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6 - 자매의 시간 -1-
뿌드득-
거칠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방구석에 울렸다.
"말이나 쉽지 썩을 안경잡이. 감정은 효율적이지 못하니 뭐니 있는 척은 혼자 다하면서 여자에 환장해서는 ㅡ."
혼잣말로 욕을 뱉지 않으면 머리에 차오르는 열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로버트는 1학기가 끝나고 몸은 쉬었지만 머리에는 휴식이 없었다.
정신은 온통 이 험하고 정 없는 세상에서 벗어나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차원에 관한 것으로 가득했고 2학기의 시작만을 기다렸다.
아이작의 말에 따르면 지금쯤이면 성과가 있을 거라 했으니 2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타 학부 기숙사로 달려가 아이작을 찾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에게 당장 모든 걸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로버트에게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자신의 연애사업에 1차적인 투자를 원했다.
차원 실험을 이어가면서 도와준다고 말해봤지만 아이작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둘 다 목구멍이 타고 급하다 하지만 갈증이 훨씬 심하면서 마음이 서두르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괜히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흔들 다리니 사람을 사용해서 위기에서 구해주니 하는 이야기를 해서 일어난 상황이겠지만 로버트는 작금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연기자? 실력은 있는데 쓰고 버릴만한 놈이라니···.'
직접 장기말을 구해주거나 외부에 쓸 금액이 없을 정도로 연구에 금화를 미친듯이 박고있는 아이작에게 돈을 왕창 주거나 두 가지 중 택해야 한다.
고민 끝에 로버트는 괜한 일에 직접적으로 엮이는 걸 피하기 위해 후자를 택했다.
이름있는 후작가문 볼트의 장남인 자신도, 사치를 부리거나 장비를 사면서 써본 적 없는 금액을 아이작에게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머리에 주전자가 끓어도 이왕 마음을 먹은 김에 빨리 행동하기로 했다.
서로의 몸에 구속 구를 거는 행위지만 상관없다. 선은 서로가 넘은 상태로 한배를 탄 것.
'차원 연구에 대한 성과금이라 생각해야지···어차피 이곳 재산은 돌아가면 다 쓸모없는 것들이야.'
이 몸뚱이 그대로 한국에 돌아가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게 단순하고 희망적인 관측이라도 현재 자신이 붙잡고 있는 정신의 기둥이었다.
예시를 들었을 때 아이작도 신체는 그대로일 확률이 높다 했으니.
'금화도 이렇게 많은 걸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인데··.'
그래. 아깝다고 느껴지는···거금일지라도 돈을 주고 하루라도 빨리 연구를 속행시키는 게 맞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 생도 인맥을 동원해 밀어주고 싶지만.
아이작은 쓰고 버릴 연기자까지 고용하는 이 시도를 누구에게 하는지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그게 제일 큰 문제였다.
저 정신 나간 미친 마법사가 진짜 잘나가는 가문의 여식을 건드리는 거면? 안 들키면 장땡이긴 한데 그런 쪽으론 간이 커도 너무 큰 놈이었다.
철두철미하게 일이 생겨도 꼬리를 자를 수 있는 인간들을 어련히 선정해서 모으겠지만··· 세상사 혹시라는 말이 있으니 현물을 잔뜩 쥐여주고 모른척하고 있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면 됐다.'
지금까지 연구에 대한 자금은 지원했지만 성과가 있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같이 결과를 가지고 자신을 쥐고 흔들려는 그 태도가 거슬릴 따름.
부스럭- 부스럭-
"후우···."
이를 갈면서도 주머니에 쌓여있는 재물을 다시 계산해 보고 넣는다. 남이 보면 친구의 연구 지원금이라 해도 상관은 없지만 이런 건 보거나 아는 사람이 적은 게 좋겠지.
금화만이 아니라 보석같이 필요할 때 재화로 환급하기 쉬운 물건들로 로버트는 아이작이 말한 금액에 걸맞은 준비를 끝마쳤다.
*****
"음··! 분명 그게 최선이었어!"
유일하게 자신 있고 박식하다 할 수 있는 디저트에 관해서 진지하고 신중하게 선택한 결과였다.
그 가게에서 언니의 입맛에 맞을만한 메뉴는 피칸파이만 한 게 없었다.
슈가 파우더 좀 털어먹어봤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가게. 그런 곳의 메뉴인 만큼 맛 또한 수도에서 가히 손에 꼽힌다 할 수 있겠지.
자신은 혀가 녹을 만큼 달달한 디저트를 선호하고 견과류를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 가게의 것은 그 자체로 미식이라 충분히 먹을 수 있다.
얼른 언니의 반응을 보고 싶어 아카데미가 끝나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다시 한번 디저트 가게에 도착했다.
딸랑-
문이 열리는 걸 알리는 청아한 종소리와 함께 종업원들의 시선이 우르르 모이자 클로에는 순간 숨을 멈췄다.
"어서 오세요. 아!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문을 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얼굴을 본 종업원은 기억을 하고 있었는지 포장된 상자를 두 개 들고 나왔다.
"어···피칸파이 하, 하나가 아닌가요?"
종업원은 친절한 영업용 미소로 상자를 하나하나 들며 제품명을 읊었다.
"하나는 피칸파이. 하나는 딸기 가나슈 케이크입니다. 저희 업체에서 키운 딸기가 올라간 가나슈 케이크는 예약 주문만 받는 인기 상품인지라·· 주문하셨던 디저트 코스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따로 주문해 주셨습니다."
구입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종업원의 인사와 함께 어리둥절하며 받은 상자 위에는 교관님이 직접 적었다는 메모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상외로 보자마자 '엥?' 소리가 나오는 악필이었지만 읽지 못할 건 아니었다.
[ 끼니 대신 먹지는 말 것. 둘 다 혼날 우려가 있음. ]
'화, 확실히··!'
저택에 돌아가면 당장에 꺼내서 먹어보고 싶지만 저녁식사를 케이크로 인해 소홀히 하거나 거르면 언니가 걱정을 할지도 모른다.
교관님이 남긴 메모지에서 인간미가 아주 강하게 물씬 느껴졌다.
'다음엔 조금 편하게 감사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혼난다는 구절에서 실례라는 걸 알지만··· 근육과 살벌한 분위기와 맞지 않게 조금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칭부터 시작해 무언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은 언니와 이야기해 보자는 생각과 함께 저택으로 총총 향했다.
ㅡ
사용인들에게 몰래 케이크의 보관을 부탁해두고 창가를 서성이며 언니가 돌아오는 걸 기다렸다.
오늘도 늦게 끝나거나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며 기약 없는 걸음을 빙글빙글 밟고 있으니 저 멀리서 시선을 사로잡는 은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근엄한 표정으로 일정한 보폭을 성큼성큼 밟으며 저택에 당도한 언니를 보고 계단을 타고 후루룩- 내려갔다.
기다리고 있던 보람이 있는지 자신의 움직임이 사용인들 보다 훨씬 빨랐다.
"언니! 고생하셨어요!"
자신의 목소리에 딱딱하고 근엄한 표정이 설산에 봄이 찾아온 듯 녹아내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준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변한 분위기와 상황에 이제 저택의 사용인들도 적응한듯했다.
"그래. 나와줘서 고맙구나."
*****
'아카데미에서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클로에의 표정이 은근한 수준이 아니라 당장에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들떠있다는 게 느껴졌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서재에 가도 되냐는 말에 무언가 있구나 싶었지만, 그게 표정에 담긴 무언가라면 자신도 불안할 이유는 없다.
필시 친구들과 좋은 일이 있었거나 재미있는 일이 있었겠지. 클로에의 재잘거림을 듣는 건 자신도 즐겁다.
최근에는 업무 집중도가 확 올라가 집에서 처리해야 할 만큼 바쁜 서류도 딱히 없고.
똑.똑.똑
-클로에 드리트나 입니다!
고양감을 숨기지 못하는 동생의 목소리에 에클레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들어와라."
끼익-
문이 열리고 뒤에는 트레이를 들고 따라온 사용인이 하나 있었다.
서재는 허락이 없으면 사용인의 출입이 절대 금지인 구역이라 클로에가 직접 트레이에 있는 접시를 들고 두 번을 왕복했다.
자신의 앞에는 피칸파이 한 조각이 정성스럽게 잘려서 올라가있고. 클로에의 접시에는 보기만 해도 당도에 혀가 마비될 것 같아 보이는 케이크가 있었다.
딸기에 하얀 가루까지 가득 뿌려져 자신은 저 한 조각이면 일주일은 먹을 것 같았다.
자신을 생각해서 메뉴를 분리해 준 클로에에게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후 디저트라···차를 준비해야겠구나."
"아! 내가 우려볼까?"
"괜찮다. 앉아있어라."
자신을 따라 일어나려는 클로에를 앉혀두고 서재 구석에 있는 마도구를 사용해 물을 끓였다.
"먼저 들어도 된다."
차를 우리는 동안에도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동생에게 에클레어는 한편으로 의문을 느끼며 권했다.
자신의 권유에 평소에는 눈치를 보며 포크를 슬쩍 들던 클로에가 웬일로 고개를 저었다.
"기다릴게. 언니의 첫 감상을 먼저 듣고 싶어서."
달그락-
찻잔을 클로에의 앞에 놓으며 자리에 착석한 에클레어는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이 파이가 그리 유명한 가게의 제품인가?"
"음~ 그것도 그렇고···특별한 게 들어가 있어서 언니 입맛에 맞을 거야."
디저트에 관심이 많은 클로에와 달리 자신은 무지한 분야라 일단은 먹고 판단하기로 했다.
'특별한 재료? 외견과는 다른 새로운 맛으로 출시된 상품인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이 첫입을 뜨는 걸 기다리고 있는 클로에에게 호응하기 위해 포크를 들었다.
나이프가 필요 없이 에클레어는 포크만으로 파이를 깔끔하게 잘라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달지 않아서 좋았다. 견과류의 맛도 고소하고 식감도 훌륭하다. 이런저런 말 할 필요 없이 이때까지 먹어 본 파이 중에서 최고라 할만했다.
"어때?"
"내 입에 딱 맞춰서 만든 것 같은 디저트구나."
안심의 한숨과 함께 얼굴에 약간 홍조가 올라온 클로에가 재촉하듯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진짜 다행이다~ 너무 달지는 않았어?"
"달다고 하기에는 애초에···응?"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스럭거리며 클로에가 건 낸 메모지. 거기에 적혀있는 악필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글씨체였다.
[ 끼니 대신 먹지는 말 것. 둘 다 혼날 우려가 있음. ]
"언니~ 뒤에도 있어."
메모를 뒤집으니 자신을 향한 글인 듯 나름 꾹꾹 눌러 최대한 깔끔하게 쓴 글이 있었다.
[ 보고 싶다. ]
클로에는 꺅! 하고 소녀의 탄성을 지르며 회색 머리로 커튼을 치듯 얼굴을 가렸다.
당사자가 아니라 옆에서 보는 클로에도 이 감정에 간질간질 하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제국에서 이런 로맨스를··· 소설이나 연극도 아니고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
곧바로 상황을 이해한 에클레어의 얼굴이 클로에에게 전염되듯 화악 붉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