는 세상에서 온 것인가? 흥미롭구나."
감은 눈 아래. 날카로운 하관에 달린 입술이 보인다. 아까까지 인식되지 않았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 바닥이 몽글몽글하게 끓어오르더니 의자 모양을 만들어내며 굳었다.
그녀는 그게 당연한 듯 긴 머리를 한쪽에 정리하며 자리에 앉았다.
"···."
"멍하니 무얼 하느냐? 앉거라."
파스스스ㅡ
맞은편에 앉으니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검과 내 선택을 받지 못한 서책이 가루로 바스러져 허공으로 사라졌다.
"어어-!"
이날만을 기다렸는데! 그 결정체가 눈앞에서 사라지니 목 끝까지 차오른 아쉬움에 절로 입이 열려 목소리가 나왔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니 그리 아쉬워하지 말거라. 대답을 듣고 진전의 여부를 판단할 것이다."
내 반응이 재밌는지 그녀의 입술은 누워있는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있다.
'조졌네···어쩐지 요즘 인생이 잘 풀리더라.'
어째 인생이 돌부리 하나 없이 잘 굴러간다 싶었다. 위기와 사건이 자신을 잊지는 않았냐며 백태클을 걸며 서프라이즈를 할 줄이야.
"한데 이상하구나. 아해는 저 검이 무엇인지는 알고 아쉬워하는 건가?"
아차 싶은 정곡에 그냥 정신을 놓고 입에 나오는 대로 한탄을 뱉어냈다.
"···척 봐도 명검인데 당연히 아쉽지."
"하하하! 검만 쓰는 검수도 아닌 바람둥이가 말은 잘 하는구나."
뜬금없이 바람둥이? 무슨 뜻인지 생각을 하다 이해한 나는 육두문자를 뱉으려다 겨우 삼켰다.
"무기 좀 여러 가지 쓴다고 초면에 바람둥이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어이가 없네."
"권(拳) 각(脚) 검(劍) 도(刀) 봉(棒) 추(錐) 창(槍) 부(斧) 쇄(鎖)··· 이 중 하나만 제대로 다루려 해도 범인은 일평생 애정을 바쳐도 모자라거늘. 전부를 사용하려 들다니 이게 바람둥이이자 난봉꾼이 아니면 뭐라 칭할 수 있지?"
하나하나 내가 사용하거나 사용했던 무기들을 읊으며 조곤조곤 귓등을 때린다.
요즘 내가 리케와 에클레어를 생각해서 너무 유들유들하게 살았나?
무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이라 해봐야 지금은 심상에 갇힌 채 살아가는 허깨비.
그런 유령이나 다름 없는 것의 헛소리를 듣고 앉아 있으니 눌려있던 짜증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에 딱 맞는 게 없는데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