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 - 기한은 일주일 (삽화 有)
"방금 꺼내려던 말··· 잠시 넣어두고.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겨우 일주일 만에 발생한 결과에 당당하지 못했기에.
리케가 다가올 때마다 뒤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지만 에클레어는 어떻게든 자리를 지켜냈다.
"어어-?"
그녀는 다가와 자신의 손을 잡더니 안쪽의 넓은 화단으로 향했다.
여기에 앉으라는 듯 어깨를 누르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붉은색 벽돌을 쌓아 만든 화단에 우리는 마주 앉았다.
"기사님. 제가 기사님을 계속해서 기사님이라 부를지···언니라고 부를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지레 겁먹고 포기하면 후회하실 거예요."
"···후회라고?"
"제가 타인의 심리를 조금 잘 읽는 면도 있지만. 기사님은 오빠와 관련되면 표정이 정말 알기 쉽게 변한다는 거 아시나요? 방금 말을 꺼낼 때 우울함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창피하다. 뭐라 부정하기 힘든 말에 입이 닫혔다.
"하지만 나는 냉정하게 처지를 알고 있다···."
"기사님의 처지? 어떤 처지요?"
정말 모르겠다는 그녀의 얼굴.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내 손으로 내 몸에 칼을 박아 넣는 자해의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마주한 내 마음이 일방적이고···이루어질 수 없다는걸."
입 밖으로 토하고 나니 정말 잔혹한 현실에 죽고 싶을 정도였다.
"네?"
아직 의문이 남아있는 영애의 표정. 재가 될 듯 타오르는 절박함에 나도 모르게 다른 방안을 갈구하게 된다.
"교제 중인 영애가 허락만 해준다면···그냥···그냥 로만과 친우 사이면 안 되는 건가? 나는 지금 같은 관계로도 충분하다 생각한다···."
에클레어는 자신이 뱉으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저자세가 나왔다.
"제가 말했죠? 그 결정은 후회할 거라고."
"내가 후회할지는··지내봐야 아는 것 아니겠나··?"
자신이 봐도 결과가 뻔한 회피성 발언. 소심한 반항과 같은 말을 뱉고 에클레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아생전 겪어보지 못한 감정. 자신의 가치관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
연인이 있는 남성을 마음에 품었다는 것.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에클레어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기사님.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생각해 보세요."
리케의 손이 떨리고 있는 에클레어의 손을 잡았다.
"···."
"오빠와 지내는 생활은요. 흔히 보고 들려오는 제국의 남자들과 완전히 달라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면 뭔가 도와주려고 주위를 서성거리며 돌아다니고···쉬는 날에는 도시락을 준비해서 숲이나 산으로 놀러 가기도 해요. 물고기가 한 마리도 낚이지 않는 낚시도 오빠의 품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특유의 해박한 언변에 빠져 즐겁기만 하고 낚지 못한 아쉬움을 느낄새가 없죠."
눈을 감고 있으니 그려진다. 그 행동들이 로만이 움직이는 거라 생각하니 더없이 자연스러웠고 선명했다.
"잠결에 투정을 부려도 상냥하게 안아주고···매일 귀가 녹을 만큼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강압적으로 욕정을 해소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제가 잠들 때까지 안아주고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고 이야기한답니다."
"··읏!"
내성 없는 이야기에 듣고 있던 에클레어의 양 볼이 붉은빛을 보였다. 경험 없는 처녀인 자신도 로만을 대입하자 그 상황이 꿈결같고 매혹적으로 그려졌다.
"진짜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정말 가끔 만나서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식사나 술자리를 한 번씩 가지는 걸로 만족한다면 저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그 빈도도 여자가 늘어나면 1년에 한 번이 될지 안될지···저도 모르지만."
저런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후회하지 않는단 말인가. 처음에 꺼내려 했던 거절의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대신 꽁꽁 숨기고 있던 속마음이 밀려서 흘러나왔다.
에클레어의 손에서 떨림이 더욱 강해지자 리케가 그 손을 꾹 눌러 진정시켰다.
"나, 나는··솔직히 두렵다. 로만은 나를 한 명의 친우로 생각할 텐데···그것도 겨우 일주일 만에 마음을 바꿔서 감정을 표현하라니··거절당하면 친구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나···."
로만이 자신을 거부하면? 의뢰로 어쩔 수 없이 마주칠 때마다 잊은 척 모르는 척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태도를 보여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더 아련하고 슬퍼서 눈물이 핑- 돌았다.
"시간이 짧다고 품은 감정이 가벼운 건 아니다···제가 오빠 집으로 무작정 달려갔을 때 저한테 해준 말이에요. 단 며칠 만에 반해서 오빠가 없으면 죽을 것 같더라고요. 엉엉 울면서 집에 찾아갔죠."
"며칠 만에···?"
"감정의 깊이와 순도는 시간이 결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날도 그저 쾌락만을 위해 찾아온 저를 안은 것도 아니었고. 오빠라면 분명 진지하게 마주해줄 거예요."
저런 말조차 로만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직접 듣고 과거로 회상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부러웠고.
"제가 아무 생각 없이 기사님에게 감정을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 저를 제외하면···오빠가 제일 관심을 가지고 호감이 있는 건 기사님일 거라 확신해요."
그녀의 말에서는 사람 마음을 열어서 확인이라도 한 듯 확신이 느껴졌다. 그게 갑자기 등장한 구세주처럼 느껴져 부정적인 감정이 한 번에 물러난다.
어두운 동굴에 램프가 켜진 눈부심. 혹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인간이기에 기대하게 된다.
"고, 고민은 해 보겠다···."
내 말에 그녀는 어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일주일 안에 판단해 주세요."
그 단호한 말에 나는 화단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너무 가혹하지 않나?! 이런 건 조금 더 서로를 알아가고···나는 이제 마음을 자각했다는 걸 ㅡ!"
지금까지 없던 서릿발 같은 그녀의 무표정. 변명을 이어가던 에클레어가 입을 다물었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그딴 미적지근한 태도에 제가 더 이상 양보할 시간은 없답니다. 이 정도 해줬으면 충분하잖아요?"
"····."
"시간을 두고 알아가고 자시고. 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건 알아두셨으면 좋겠네요. 감당도 못할 마음이 커지기만 할 행위니."
침묵 안에서 고개를 주억인 에클레어는 리케에게 궁금한 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나 물어도 되겠나?"
"물론이죠."
"영애에게 로만을 도,독점하고 싶다던가···그런 감정은 없는 건가?"
자신의 음험한 욕망을 밖으로 내보이는 것 같아 절로 혀가 꼬였다.
"기사님의 총명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질문이네요. 당연히 있죠."
"···한데 어째서 나한테 찾아와 이렇게 조언까지 하지?"
그녀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언제나 머리에 담고 있는 상식인 양 말했다.
"오빠가 일부다처제를 원하니깐. 저는 저를 위하느라 오빠가 원하는 걸 참고 있다는 게 싫어요."
"···무겁군."
"그럼 기사님이 오빠의 첫 연인이었다면? 오빠가 일부다처제를 하는 걸 반대할 건가요?"
"아니···본인이 원한다면. 해야겠지."
귀족 사회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영세한 준남작가에서도 일어나는 사항을 '백금'이 원하는데 못하고 있다면 여자가 손가락질 받아 죽을 판이다.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영애는 대답에 만족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이건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지만.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저보다는 기사님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죠? 아직은."
에클레어의 귀에 쏙 들어온 '아직은'이라는 말은 호기로웠다.
그녀가 보유한 출중한 재능에 자신감. 몇 년 뒤에는 어떤 인물이 되어있을지 한 명의 무인으로서 기대가 크기도 하다.
"마음이 정해지면 저택에 한번 초대해 주세요. 클로에도 한번 만나고··· 오빠가 좋아하는 걸 몇 가지 알려드릴게요."
"알겠다···."
할 말이 전부 끝난 듯 일어나 한걸음 한걸음 멀어지던 그녀는 뒤로 빙글 돌아 웃음을 담아 조언을 건넸다.
"아! 그리고 여성이기 이전에 자신은 기사니 제국을 위한 한 자루의 검이니. 그런 발언을 하시기 전에···오빠를 생각할 때 본인 얼굴을 꼭 한번 보시길 바랄게요."
영애가 완전히 떠나는 걸 보고 화단에서 일어났다.
누군가를 사모한다는 것도 처음인데. 어떻게 할지 일주일 안에 결정하라니. 정말 가혹하기 그지없는 사항들이었다.
"하아-"
한탄스러움과 개탄스러움을 간직하고 이제는 정말 업무보고를 위해 움직이려 했다.
골목에서 나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드려는 순간 마지막에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로만을 생각하는 내 얼굴···?'
스릉ㅡ
휴대하는 거울도 없어 생각나는 건 하나.
제복 허리춤에 걸려있는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잘 관리되어 있는 검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평소의 굳게 다물린 입술은 어디 팔아먹었는지 사라져 파도를 치고있고.
누가 봐도 열기가 감도는 볼에 붉은 눈은 취한 듯 몽롱하다.
"으으읏···!!"
이런 얼굴로 영애에게 친구로만 지내겠다느니 헛소리를 했다는 게 창피해서 죽고 싶어졌다.
일주일.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