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 - 기사님은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삽화 有)
누구도 아닌 내 의지로 자진해서 향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과 생각도 하기 싫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한다.
하지만 나는 배웠지 않나. 고민을 안고 가만히 있는다고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준 것조차 그였다.
그래서 빠르게 행동하기로 했다. 로만이라면 나를 거절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다.
납득과 별개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가가 촉촉해지지만···.
진심을 말하면 거절을 해도 그냥 하지 않겠지. 로만이라면 그 이유도 시원하게 알려주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이 서툰 감정에 익사하기 전에 결판을 봐야 한다고. 이대로 두면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 단위로 진화해 조절하기 힘들어지는 이 감정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평생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자꾸만 생각하게 하고 나를 안쪽에서부터 바꿔가고 있다.
사달이 나기 전에 극약처방을 받고자 에클레어는 로만의 집까지 찾아와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저건 놀라움? 의외? 무슨 표정이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자신을 본 그의 표정은 다채롭기 그지없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실례하지···."
영애를 데리고 왔을 때 잠시 들어온 적이 있지만 이 집의 내부 분위기는 사람의 온기가 가득해 정신이 아늑하고 풀어진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지울 수 없는 여성의 손길은 절로 스카디 영애를 떠올리게 한다.
"손님은 편하게 기다려. 술이랑 먹을만한 게···."
"음."
가져온 술병은 탁자에 두고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부엌을 어슬렁거리며 안주를 준비하는 그의 등을 눈으로 쫓는다.
저 덩치에 저 근육으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바쁘게 준비하는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 즐겁다.
"그거 림노에서 마셨던 그 술 맞지?"
"맞다. 그때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
등을 보이며 물어보는 그의 말에 에클레어는 입꼬리를 올렸다. 가격은 저렴해도 그 일주일을 되짚어 보는데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그는 한 손에 그릇 한 손에는 컵을 두 개 들고 식탁에 돌아왔다.
"대단한 건 없고···집에 지금 있는 게 이런 거뿐이라."
얇게 썬 프로슈토에 올리브. 그리고 치즈에 핑거푸드들. 어지간한 선술집 보다 깔끔한 솜씨였다.
"고맙다. 이만하면 과한 성찬이지."
꼴꼴꼴ㅡ
컵을 각자 채우니 술을 마시기도 전에 로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쁠 텐데 이 시간에 마셔도 되는 거야?"
"위에서 고생했다고 당분간 쉬어도 된다더군. 예상도 못 한 진짜 휴가를 받았지."
"잘 됐네. 동생도 기뻐하겠어."
"···그렇지."
짠-
컵을 들어 가볍게 부딪히고 술을 넘기니 뜨거운 숨이 나왔다.
"파하-! 그 셋은 잘 놀고 있고?"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끊이질 않더군."
"흐음~ 분위기는 누가 주도하는지 예상은 가네."
동시에 붉은 머리의 작은 소녀를 떠올린 것인지 가볍게 웃었다.
그 이후로는 평소와 달랐다.
차려준 정성을 생각해서 음식을 먹으려 해도 긴장감에 손이 가지 않았고 빈속에 술만 계속 넘기다 보니 감각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로만은 아직 주량에 문제가 없는 것인지 마나를 사용한 것인지 평소와 같은 얼굴색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 긴 침묵은 의외로 불편한 것은 아니었으나. 매도 빨리 맞는 게 좋다는 말을 생각하면서도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로오만···."
알딸딸하게 오른 취기에 혀가 늘어졌다.
"왜."
무심한 답이지만 지금은 부르면 답이 돌아오는 것만으로 실없이 좋았다.
"후후···로만··."
"왜 불러."
"내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기억하나?"
"어."
잔에 반쯤 남아있는 술을 비우니 어쩐지 용기가 솟아올랐다.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ㅡ"
"잠시만."
말을 꺼내려는 순간 로만이 낮은 목소리로 취해가던 정신을 깨웠다.
"···으음?"
굳었다고 말할 만큼 진지한 그의 얼굴이 눈에 담기며 정신에 스파크가 톡톡 튀었다.
"만약 지금 할 이야기가 취기에 감정 조절이 안돼서 나오는 말이면 나도 가볍게 들을 거고. 정말 내가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이야기면 술기운 날려."
"···."
익숙하게 신체의 궤도를 따라 회전하는 마나. 감각이 빠르게 돌아오고 저지를뻔했던 실수에 수치스러움이 타고 올라왔다.
그런 자신을 보던 로만은 이제야 표정을 풀고 호쾌하게 웃었다.
"기껏 열심히 차렸는데 음식은 먹지도 않고. 응?"
"미, 미안하다··."
"그렇다고 미안할 건 없고. 찬물 좀 마실래?"
타는듯한 갈증에 고개를 끄덕이니 그는 어디선가 냉수를 가져와 자신에게 건넸다.
한 컵에 또렷하게 돌아오는 정신.
로만이 진지하게 대답해 주기를 바라면서 취중고백이라니···그가 아니었으면 대참사가 날뻔했다.
"요즘 따라···실수만 하게 되는군···."
"난 늘 그런데? 오늘만 해도 떠오르는 실수가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거든."
이건 흔히 말하는 콩깍지일까? 자신의 현실 판단력이 흐려졌기에 저 모습조차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가?
자신의 치부로 천연덕스럽게 추태를 묻어주는 태도. 아까의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지 않고 기다리는 태도가 마음을 울렸다.
*****
드륵ㅡ
의자를 밀고 일어나 문쪽으로 향하는 에클레어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봤다.
"로만··잠시만 여기로 올 수 있나?"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문을 등지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왔다."
"퇴로를 확보해야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 같아서···이해해다오."
대답 여부에 따라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 그녀는 덜덜 떠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직감으로 알 수 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그녀의 성격상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모든 심력을 소모했다 봐도 되지 않을까.
"에클레어."
"무,뭐지?"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반복하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네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거 기억해?"
"···기억한다."
"그건 피가 나거나 멍이 드는 외상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여기도 포함이지."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니 문고리를 부술 듯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떨어졌다.
"···어, 어떻게 그대는 그런 말을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거냐!"
이성관계에서 오는 부끄러움. 빨갛게 상기된 볼.
평소의 그녀와는 멀어도 너무 먼 감정이 내 눈에는 여실히 보였다.
"나라고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이 없는 건 아니지. 그래도 참고 후회 없이 표현하는 거야. 독심술사도 아닌데 말을 안 하고 어떻게 알겠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특히나 솔직한 게 중요하다 생각하니까."
"말을 안 하고는···그렇겠지···."
내 첫마디에서 안정감을 찾은 건지 그녀는 이제서야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로만."
"어. 키티."
"키··! 후우- 어쩌다 내가···."
"하하! 우리만 알고 있는 이름이고 암호잖아."
그 반응에 웃으니 경직되어 있던 에클레어도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진지하게 들어다오."
"···말해."
에클레어 드리트나는 이리도 표정이 다양한 여자였던가.
미소를 간직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샌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염치 없이 나를 사랑하냐고는 묻지 않겠다··· 나를···그대를 사모하는 나를···언젠가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겠나?"
말로 하는 대답이 진짜 대답이 될까.
문을 등지고 있는 에클레어에게 한발 더 다가가니 그녀는 뭔가 기대하고 있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글로 모든 걸 배운듯한 그녀의 서투른 행보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여기사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로 했다.
"··읏!"
입술이 겹치는 순간 놀란 듯 소리를 낸다. 눈을 감은 채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내 어깨를 지나 손을 부여잡았다.
혀를 천천히 움직여 에클레어의 입술을 핥고 건드리니 그녀의 손이 달달달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살짝 밀어붙여 혀를 집어넣으니 그녀는 어설프지만 애정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츄읍, 으읍··하아··! 읏··!"
나와 엉켜 타액을 섞기보다는 자신의 입안으로 들이닥친 내 혀를 정성스럽게 빨고 침을 마신다.
"후우··후우··."
키스를 하는 동안 숨을 참고 있었는지 그녀는 입술을 떼고도 멍한 눈으로 실을 늘어뜨리며 애달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흐릿한 시선을 내려 바지를 뚫을 기세로 우뚝 솟아있는 내 자지를 힐끔 본다.
아래에서 올라오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범죄현장이라도 들킨 것처럼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기, 기다려라!"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튼··기다려라!"
잡고 있던 손을 놓은 그녀는 한쪽 손가락에 마나를 작게 모으더니 머리끈만을 잘라냈다.
툭-!
동여 맨 포니테일을 풀어낸 그녀가 허리까지 오는 은발을 선보이자 나는 손을 뻗어 그 끝을 매만졌다.
"푼 머리도 이쁘네."
"···고, 고맙다."
그녀는 다음으로 셔츠의 단추에 손을 올렸지만, 내 눈치를 보며 어물쩍 거리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로만. 잠시만 눈을 감아라···."
다 볼 거라는 예감이 확정적인데 그럴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나는 눈을 감았다.
"감았어."
"···으으."
툭- 투둑- 똑-
부끄러운 신음을 뱉는 그녀의 목소리에 단추를 푸는 소리. 속옷을 풀어내는 소리가 합쳐져 집안을 채운다.
내 귀를 자극하는 완벽한 삼중주였다.
"눈을 뜨기 전에 들어라···."
"듣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들으라는 듯 그녀는 내 어깨를 찰싹 후렸다.
"···내 몸은 처녀지만 흔히 남자들이 기대하는 처녀의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보기에 좋지 않은 흉터까지 있고···."
"상관없어. 흉터는 나도 많잖아. 살아가면서 생긴 훈장인데 아름답다고 해야지."
"그···정말···말로는 못 당하겠군."
꾸욱-
에클레어는 내 양 손목을 잡더니 따뜻하고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곳에 안착시켰다.
"눈을 떠도··좋다."
"어, 어떤가? 이런 몸이라도 조금은 흥미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