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4 - 한 명의 기사이지만 한 명의 여자이기도 하다. -2-
에클레어는 클로에에게 리케에 대한 비밀을 입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본인의 사정은 본인의 입으로 전해야 하는 법.
떨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심호흡을 끝낸 뒤 자신의 입으로 전해야 하는 주제를 꺼낸다.
"대단한 건 아니니. 너무 놀라지는 말거라···그···교, 교제하는 남성이···생겼다."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에의 푸른 눈이 점점 커지더니 양손으로 입을 텁! 틀어막았다.
"···!!!"
급하게 자신의 입을 막지 않았으면 비명에 가까운 큰 소리를 냈을지도 모른다.
"이게···그리도 놀랄 일인가?"
잿빛 머리칼이 안면을 간지럽힐 정도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클로에의 인생은 길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오늘이 가장 놀란 날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언니의 비범한 능력은 옆에서 봐온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 조기졸업을 했을 때도 일말의 의문점 없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고.
최고의 기사라는 아센 프리밀러의 종자로 발탁되었을 때도 언니가 아니면 대체 누가 하나 생각했었다.
말도 안 되는 젊은 나이에 제국의 5기사가 되었을 땐 놀라긴 했지만 그것조차 단번에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언니가 남성과 교제? 제국에서 잘 나간다는 귀공자들의 구혼에도 관심조차 없고. 날고 긴다는 가문들의 혼사를 모두 거부한 언니가?
"드리트나 가문을 위한 저,정략혼 인가요···?"
언니의 마음가짐. 사회적인 위치를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묻게 된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 그럼···?"
정략혼이 아닌 그 외의 경우?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하는 하나가 존재함에도 언니의 입에서 직접 들어야만 머리가 생각이라는 걸 할 것 같다.
그만큼 클로에는 패닉에 비견할 정도로 놀란 상태였다.
언니가 저렇게 가녀린 소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마음을 고백하고··이어진 관계다."
"어,언니가 남자의 마음을 받아주다니···."
놀라서 기운이 쭉 빠진 클로에의 혼을 쏙 빼놓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언니는 고개를 저으며 개미가 기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흘렸다.
"아니. 고··고백도 내가 했다."
"어,어··네에에?!"
서있는 상태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남자이기에? 주제를 꺼낸 언니도 얼굴이 홍조로 가득해서 터질 것 같고 듣고 있는 자신도 정신이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상대가 누구인지···들을 수 있을까요··?"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언니는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설레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이름을 말했다.
"···로만이다."
"로만···? 어디서 들어본 이름···어?"
"그 로만이 맞다··."
ㅡ
언니에게 남자가 생겼다. 그것도 먼저 마음을 고백했다 한다. 거기에 상대는 백금의 모험가. 아카데미에서 주에 한번 마주하는 교관님이기도 하다.
하나씩 분리해 들어도 클로에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놀라움인데 준비도 없이 한 번에 들이닥쳤으니. 그녀는 자신의 정신과 심장에 이상이 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클로에. 괴, 괜찮으냐?"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누가 말했던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는 언니를 눈에 담는 순간, 현실을 인지한 그녀는 본인이 커다란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으··괜찮아요. 그리고···."
"··음?"
"추, 축하해 언니! 먼저 이걸 말했어야 했는데···."
말을 듣고 놀란 눈을 하던 언니가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고맙다."
"언니가 그··교관님을 택한 이유가 있을 거고. 나는 언니가 행복하면···그거면 충분··하니깐."
"클로에···."
이때까지 가문을 위해 묵묵히 희생만 해온 언니다. 항상 그런 모습을 보며 언니 본인을 위한 무언가를 했으면 했는데.
생각해 보면 이 형태는 자신이 그리던 최상의 결과물이었다.
"엄청 로맨틱하네. 기사와 모험가라니···로맨스 소설 같아!"
"크흠··."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하는 언니를 보며 클로에는 묘하게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머리에 떠오르는 대화가 있었다.
"이건 리케양이 이번에 모여 귀족의 혼담에 관해 얘기하다 나온 대화인데-··"
뒷말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에클레어를 보며 클로에는 감상을 전했다.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바에는 자결을 하겠다고. 엄청 진지한 얼굴로 말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언니를 보니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한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언니는 완벽하면서도 가끔은 속이 텅 비어있는 사람 같았다.
사람이 아니라 정말 한 자루의 검처럼.
더없이 대단한 명검이지만 보다 단단한 검을 만나거나 계속해서 사용되면 언니가 조각조각 부서질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는 언니는 더 이상 그런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과거. 나 같은 건 함부로 언급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전장의 경험들이 언니를 그리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만 했다.
자신은 언니의 희생 아래 온실 속에서만 자라왔기에. 늘 모르고 무지하고 어리석었다.
그렇기에 저 공허함은 자신이 채울 수 없는 바닥이 없는 무저갱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하루 만에 타인이 메꿔준 것이다.
어쩐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자신도 모르겠다.
"···."
"사, 사··랑이 그렇게 멋진 감정이라면 나도 언젠가 경험해 보고 싶네···나 같은 건 무리겠지만··."
드륵.
의자에서 일어난 에클레어가 책상을 빙 돌아 클로에의 옆에 눈높이를 맞춰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이건 리케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동생의 손을 잡아주는데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클로에. 절대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나보다 마음이 강하고 누구보다 선하지 않느냐. 내가 전장에서 느끼는 유혈과 승리의 쾌감을 동기부여로 삼게 되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 기인한 곳은 장담컨대 클로에 일 거다."
"나는··그런··그런 사람이··."
촉촉한 물기가 모여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지 마라··이쁜 얼굴이 엉망이 될 거다. 클로에."
자상한 미소로 자신의 촉촉한 눈가를 닦아주는 언니를 보니 구멍 난 수도처럼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흑··나는 그저 고생한···언니가··흐윽, 보답을 받아서 다행이라고···."
"고생한 적도 없고. 내가 행한 일에 대한 보답은 언제나 받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 흐트러짐 없이 말하는 언니를 보며 클로에는 뭐라 말은 못 하고 콧물만 쿨쩍였다.
휴지를 몇 장 뽑아 클로에에게 건넨 에클레어는 탁자에 놓인 상자를 클로에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이건 나와 로만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사용해라. 분명 요긴하게 쓰일 거다."
"아···흐읍. 가,감사합··니다."
무엇이 든지도 모르고 상자를 받은 클로에는 급하게 눈물, 콧물을 닦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예를 다했다.
"사용법은 나중에 식사를 끝내고 알려주마. 혹시 로만을 마주치면 그냥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거라. 기뻐할 거다."
그 자비 없는 교관님이? 감사의 인사는 물론 전해야 하겠지만 기뻐할지는 모르겠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언니는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상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클로에. 골치 아픈 가문의 일은 생각하지 마라. 기사가 되지 않아도 좋고 원하는 길을 걸어가며 살아라. 많은 걸 보고···누군가에게 반해 사랑을 하고···소중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
하루 사이에 언니의 가치관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게 평소부터 품고 있던 생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는 드리트나의 일원···으로 기사가 될 의무가··읍!"
언니의 손바닥이 내 입을 가로막았다.
"그 이상은 말하지 마라.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내가 가문을 바꿔나갈 거다. 정말 기사의 길을 걷고 싶다면 걸어도 좋다. 하지만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여러 가지를 경험해 보거라."
입에서 손이 떨어지고 경험이라 하니 한 가지만 떠올랐다.
"응··언니처럼?"
자신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한 언니의 얼굴이 눈동자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보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 사랑은···계획하고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한다··예상치도 못하는 것이지··."
"그렇구나··! 어떤 느낌인지 듣고 싶어··."
아까의 촉촉한 물기가 사라진 푸른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온다. 듣고 싶다는 동생의 말에 에클레어는 당황하면서도 답을 내기 위해 눈을 감고 몰두했다.
"··마음을 자, 자각하고 이어지기 전까지···주체하기 힘든 감정이 고통스러웠지만···그래도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응··응! 그리고··?"
··
··
동생의 호기심 해소를 위해. 속을 드러내는 몇 마디로 진이 완전히 빠진 에클레어는 평소 손을 뻗지 않았던 달달한 디저트를 비운 뒤 자리를 끝내며 말했다.
"··미래에 클로에의 마음을 얻는 누군가가 있다면 부족함이 없는 멋진 남자겠지. 주체하기 힘든 감정이 생기면 언제든 상담해라···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니··."
"응··!"
이날 저녁식사를 끝내고 브로치의 사용법을 알려주며 에클레어는 한참을 고심하다 야외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고백했으나.
클로에는 이미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었기에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넘어갔다.
자신이 변한 시기 등 이상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니.
그저 거기서부터 로만과의 로맨스가 시작된 건지 추궁당하며 곤혹을 맞이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