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3 - 마주치고 싶지 않은 여자 (삽화 有)
"으음ㅡ."
숙면에 빠져 뒤척이는 로만의 목소리.
에클레어는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케이프를 슬쩍 내렸다.
"···허!"
몇 분 지났다고 저리 잠드는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이 남자는 어찌 이리도 뻔뻔한 거지? 경계도 없이 쿨쿨 자고 있는 볼을 잡아서 쭉 당겨버리고 싶다.
속에 있는 말을 뱉은 당사자는 더없이 편해 보이지만. 그걸 듣고 전해 받은 입장에서는 머릿속에 태풍이 불고 있다.
외모에 대한 찬양, 무용담과 업적에 대한 찬양은 들어본 경험이 다수 있으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응 가능하다.
하지만 그 외. 단단한 껍질의 안쪽.
제국의 5기사가 아닌 '에클레어 드리트나'라는 한 명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듣는 건 감상이 달랐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얻고자 추켜세우는 귀족들과 달랐고, 그럴 이유도 없는 자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는 목적까지 순박하고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본인이 아니라 타인으로 인간 찬가를 노래하는 로만의 모습은 잔잔한 그녀의 마음에 바위를 던지는 행위 그 자체였다.
'어디까지 예상한 거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클레어는 스카디 영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ㅡ기사님은···불어오는 바람이나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피할 수 있으신가요?
ㅡ오빠에게 특별할 감정이 생긴다 해도 그건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니. 걱정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택에서 독대했던 영애와의 대화.
그녀는 미래라도 예견한 듯 발언에 순수함과 당연함을 담고 있었고. 나는 그 대답으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 단정해서 말했다.
에클레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난 기사다. 한 자루의 검이 되기로 한 몸···내가 정말 로만에게 이성적인 호, 호감을 가진다 해서···달라질 건 없다.'
귀족가의 영애들처럼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법도 모르고. 남자를 기쁘게 한다는 게 뭔지도 모른다.
저택의 옷장에는 드레스 한 벌 없이 움직이기 편한 복장과 장비뿐.
"····"
교제하고 있는 영애만 봐도 자신과는 다른 느낌의 여성이었다.
가녀리고 우아하며 매혹적이었다.
로만의 이야기를 할 때는 순종적인 사랑스러움이 타인에게까지 전달되는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
백금의 모험가 로만의 능력은 출신성분을 떠난다. 거기에 제국의 남성이라기엔 이질적인 섬세함과 상냥함까지 있다.
그는 후자의 조건을 버리고 '백금'이라는 칭호만 움직여도 입맛대로 원하는 여성을 고를 수 있다.
그럴진대, 남성에게 귀여움을 받기 위한 아양도 없으며 교태스럽지도 못한 자신이 거기에?
드리트나에서 신부수업을 걷어찬 자신이 이제 와서 그런 달콤한 꿈을 꾼다?
영애가 찾아오라 했다고 일말의 가망성을 꿈꾸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추한 욕심이다.
로만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특별한 감정이 담기기를 바라는 것은.
이런 건···사람을 매혹시키는 환상.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
꾸우욱ㅡ
케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순한 친구다. 친구. 친구. 친구. 친구. 친구···'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에 태풍을 잠재우기 위해 수십 번을 되뇐다.
불현듯 생겨난 감정의 형태를 완전히 규정하지 마라. 친구와의 우정이라고 믿고 틀에 억지로 가둬라.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형태로 그와 술을 마실 기회도 있을 것이며. 이렇게 사사로운 잡담을 나눌 시간도 필시 있을 것이다.
세상에 영원불멸은 없다.
분명···참고 견디면 언젠가 이 감정도 무뎌져 웃어넘길 수 있다.
"에클레어. 괜찮아? 속 안 좋으면 마차 멈추라 할까?"
언제 일어난 건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았던 심장이 박동하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아니. 괜찮다. 업무로 생각할게 좀 있어서···."
"너무 바쁘게 일만 하는 거 아냐? 수도로 돌아가도 집으로 바로 못 가지?"
침을 한번 꿀꺽 넘겼다. 대화를 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저··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 시선은 자연스럽게 마차의 바닥을 향했다.
"···보고만 하면 돌아갈 생각이니 괜찮다."
"그럼 다행이네. 하암 ㅡ 나는 한건 했으니 리케랑 느긋하게 지내야겠네. 아카데미는 아직 멀었으니."
모험가에 아카데미 교관까지 하고 있었지. 누구에게도 없는 독보적인 커리어다.
만약 자신과 로만이 아카데미를 같이 다녔었다면?
어떤 우연이 겹쳐 같은 기사단의 단원으로 지냈다거나, 함께 파티를 이룬 모험가였다거나···.
'미치겠군···.'
진짜 미치겠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거론하기도 부끄러운 가정과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이 머리를 채운다. 문제는 그게 상상만으로 여러 가지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ㅡ
푸르르릉-!
갈 때 마차를 끌었던 군마와는 혈통이 다른 건지 이번 군마는 실로 훌륭한 체력과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까지 확 줄어 해가 쨍하게 뜬 오전에 영지로 도착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
사냥제가 열렸던 영지에서 수도로 넘어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정확히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지나 수도에 돌아왔다.
아무리 뛰어난 무력을 가졌어도 정보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속도였다.
"으그그-!! 끝났다!"
먼저 게이트를 나와 기지개를 켜는 로만이 보였다.
"나는 정복으로 갈아입고 보고 하러 가봐야 하니 먼저 돌아가라."
"고생이네. 어?"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 동시에 고개가 돌아갔다.
ㅡ
이곳을 주시하는 보라색 눈동자. 찰랑이는 단발머리.
하늘하늘한 롱 스커트에 얇은 니트를 입은 그녀는 얼굴의 흉터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
에클레어가 지금만은 가장 피하고 싶은 인물이었다.
"오빠~!"
단화로 돌바닥을 박차고 냅다 달려온 그녀는 로만에게 안겨들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딱 일주일이라서. 산책 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지."
품에 안겨있는 영애의 표정도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지만.
그녀를 안고 있는 로만의 얼굴도 '친구'인 자신은 평생 볼 수 없는 부류의 것이었다.
차오르는 이 감정이 시기인지 질투인지 부러움인지··· 이 자리에서 눈을 감고 도망가고 싶었다.
"리케. 인사는 해야지? 초대도 받았었는데."
로만의 품에 있던 영애의 눈이 자신에게 향하더니 안광이 감돌았다. 그리고 믿기 힘들다는 듯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세상에···!"
보여선 안될게 보였고. 무언가 꿰뚫렸다는 직감. 에클레어는 그녀의 눈길에 자기도 모르게 한발 물러났다.
"두, 둘은 먼저 가라. 나는 업무보고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하니··."
타닥-!
멀리서 로만이 고생했다고 큰 소리로 말했지만, 답할 여유도 여력도 없었다.
게이트도 관리 사무소도 결국 제국의 것.
얼굴이 익은 공무원들을 지나쳐 탈의실에 들어온 에클레어는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후우 ㅡ 후우···."
황실의 은익 기사단장이고 제국의 5기사이면서.
감정 제어가 불가능한 소녀 같은 행색을 보이는 자신이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ㅡ
1분·· 2분··
호흡을 고른다.
몸을 딱 잡아주는 제국의 검은 정복을 입고 있으니 진정이 되는것 같다.
갑자기 들이닥쳐 놀랐을 공무원들에게 실례했다는 말을 남기고 건물에서 나왔다.
'···여신이시여.'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느껴지는 하나의 기척에 에클레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 기다렸다고요. 저도 지금 참기 힘든데···."
"···나를 기다린 건가?"
"오빠한테는 언니랑 이야기 좀 하고 간다고 했어요. 친해진 것 같아서 보기 좋다고 기뻐하더라고요. 진짜 귀엽죠?"
그냥 좀 끌고 가지! 로만이 원망스러웠다.
"···."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그녀가 향한 곳은 그리 먼 곳도 아니었다.
게이트를 관리하는 건물의 뒤편. 항상 붐비는 입구와 달리 사람의 흔적조차 없었다.
"어때요?"
"···어떠냐는 건. 무슨 질문이지?"
화단의 벽돌에 엉덩이를 살짝 걸친 영애는 자신을 보고 이해한다는 듯 자애롭게 웃었다.
"알면서 왜 다시 물어봐요? 저희 오빠 어떠냐고요."
"···."
"솔직히 호감 정도는 생기겠지 예상은 했는데···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보라색 눈동자에서 안광이 번들거렸다.
위축되어 있던 에클레어는 정신을 바로잡고 그녀를 똑바로 마주했다.
"뭘 보고 놀랐다는 거지?"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까 오빠를 보는 표정을 본인이 봤어야 하는데···진짜 모른 척 이럴 거예요?"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봐야 이 시간이 끝나지는 않는다. 결단을 내려봐야 결과가 변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영애의 말이 맞았다. 자연현상 같더군. 피할 수 없었다···."
우정이라고 마차 안에서부터 억지로 누르고 있던걸 인정 해버리니 미치게 개운하면서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누구의 말이 맞았니 하는 그런 걸 따지러 온건 아니고··· 엄청나죠? 오빠가 자각 없이 하는 행동들. 솔로로 모험가를 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지금 몇 명일지 상상도 안 가요. 혼자 일했어도 저를 만났을 당시 혼자인 것도 믿기 힘들었고."
공감하는 말에 에클레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섬세하고 무서울 정도로 상냥해서···제국의 남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죠! 드디어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생겨서 기쁘네요."
자신의 남자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아주는 게 기쁜지 그녀의 입가에서 진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자신은 이미 나름의 결단을 내렸다.
관계가 절단될지도 모르는 가망 없는 도전보다는. 언제 만나도 이상하지 않은 친구라는 질긴 관계로 매달려 이어가고 싶었다.
"그렇지만···나는 여성이기 이전에 ㅡ."
"아! 잠시만요."
힘겹게 꺼낸 말허리를 잘라버린 그녀는 화단에서 일어나 치마를 툭툭 털고는 한 발 한 발 자신에게 다가왔다.
"···?"
"방금 꺼내려던 말··· 잠시 넣어두고.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