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7 - 자매의 시간 -2-
로만이 남긴 메모를 잡은 에클레어의 손이 달달 떨려왔다.
'이, 이··바보가! 부끄러움도 없는··!'
둘이 있을 때는 가감 없이 애정표현을 마구 해줘서 좋은 건 사실이었다. 가끔 창틀에 남기고 가는 간식이나 메모도 마찬가지고.
이 메모도 평소처럼 혼자 봤다면 설렘을 느끼며 서재에 보관해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봤겠지만··· 숨기지도 못한 채 클로에의 손을 타고 들어왔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클로에에게 뻔히 보이는 곳에 이런 말을 적어 보내다니 정말 철면피에 부끄러움이라고는 없는 남자였다.
"아, 으··이게··그러니까··!"
드리트나 가문의 기사로서 장녀로서 클로에의 언니로서의 위엄을 지켜야 하는데!
메모에서 겨우 벗어난 에클레어의 시선이 클로에에게 향했다.
허리까지 오는 잿빛 머리칼을 모아 달아오른 볼은 가리고 있지만, 호선을 그리는 흐뭇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동생의 얼굴에 이미 쿨한 대처를 하기에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언니. 나 많이 놀랐다? 교관님 아카데미에서는 엄청 차갑고 무섭거든. 우리 학부 남자들도 아닌 척 하지만 다 무서워해."
"그런가··."
갑옷을 입고 숨어들었던 야외 수업에서는 클로에에게 집중하느라 로만이 뭘 하는지 주의 깊게 본 기억이 없다.
그때는 이런 관계가 될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클로에는 케이크 위에 놓인 딸기를 하나 집어먹고 감탄을 뱉었다. 에클레어도 깨작깨작 파이를 건드렸지만 양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 교관님도 언니 이야기를 할 때는 다른 사람 같아."
보통 이야기를 나눈 기색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에클레어가 얼굴의 열기를 숨으로 갈무리하고 클로에에게 물었다.
"···도대체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에클레어의 말에 클로에는 시선을 살짝 내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사실···언니가 말한 대로 브로치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 생각해서 ㅡ"
모험이나 다름없는 대서사시를 들으며 에클레어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덮을뻔했다.
며칠이나 주위를 맴돌았다니··· 클로에의 이야기를 들으며 에클레어는 로만이 왜 클로에에게 먼저 다가갔는지 바로 알았다.
디저트 카페도 로만이 마음을 먹고 미리 잡아뒀다고 봐야겠지. 위치는 리케에게 조언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클로에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어. 내가 생각이 짧았다··.'
생도이자 동생의 입장에서 로만이 어떻게 보일지 모르고 가볍게 인사를 전하라 말했던 자신의 실수이기도 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서로의 성격을 알고 문제가 없을 거라 단순히 생각해버렸다.
로만이 보통 고위급 귀족들이나 권위자들과 다르게 클로에에게 부드럽게 대할 거라는 건 자신과 리케만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클로에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연인이긴 해도 백금의 모험가이자 사선을 넘나들며 살아온 야성적인 강자로만 보이겠지.
"아마·· 첫날에 주위를 돌아다녔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거다. 감각이 워낙 예민하니."
로만의 오감은 자유로운 분위기와 달리 항상 곤두서있다. 직업상 긴장감을 유지하며 자세를 신경 쓰고 있는 자신보다 예민하다 느낄 정도로 날카롭다.
클로에가 주변에 며칠이고 서성거리면 그걸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여, 역시 그렇지? 많이 민폐였을까··?"
흥미롭게 보던 표정을 지우고 눈썹이 아래로 쳐진 클로에를 보고 에클레어는 이제서야 평소의 분위기를 찾고 웃었다.
로만이 적은 메모지는 책 아래에 슬쩍 끼워두고 클로에의 잘못된 걱정을 바로잡아줬다.
"민폐였다면 민폐라고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할 남자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거나 본인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겠지."
"다행이다··."
클로에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은 풀어지며 케이크를 향해 포크가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만을 마주쳐도 너무 많은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조금 마음을 편하게 가져도 된다. 그렇다고 너무 편하게 대하거나 예를 벗어나는 행동만 하지 말거라."
확실하게 이해한 클로에는 마지막 남은 딸기를 입에 넣고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샘솟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언니. 모험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모두 교관님 같은 느낌의 사람들이야?"
"같은 느낌이라 하면?"
"음~ 딱 집어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편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박력이 있다 할지, 권위에 그리 큰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자유로워 보인다 할까··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렵네."
에클레어는 머리에 로만 외 몇몇 모험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로 클로에의 질문에 확답을 내릴 수 있다.
부정으로 고개를 살짝 저으며 그녀는 클로에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아니. 그건 로만이 유별나고 특별한 거다. 다른 백금이나 청금정도 되는 고위급 모험가를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고위 귀족을 만났다 생각하고 행동해라."
"그, 그렇구나···."
살짝 무거워진 분위기에 클로에가 입을 우물거리며 천천히 주억였다.
쪼르륵-
자매가 앉아 로만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하니 목이 타는 느낌에 에클레어는 비어있는 찻잔을 다시 채웠다.
"언니."
"···음?"
어딘가 살짝 불안한 느낌에 에클레어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다른 것도 물어봐도 괜찮아?"
저 빛나는 눈망울. 에클레어는 클로에가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며 최근 어떤 서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그래도 선이라는 걸 지키는 아이니 정말 말로는 못할 민감한 곳을 파고들지는 않을 것이다.
"··가능한 선에서는 대답해 주마."
허락을 받은 클로에의 표정은 기다리던 로맨스 소설의 신간을 우편으로 받았을 때의 얼굴 같았다.
"교관님은 아카데미에 나서면 교관님이 아니니 편하게 부르라고 하셨는데···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해? 모험가님?"
"흐음-··"
예상외의 질문이었다. 클로에가 로만을 뭐라 불러야 깔끔할까.
"형부?"
넌지시 꺼낸 호칭 하나에 에클레어가 고민하던 고개를 펄쩍 들었다.
"아, 아니! 로만과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는데··."
"혼인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나는 거잖아? 교관님은 그렇게 보였는데."
"···그렇게 보였다고? 저, 정말로?"
분명 로만은 자신을 만나면 미래를 그리는 행동과 감정을 매번 보여준다. 거기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하게 그와 미래를 이어갈거라 믿고 있었지만, 클로에가 볼 때도 자신과의 관계를 제대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게- 당장 동생의 앞이라 표현은 못 해도 기분은 날아 갈듯 좋았다.
"응! 언니를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서···나도 마음이 놓였어."
"흠흠··!"
반응을 헛기침으로 대체하는 언니를 보고 클로에는 작게 웃었다.
"제국에서 실질적으로 이렇게 감정만으로 만나는 사이는 흔하지 않잖아? 그러니 다들 소설이나 연극에 빠져들고···."
먹고사는 현실이 팍팍할수록 픽션 같은 가상의 매체에 대한 인기는 치솟는다. 클로에는 갈증을 해소하고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책이나 연극, 유흥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
자신도 과거에는 영지에 틀어박혀 현실을 도피하는 용도로 책을 보곤 했으니.
"그렇지·· 나도 내가 특별한 경우면서 복에 겨운 걸 알고 있다."
"응? 그런 말이 아니지! 언니는 이때까지 고생한 걸 이제야 보답받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클로에는 에클레어의 말을 정정했다. 이것만은 그냥 못 넘어간다는 동생의 태도에 에클레어는 찻잔의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입에 걸려있는 웃음이 인위적이지 않다. 황실의 행사 때문에 거울을 보고 억지로 표정을 연습했던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고생이라는 키워드를 타고 과거로 흐를 뻔한 이야기의 줄기를 에클레어가 바로잡았다.
미련했던 과거 자체가 자신의 이불을 찢고 박살 내는 흑역사이자 로만과의 연애사보다 창피한 이야기라 노선을 급하게 틀었다.
"호칭에 대해서 혀, 형부는 아직 이르니 자제하거라. 타인이 혹시 들어도 문제가 되니·· 그냥 교관님이면 되지 않겠느냐?"
"형부는 확실히 타인이 들으면 안 되겠네··."
"그렇지."
마지막 케이크를 날름 삼킨 클로에는 잠시 고민을 거듭하다 작게 손뼉을 치며 해답을 하나 더 내놓았다.
"언니랑 교관님이랑 조금 닮은 부분이 있으니. 오빠···는 너무 교양이 없고 오라버니는 어떨까?"
"···!"
에클레어가 지금 놀란 점은 호칭이 아니었다.
"음~ 이것도 안돼?"
찻잔을 내려놓은 에클레어는 순수하게 물어오는 클로에를 보며 물었다.
"···클로에. 이건 혼내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증이다만···로만이 무섭다거나 거북함은 없느냐? 만약 그런 호칭·· 오라버니라던가 오빠라던가 로만을 향해 직접 부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어?"
귀족이라면 피할 수 없는 연회나 행사에 참여하는 클로에를 먼발치에서 지켜봤고 동생이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알고 있다.
특히 이성에게는 그게 더 오랜 기간과 노력이 필요하여 주위에 제대로 알고 지내는 이성이 없다는 것까지.
정작 본인도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일단 자신은 업무에 있어 남자와 대화를 할 때에 거리낌은 느끼지 않는다.
그런 클로에가 로만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포크를 빈 접시 위에 놓은 클로에가 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엄청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는데."
"걱정 말고 편하게 말해보거라."
머리로 문장을 정리한 클로에는 부끄러움에 시선을 빈 접시에 고정시킨 채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 항상 사람과의 거리를 재는 게 서툴러서 실수도 많이 하고. 혼자 신이 나서 마음만 서두르다가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도 이때까지 많았잖아."
"···."
"오늘도 사실···교관님이랑 있으면서 긴장해서 실수를 엄청 많이 했거든. 생각만 해도 부끄러울 정도로···."
"음."
에클레어는 클로에를 알기에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보다 생각이 많고 행동이 느린 점은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걸 두려워하기에 신중함이 들어가 나오는 행동의 결과라는 것도.
하지만 그게 쌓이고 쌓이며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많았기에 클로에의 소심함은 부각되어 갔다.
"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때 말은 괜찮다 해도 항상 눈은 좀···무서운 눈을 하고 있었어 언니의 동생이라 넘어가는 듯한···."
"···그랬구나."
최대한 감정을 죽여 담담하게 말하는 클로에를 보는 에클레어의 심장이 송곳에 찔리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시선에 예민한 점은 자매가 판박이였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차이가 극명할 뿐.
"그런데 오늘 교관님은 처음 제대로 이야기해 봤지만 뭔가···그, 교관님을 보면 오빠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어서···실수를 해도 어, 언니처럼 부드러운 눈빛이라··."
로만이라면 그 상황에도 그렇겠다고 에클레어도 생각해버렸다.
"···."
"이것도··! 생각해 보면 내가 시, 신이 나서···혼자 앞서간 거겠지··? 언니 말대로 그냥 교관님이라 하는 게 좋겠다·· 또 실수할 뻔했네·· 헤헤··."
자신의 대답이 없으니 안 좋은 방향으로 답을 내며 위축되는 클로에를 보고 에클레어는 웃으며 해답을 알려줬다.
"클로에. 다음에 로만을 만나서 둘이 되면 ㅡ"
*****
둘이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 바퀴 돌고 왔다.
리케는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한창 아카데미의 암기과목을 공부 중이고.
"후우-"
가부좌를 틀고 앉은 로만은 몸에 있는 숨을 쭉- 내뱉으며 신중히 결정했다. 두 개의 길 중에서 어떤 길로 가야 더 효율적일지.
[ 두 번째 형상을 발동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