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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98화 (98/250)

Chapter 98 - 울렁이는 떫은맛

현직 은익 기사단의 기사단원인 레오 플로이드의 인생 경험을 따지자면.

기사로서 물려받은 재능도 있고 크고 작은 실전 경험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그의 머리는 실전이라 하면 전투가 아니라 여자를 먼저 떠올릴 정도다.

수도에서 플로이드 가문의 감시에서 벗어나 고삐를 풀고 사는 삶은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까먹지 않고 아버지에게 안부 편지만 제때제때 보내면 된다. 바글거리는 딸 사이에 유일한 아들이니 걱정이 많으신 것도 이해한다.

자신도 자기 같은 금지옥엽이 있으면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줬겠지?

'이젠 하다하다 여자가 지겹네. 참나··.'

허나 낙원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낙원이 낙원이라는 걸 잊고 더욱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얼음판에 미끄러지듯 쉽게 넘어오는 여자는 너무 쉬우니 지겹고. 할 생각도 없는데 가랑이를 고장 난 문짝 마냥 벌리는 여자는 욕구마저 확 식어버린다.

현재 만나고 있으면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넘기지 않고 지조를 지키고 있는 여자도 몇몇 있으나.

공통적으로 눈알로 주판을 두들기며 플로이드라는 이름을 사용할 이득만 노리고 있어 가끔씩 뱀이 목을 조르는 듯한 소름이 돋는다.

자신의 주위에 그 모든 경우에서 초탈한 여자가 딱 한 명 있는데.

제국의 5기사이자 은익의 기사단장 에클레어 드리트나.

처음에는 한번 자빠뜨려 볼 생각으로 가볍게 주위를 맴돌았는데. 이 기사단장을 보고 있으면 느껴진다. 이건 보통 여자들과는 결 자체가 다른 진짜배기였다.

여자로서도. 기사로서도.

자세든 정신이든 빈틈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의 주위에 얼굴이랑 가문 좀 된다는 것들은 이미 다 까이고 돌아간지 오래다.

자신은 은연중 돌려돌려 접근하니 대놓고 까이지는 않았지만. 아직 관계가 단원에서 한 발도 못 나간 기분이다. 오히려 뒷걸음질 친 느낌.

이런 답도 없이 두텁고 높은 벽은 처음이라 어떻게든 무너뜨리고 넘어보고 싶었다.

플로이드의 권력도 안 통하고 무력은 자신의 힘으로는 턱도 없고 사치품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공략법이 존재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게 레오의 인생 지론.

허나 에클레어 앞에서는 그 지론마저 흔들린다.

지금까지 답이 아예 안 보이니 이게 같은 인간의 테두리이긴 한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인간이긴 하겠지?'

흐트러짐 없이 새벽에 출근하여 단원들을 격려하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단장을 보며 생각했다.

저 젊은 나이. 자신보다 어린데 태산 같은 자신의 아버지만큼 강하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가끔 실전에서 보여주는 눈에 읽히지도 않는 쾌검을 보면···아버지의 연로함을 생각했을 때 혹시 더 강한 게 아닐까?

그런 능력을 가진 그녀의 희소성은 얼마나 높은가. 에클레어를 원하는 남자는 끝도 없이 많으나 가진 남자는 없다.

하여 가지고 싶다. 옆에서 침만 삼키고 있으니 미칠 지경.

저 여자라면 다른 여자와 달리 평생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맹세에 장담까지 할 수 있었다.

'그래. 가문을 위해서라도!'

이름있는 기사들을 보유한 명문무가 플로이드 가문의 남아인 자신에게 이보다 적합한 목표이자 배필은 없다.

'조바심을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오늘 모험가 길드에 가는 보좌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일단은 초기에 미친 짓으로 잃어버린 신용을 회복하는 게 우선.

이것도 동기와 선임들에게 술을 몇 번을 사서 양보 받은 자리인데. 이 이상 밉보이는 건 진짜 위험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무식하게 들이댄 과거가 한탄스러울 정도로 최근 들어서는 제법 진지한 마음가짐이었다.

레오 플로이드가 여자라는 존재에 이런 제대로 된 마음을 가진 건 처음이 아닐까.

금일에 임무도 행사도 없는 비번들은 단장이 사라지자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들어 잡담을 시작했다.

"요즘 단장님···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이, 이야기할 때 진짜 살짝 웃어주신 것 같은데···꿈인가··?"

여기사 하나가 몽롱한 눈으로 중얼거리자 바로 옆의 여자 단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그치?! 나만 느낀 게 아니구나··분위기도 좀 부드러워지신 것 같기도··."

은익 소속 여기사들이 모여서 재잘거리는 이야기가 레오의 귀를 간지럽혔다. 에클레어를 동경해서 들어온 무리답게 오늘도 모여서 찬양하는데 여념이 없다.

경망스러운 목소리에 부단장의 눈치를 한번 받은 여자 무리는 목소리를 줄였지만 내용만은 변하지 않았다.

'격 떨어지게 호들갑은··.'

저런 여자들을 볼 때마다 레오의 머리에서 에클레어의 희소성은 천장까지 치고 올라간다.

*****

내가 리케를 만족시키기 위한 건지 리케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건지.

아무튼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행복하고 질척한 밤이었다.

씻고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메이드 복까지 자진해서 입고 들어온 리케는 여자 둘을 거느리는 것에 은근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나에게 연신 괜찮으니 이제 편하게 좀 지내라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젖가슴에 내 얼굴을 파묻었다.

내 인생 더없이 사치스러운 감정이었지만, 리케의 자애에 신기하게도 진짜 마음이 가벼워지긴 했다.

어린 여자에게 진심으로 우쭈쭈 당하는 건 처음인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라.

이러다 나의 남성성이 흔들리는 위험한 취향이 생길 것 같아 리케를 만족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완전히 뻗어서 점심때야 겨우 눈을 뜬 리케와 간단히 식사를 하고 에클레어와의 약속을 위해 오랜만에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얼마 만에 오는 거지?'

분명 내 본업이 모험가인데 모험가 길드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열 필요도 없이 활짝 열려있는 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와 주위를 살핀다.

새로운 얼굴들이 제법 보인다. 어쩌면 내가 그냥 기억을 못 하는 건지도 모르고?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접수원을 앉히고 그녀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서류를 작성하는 손은 멈추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치? 개인적인 사정으로 좀 바빴지."

"듣자 하니··· 오늘도 그 기사님이 오시는 거죠? 연락받고 접견실은 비워뒀으니 나중에 편히 쓰세요."

"역시 일을 잘해~ 근데 모르는 얼굴들이 는 것 같다?"

바구니에서 사탕을 하나 빼먹으며 가볍게 꺼낸 말에 접수원의 펜질이 멈추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하하··최근에 또 그런 시기거든요."

"흐음~그런 시기라."

접수원이 말하는 '그런 시기'라 하면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

근처 마을에 흉년이 들어 사지 멀쩡한 인간들이 모험가 말고는 할 일이 없어 먹고살기 위한 신입 모험가가 갑자기 불어난다거나.

산적이나 도적. 용병들에게 마을이 쓸려나가 생존자들이 흘러들어온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일거리가 떨어진 영지에서 승급을 위해 수도로 넘어온 베테랑 모험가들이 있을 수도 있고.

무튼간 그녀가 말하는 '그런 시기'라 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급격하게 인원이 불어날 때를 말한다.

인력의 증원은 모험가 길드에 있어서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다.

실력이 보장되지 않은 신입이 늘고 사망자가 무작정 늘어나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의뢰가 불어나고 그 뒤처리를 할 모험가를 또 찾아야 하는 등.

모험가도 그렇지만 정리하는 길드 직원들까지 죽어나겠지.

"신입 모험가는 일주일 만에 반은 사라졌고···다른 곳에서 넘어오신 베테랑 분들은 그래도 아직 건재하네요."

"원래 있던 파티들이랑 트러블은 없고?"

"하아···말도 마세요."

한숨 섞인 접수원의 반응을 보니 답이 나왔다. 나는 그와 반대로 웃었지만.

"하긴 여기 있는 것들도 전부 별종인데 타지에서 넘어온 모험가들이랑 기싸움을 안 할 리가 없지."

딱 봐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재밌는 장면들을 놓치다니. 앞으로 길드에 가끔 출석을 해줘야겠다.

뒤에서 접수원과의 소통을 기다리고 있는 모험가들을 보며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난 높으신 분 올 때까지 접견실에서 쉬고 있는다~ 고생해."

*****

모험가 길드로 출발 전.

황실의 높은 분들에게 명을 하달 받으러 간 에클레어를 기다리며 레오는 이번에 같이 보좌역을 하게 된 동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야. 단장님···남자가 생긴 건 아니겠지?"

"레오···나는 그런 말 하다 들키면 뒤에 봐줄 사람 없으니 제발 그런 질문 좀 하지 마."

"재미없긴···."

"그냥 조용히 갔다 오는 거야. 사고만 치지 말자. 레오 부탁한다."

레오가 동기에게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듯한 이질감 때문이었다.

그도 깔끔하게 인정하는 사실로. 단련된 남자보다 일정 주제에서는 여자들의 직감이 더 날카로울 때가 있다.

-오늘 착각인가···? 묘하게 단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

여자 단원들이 입을 모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뭔가 대단한 일을 또 해냈다는 풍문이 있으니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고.

기분 좋을 일이야 주위에 끝도 없이 경우가 존재하니 그냥 한쪽 귀로 흘려도 될 이야기였다.

'그런데 뭔가 기분이···.'

구역질? 가슴이 울렁이는 불쾌감에 찝찝한 것이 입에서 떫은맛이 나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또각- 또각- 또각-

고풍스러운 복도를 울리는 규칙적인 발소리에 둘은 입을 닫고 허리를 바짝 폈다.

"출발하겠다."

북부의 눈보라 같은 차가운 목소리. 제복을 입은 에클레어가 둘 사이를 지나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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