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7 - 두 번째 형상 -3-
남성의 몸통만 한 팔뚝 4개에서 쏟아지는 무식한 난격은 오러를 두르지 않았지만 그 파워만으로 지하 공동을 뒤흔들었다.
쿵! 쾅! 쾅!
-이놈 피하지 마라! 맞아라!
-뭐 하는 거예요! 더··! 더 빨리 휘둘러요! 빨리!
-하, 하고 있소!
'힘 하나는 오러가 필요 없네.'
주위에 있는 장식품과 두꺼운 벽면을 가볍게 박살 내는 무기들.
저런 힘이라면 어지간한 오러의 파괴력을 넘어서는 순수한 근력이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힘이지만. 단순한 궤적을 그리기에 침착하기만 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다.
머리통이 완전히 맛이 간 상대라. 본인이 오른팔은 항상 일자로 내려찍고 왼 팔은 좌에서 우로 휘두르고 돌아가는 걸 반복하고 있는 것도 모른다.
그런 언데드라 공략법을 한번 본 뒤. 패턴을 몇 번 겪어보고 무기 하나만 제대로 준비하면 누구나 트라이 해서 잡을 수 있는 녀석이다.
근육으로 덩어리진 외견만큼이나 일반 타격이나 참격 같은 물리 내성이 강하고.
피통 하나만큼은 대단한 녀석이라 성속성 무기나 화염에 능통한 마법사 동료 하나쯤은 있는 게 수월하다.
'한 번으로는 확답이 안 서는데··.'
숙련도가 완벽하지 않은 나찰로 변하는 건 마나 소모가 극심한 만큼 섣불리 변하기는 망설여졌다.
결국 내린 답은 나찰로 한방에 간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돌려 깎기. 손바닥에 잡히는 워해머의 손잡이를 다시 한번 꽉 쥐였다.
[ 스털링 워해머 ]
▷언데드에게 추가 데미지를 가합니다.
▷신성을 품고 있습니다.
-신실한 수녀들의 로사리오를 녹여 만들어낸 워해머다.
떨어지는 대검을 피하며 무식한 크기의 손등을 푸른 오러가 감도는 워해머로 내리찍는다.
파삭-!
박살 난 근육 아래에 핏물은 없고 허연 살점이 대리석처럼 깨지면서 흩어졌다.
-으아악!! 아,아프다! 왜 아프지?
-꺄아아악! 따가워··! 아파아··!
꾸물꾸물 거리며 재생은 하지만 단검에 뚫렸던 이마의 상처에 비하면 회복이 턱없이 느리다.
일격에 직감이 왔다. 저녁은 집에서 리케와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보다 빨리 되겠네.'
ㅡ
쿵-! 쿠웅! 부웅-
-쥐새끼 같은 녀석!
-아픈 건 싫어요! 그만해!
빠각!
내리치자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는 언데드의 살점.
-크윽! 왕비! 괜찮소?
-꺄아악ㅡ! 싫어··!
"쯥··."
집에서 기다리는 리케에게 간단한 일이라 하고 나왔는데.
혹시나 다쳐서 한 소리 들을까 완벽하게 틈이 보이는 순간에만 치고 빠졌다. 안전을 기하며 약 5분 정도? 실제로 10분은 됐을지도 모른다.
언데드의 지구력에는 한계가 없다 보니 휘두르는 속도까지 일정하여 리듬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어깨에 망치로 3연격 안마를 당한 덩치는 뒷걸음질 치며 나를 노려봤다.
-이··이 몸의 왕국을 뺏으러 온 것이구나··! 정체를 알았다··제국의 자객이로고!
-어떻게 해요? 전 살고 싶어요! 도망쳐요!
-그럼 우리 국민들은 어쩐단 말이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정신이 망가진 언데드의 진심 어린 촌극.
자신들이 배치해둔 좀비를 주민으로 생각하고 도망치지 않는 모습은 지금 제국의 황제보다 훌륭할지도 모르겠다.
"망상은···어휴. 그래 맞다 맞아. 내가 제국의 자객이다. 왕의 목을 따러 왔습니다."
-노오옴!! 나의 왕국을 넘보지 마라ㅡ!!!
-목을 잘라 본보기로 제국에 보내겠어요!
둔기에 찌그러졌던 피부가 빠르게 재생하고, 백색 피부가 검게 변하며 눈알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체력이 30프로 밑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광폭화 패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속도가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
딱 좋은 타이밍.
워해머를 인벤토리에 던져두고. 직선으로 멧돼지처럼 달려오는 적을 향해 카운터를 칠 자세를 잡는다.
[ 첫 번째 형(形) - 나찰(羅刹) ]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의 이물감을 느끼며 오른손을 쥐니 비어있어야 할 손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화르륵-
백색으로 타오르는 검을 잡고 허리를 틀며 내던지듯 벤다.
피릭.
수평으로 내던진 참격에 중년 여성의 머리가 빙글빙글 날아갔다.
끝에 가서 귀찮은 흑마법을 시전할 확률이 있기에 제일 먼저 잘라내는 게 좋다.
허공에서 부서지는 화관. 날아가면서도 찢어지게 지르는 비명을 무시하며 오른쪽으로 갔던 검을 왼쪽으로 당겨내며 가슴팍을 크게 도려낸다.
촤아악ㅡ!
검은 살점이 V자로 시원하게 갈라지며 백염이 썩은 언데드의 살점에 옮겨붙었다.
-아아아아-!!! 아악!!!
가슴에 타오르는 고통에 달려오던 것도 잊은 언데드는 거대한 무기를 모두 바닥에 내던지고, 불길이 붙은 살점을 자신의 손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회복용으로는 못 써도 신성력 보다 조지는 효과는 좋단 말이지.'
인간에게는 이롭게 작용하고 부정한 것들을 하늘로 보내는 신성력에 비하면 극단적으로 치우친 힘이지만 이것만으로도 나는 배가 부르다.
'이 정도 네임드한테 백염은 대략 3초 내외로 지속인가?'
저번보다 짧게 지속되는 시간을 머리에 기록하며 검을 틀어잡는다.
-크으으!! 으아아!! 와··왕비!!
불이 수습되니 자신의 비어버린 목 하나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반응이 궁금하긴 했으나 봐서 뭐 하겠나. 괜찮아지면 또 달려들겠지.
"뭘 그리 찾아. 이제 만날 건데."
-이··이··이대로··!
서걱-
원래가 인간이라? 언데드 주제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눈깔을 하고 있기에 깔끔하게 목을 잘라냈다.
"곱게 보내줬으니 감사히 여겨라."
쿵!
거체가 쓰러지며 나찰의 검에 붙어있는 샛노란 부적이 사특한 기운을 들이킨다.
사아아ㅡ
배가 부른듯 나찰의 검이 만족감에 부르르 떤다.
드디어··! 부적 안에 붉은 글자가 빈틈없이 가득해졌다.
책갈피로 게임을 한번 둘러보지 않았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 두 번째 형상의 습득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첫 번째 형상 나찰(羅刹)의 마나 소모량이 감소합니다.]
[ 첫 번째 형상의 파생 스킬 백염(白炎)을 얻습니다. ]
[ 부정함에 강한 내성을 얻습니다. ]
"하아··!"
긴장감 끝에 찾아와 흐르는 이 미친 카타르시스.
무신의 형상은 다섯 가지 중 하나를 완성 시키고 조건을 충족시킬 때마다 내성이나 스킬 같은 보너스를 준다.
부정함이라 하면 흑마법이나 언데드의 오염된 공격 등을 포함한 총칭. 언데드나 악마가 상성이었던 내 위치가 반대로 뒤집어진 것이다.
나찰의 마나 소모량까지 줄어들었으니 막말로 모험가를 접고 교단에 들어가도 능력을 증명하면 대단한 대우를 받겠지.
결정적으로 첫 번째 형상에서 내가 제일 원했던 건.
화륵-
'역시 뜨겁지는 않네.'
손에 하얗게 타오르는 작은 불길. 이제 형상을 사용하지 않고도! 부적이 치덕치덕 붙어있는 나찰의 검이 없어도 백염을 사용할 수 있다.
내 기억으로 나찰의 상태에서 사용하는 것에 비해 파괴력은 반이 안된다. 실제로 느껴지는 힘도 그러하고.
오러와 함께 사용하기에는 이리저리 까다로운 녀석이지만··· 나찰의 단발성과 짧은 지속시간 같은 약점을 빈틈없이 메꿨다 생각하면 성장한 체감이 난다.
'기분 굿이다!'
두 번째 형상은 처음 사용하는 순간에 선택지가 있기에 당장 열어보는 건 시기상조.
이 기쁨을 온전히 안고 집으로 돌아가려니 발에 검은색 백과사전 같은 것이 걸렸다.
툭-
"응? 아~ 템이 나왔구나."
고정적인 아이템이 아니라 유동적인 드롭을 하는 몬스터라 뭐가 나왔을지 은근 기대가 되긴 했다.
[ 시체 골렘 제작서 ]
'···태우자.'
ㅡ
아카데미 2학기 시작 2일 전.
두 번째 형상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백염과 오러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연습을 거듭하니···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잊고 있었다.
벌써 이틀 뒤면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아카데미 교관의 자리도 담당해야 한다.
아카데미를 시작하면 같이 살더라도 지금보다는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리케의 말에 적극 공감하며.
남은 날은 시간을 최대한 같이 보내기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기에. 그녀가 만들어준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익숙한 사람이네."
오랜만에 보는 집배원이 멀리서 우리를 보더니 인사를 꾸벅하고 우체통에 편지 하나를 넣어두고 간다.
"오빠~ 언니한테서 편지 왔는데?"
"언니? 에클레어?"
에클레어에게 편지가 날아왔다. 만나지 못하고 시간이 꽤 지나 보고 싶다는 말을 기대했는데 내용은 여전히 차가웠다.
사적인 감정을 실은 편지는 아니었고 황실에서 추가 보상과 위에 계신 분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내일 오후에 모험가 길드 접견실에서 만나거나 불가능하면 회신을 달라고 되어있다.
"가야겠네? 오빠가 언니랑 못 본 지 일주일 넘었으니···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거잖아."
정말 악의 없이 순수하게 말하는 리케지만. 연인 앞에서 또 다른 연인이 보고 싶다고, 들떠서 간다 하기에는 혀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만나도.
그녀도 최근 일이 바쁠 것이고 만나는 장소는 모험가 길드 안.
데이트 같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잘 지내는 얼굴만 봐도 만족이다.
"흠··일이니 가긴 해야지."
나의 어정쩡한 표정을 본 리케는 쿡쿡 웃으며 내 귀에 입술을 붙였다. 뜨거운 입김과 함께 귓속말이 끈적한 목소리로 흘러들어온다.
"진짜 이상한 곳에서 신경 쓴다니깐. 정 그러면···오늘 나 만족시키고 마음 편하게 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