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7 - 제국에 선행학습 금지법은 없다.
"으잉?!"
익숙한 얼굴의 집배원에게서 전달받은 편지를 습관적으로 뜯으려는 순간 손을 멈췄다.
보낸 사람은 에클레어 드리트나. 하지만 이 편지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리케였다.
'··뭐지?'
이 정도로 둘이 사이가 좋아졌나?
리케와 에클레어.
서로가 가진 사교성에서 의구심이 들 뻔했지만··접점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거기에 내가 없을 때 리케를 지켜달라 부탁한 사항도 있으니 이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거절하기도 골이 아픈 황실의 의뢰가 아니란 것만으로 호재라.
"리케~ 편지 왔는데?"
마당에서 훈련을 하던 리케는 휴식시간이었는지 마시던 물 잔을 놓고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리케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에클레어라는 이름을 보고 웃었다.
"흐응~생각보다 빠르네."
고상한 레터 오프너 같은 건 쓰지 않는다.
찌익ㅡ
그 자리에서 손으로 호쾌하게 편지를 열어젖힌 리케는 보라색 눈을 움직여 내용을 읽어나갔다.
둘이 나눌 이야기가 궁금하긴 한데 어련히 직접 말해주겠거니 싶어 기다리니 리케가 총총 다가왔다.
"나한테 저택에 저녁 먹으러 오라는데? 클로에도 최근에는 집에만 계속 있다고 하고··· 다녀와도 괜찮아?"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 역시 동생 사랑 하나는 끔찍한 언니다웠다.
"당연하지.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해."
"으음~ 그럼 오빠 저녁은 뭐해두고 갈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점심에 만들어 둔거 그대로 먹어도 되니깐 편하게 다녀와. 진짜 그걸로 괜찮아."
입을 삐죽 내미는 리케의 엉덩이를 톡톡 치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하면 과일 사둔 것도 있으니 그거 먹어! 저번처럼 초콜릿으로 끼니 때우지 말고."
술이랑 먹고 남은 초콜릿이 아까워서 그걸로 점심 한번 넘겼더니 어지간히 신경 쓰인 모양이다.
먹으라고 차려둔 음식이 있는데 그럴 생각은 없다.
"안 그럴게 걱정 마~ 저녁이면···갈 때 근처까지 같이 가자. 올 때는 에클레어한테 무조건 데려다 달라 해. 아니면 내가 가서 기다릴까?"
"후후- 걱정은 진짜···오빠 너무 과보호야."
곤란하다는 얼굴로 웃는 리케지만 어쩔 수 없다.
꾸준한 훈련. 재능의 파도.
그것들을 이용해 미친 듯이 치고 올라가는 리케지만 내 눈엔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한 무인이자 미숙한 소녀다.
노숙자나 부랑자들이 꼬이면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더럽기도 하고···.
"마음이 그런 걸 어떻게 해? 리케가 나보다 강해지면 걱정은 줄여볼게."
"으음~ 그럼 어쩔 수 없네? 올 때는 기사님한테 말할 테니 걱정 마. 조금만 더 연습하고 준비해야겠다~"
톡톡 튀는 말과 달리 기분은 좋은지 마당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수도를 걷는다.
꽉 잡고 있는 오빠의 큰 손을 타고 열기가 들어오니 옷을 이렇게 두껍게 입을 필요가 없었다고 느껴진다.
쿠룹ㅡ
"이 음료 좀 독특한데? 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바로 옆을 보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신메뉴를 감평하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보인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와 행복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오빠~ 나도 마셔볼래."
"조금만 머금어봐. 취향 타는 맛이라 별로일 수도 있어."
주위의 누구와도 다를 것 없는. 평화를 노래하는 소설에서 묘사할 것 같은 일상적인 행복을 뽐내며 에클레어의 저택까지 걸었다.
외곽에 있는 오빠의 집에서 급할 것 없는 걸음걸이로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여유로운 산책이라 생각하니 적당했다.
그녀의 명예만큼이나 웅장한 대저택이 시선에 들어오자 오빠는 걸음을 멈췄다.
"돌아올 땐 알지?"
"알고 있어. 꼭 데려다 달라 할게."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오빠가 골목 사이로 사라지는 걸 본 뒤 저택으로 향한다.
ㅡ
입구에는 세리아와 왔을 때 안내를 담당했던 사용인이 있어 귀찮은 절차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아-!! 오랜만이에요! 무탈하셨나요?"
자신을 보는 클로에에게 예전과 같은 울렁이는 긴장감은 없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반가움으로 자신을 반겨준다.
"응. 잘 지냈지? 세리아는 다음에 같이 보자."
여전히 존대를 습관처럼 사용하는 클로에가 들뜬 얼굴로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오늘은 어쩔 수 없네요. 가문 때문에 이야기할게 있다고 들었어요. 역시 언니 같은 장녀도 그렇지만···리케양처럼 외동도 쉽지 않겠네요."
"후음~ 그렇지."
확실히 가문과 연관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영부영 만든 변명치고는 뭐···클로에도 의심 없이 납득한 것 같으니.
"언니는 잠시 서재에서 일을 보느라··곧 내려올··! 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에클레어가 보인다. 클로에는 사용인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말해두겠다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 잠깐 사이에 수척해진 것 같기도 하고?'
저 마음을 너무나 이해하기에 살짝 웃으니 에클레어는 피곤한지 눈언저리를 만졌다.
"오느라 고생했다. 회신을 줬으면 마차를 보냈을 텐데."
"여기까지 동행해 준 분이 있어서요."
에클레어의 눈가가 움찔 떨리며 창밖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무의식중에 밖을 본 게 부끄러운지 시선을 은근하게 피했다.
"····."
"오빠는 이미 돌아갔어요. 중요한 이야기는 식사 자리를 끝내고 할까요? 클로에가 기다릴 것 같은데."
ㅡ
클로에는 오랜만에 만난 자신이 어지간히 반가운지 따뜻한 감정을 뿜어내며 안부를 전해왔다.
아카데미가 시작하기 전에 세리아에게도 연락해서 한번 모이자는 이야기를 하며 요리를 비웠다.
식사 자리에서 유일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건 에클레어 드리트나 한 명.
느긋한 티타임을 즐길 시간도 없이. 접견실로 가는 자신을 보고 클로에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 앉아 사용인들이 미리 준비해둔 찻잔을 든다. 차를 마시지도 않고 한숨부터 내쉬는 에클레어가 눈에 들어왔다.
"클로에가 말은 안 해도 걱정이 많아 보이던데요?"
"안 그래도 일이 그리 많냐고 물어보긴 하더군···티가 많이 나나?"
"무척 피곤해 보이시네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자신도 부정은 못하는지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가···육체는 멀쩡하지만 정신이 이처럼 갉아먹히는 경험은 오랜만이군."
잔을 내리고 투명하게 보이는 답을 일부러 피해서 물었다.
"결단을 내리셨다길래 들으러 왔는데. 역시 기사님은 오빠와 친구로 지내시기로 마음을 잡으셨나요? 가끔 술자리나 식사 정도는 허락할 마음이 있답니다."
"그때 속단하여 뱉은 말은···미안하다. 영애 앞에서 기사라는 자가 말을 번복만 하게 되는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다만···친구로 지내는 건 힘들 것 같군."
에클레어가 씁쓸하게 웃는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기사님이 느끼신 점을 솔직하게 들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자리에서 처음으로 찻잔을 잡은 에클레어는 입을 축이고 눈길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죽을 것 같다··하루 종일 머리에서 로만이 떠나지를 않는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뜻을 담은 대답. 여성인 자신이 봐도 수줍음을 느끼는 저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저는 이해한답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의지로는 한계가 있죠."
특히나 공감하는지 에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듯 한 이야기지만···로만의 첩 자리를 알아봐달라는 귀족 여식이 있었다. 만약 내가 그걸 말해 로만이 받아들인다면··그 상상만으로 뼈가 끊어질 것 같더군."
듣자 하니 어이가 없어 콧바람이 절로 나왔다.
"오빠가 그런 걸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요."
"후후, 그런가···."
"일부다처제 이야기를 할 때 오빠가 말하길. '책임을 지고도 후회가 없을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 라고 했어요.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준다고 냅다 줍지는 않는다고요."
이야기를 들은 에클레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고는 포근한 미소를 그렸다.
"그 말은···로만 답군."
찻잔의 내용물을 비우고. 이제 진짜 본론에 들어갈 때였다.
"제대로 방향을 정하신 것 같으니. 자리는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그, 금방···?"
다가올 미래에 조금 당황한 에클레어였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써줄 수는 없다.
"기사님. 오빠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려드린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아아 - 기억하고 있다. 경청하지."
몸을 앞으로 기울인 에클레어는 학구열을 불태우며 진지한 눈을 빛냈다.
"일단 아직 확정된 사이가 아니니 이유까지 전부 설명은 못 드리지만···오빠가 교접 중 질 내에 사정한다 해도 임신 걱정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양은 엄청나겠지만."
"···응?"
"기사님도 처음이니 오빠가 어련히 조절하겠죠. 혹시 입으로 하게 되면 이가 닿지 않게 조심해서 혀로 아래 기둥을 자극하는 게 ㅡ"
"자, 잠시만!!!"
에클레어의 얼굴이 이처럼 붉어진 건 처음이 아닐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의 눈이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왜 그러세요?"
"···마음을 전하는 기회니···로만이 선호하는 음식이나 기호품 같은 걸 알려주는 게 아니었나···?"
"그래서. 마음을 전하면요? 받아들이면 그걸로 끝내시려고요?"
에클레어는 눈을 문쪽으로 피하며 한마디 꺼냈다.
"부··분위기가 좋다면··· 키, 키스 정도는··?"
쩌적-!
리케의 손에 든 찻잔에 금이 가며 접객실의 온도가 빠르게 하강했다.
"기사님. 제가 그딴 미적지근한 태도에는 양보할 시간은 없다고 말씀드렸지 않나요?"
"···."
"앉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