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6 - 단칼 (유혈 삽화 有)
'가끔 답답하긴 해도···일은 대담하게 잘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촉박했기에.
협력자의 존재를 배제하자는 에클레어의 선택은 옳은 판단이었다.
바로 다음날.
물리적인 거리가 있었지만 유력 행선지를 떠돈 결과 커틀러 듀어의 존재는 마주할 수 있었다.
그날 타이밍 좋게 개입해준 제국 정보원들의 보조를 받아 그의 휘하에 속해있던 기사단의 생존까지 확인했다.
거기에 커틀러 듀어가 바깥에서 저녁식사를 끝내면 자신의 저택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는 훌륭한 정보까지.
반역자 휘하의 기사단원을 보자면 크게는 얼굴형과 머리스타일에 체형.
작게는 기호품의 선호도와 입맛과 행실까지 모든게 변해버려 정보원들도 먼지쌓인 과거의 정보로 인물을 특정하는데 지금까지 애를 먹은 것이다.
노력끝에 전해받은 정보의 퀄리티는 무척이나 높았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에 따르면.
놀랍게도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단 한명의 이탈자와 사상자 없이 림노에 터를 잡고 지내고 있으며.
살아가고 있는 외견과 생활상은 과거 '제국의 명예로운 기사'에서 천만년 정도 멀어져 있었다.
날때부터 뒷골목 양아치로 살아온듯 공갈에 익숙함이 돋보이며 웃기지도 않는 구시대적 문신을 하거나 술에 거나하게 취해 웃통을 벗고 지나가는 아녀자를 희롱하곤 한다.
림노의 삶 속에 그들은 기사의 검마저 버리고 다시 태어났다.
이제는 너클이나 단검을 검보다 능숙하게 사용하며 그 실력만은 나쁘지않아 림노에서 영향력 있는 인간 무리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막장까지 치달은 이들 모두 커틀러 듀어가 우두머리로 있는 '커틀러스' 라는 집단 소속이라는것 까지.
-
정보원들이 손을 잡고 판을 깔아줬으니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차례.
"예상대로 무기를 해제하지 않고 들어가는 가게는 커틀러스가 운영하는 곳이다."
에클레어는 두개의 지도에 잉크로 표시를 마쳤다.
이놈들은 노는게 지치지도 않는지 새벽이 되면 자신들의 가게에 모여 아침까지 술을 마신다.
그 시간에 커틀러스의 모든 인원이 포함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반 이상은 늘 출석하는듯 했다.
"커틀러 듀어에 대한 솔직한 감상은?"
거리가 상당했지만 상대를 특정하고 보는 순간 감각을 타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에클레어는 펜으로 종이를 톡톡 치며 그때를 회상하는듯 눈을 감았다 떴다.
"걸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검집과 일직선으로 유지되는 신체의 중심. 노련함과 완숙함이 느껴지더군. 기사단원들이 림노에 찌들며 영락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만은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겠지."
"흐음···표독스러운 인상부터 숨겨둔 수가 많을것 같은 영감이란 말이야."
설정집을 읽은 나야 알고있다.
하지만 그걸 모르고 있는 에클레어는? 정사와 같이 그에게 승리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크고작은 부상은 피하기 어렵다.
애초에 그 영감은 변수가 없더라도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기도 하고.
클로에와 사이도 충분히 회복했는데 답답하기 그지없는 드리트나 스토리를 따라 부상을 입고 동생의 걱정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 영감은 내가 전담한다."
내 발언에 에클레어의 반발이 있었지만 이외에 방법은 없다.
나는 커틀러 듀어 이외 기사단원의 얼굴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기에.
그걸 모두 외우고 있는 에클레어가 정리를 끝마치고 내 쪽에 합류하거나 먼저 림노를 벗어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한명은 반역자의 단원들을 놓치지 않도록 쓸어내고.
한명은 커틀러 듀어를 상대하는 쪽으로 구상했다.
"먼저 끝냈다고 합류와 동시에 달려들면 안되는건 알고있지?"
"판단 후에 협공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면 공세를 가하겠다···."
합류를 한다해도 둘이 동시에 커틀러 듀어를 공격하는건 아직 논외 사항이다.
다대일의 전투가 유리한 것은 당연하지만 개개인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합격술을 펼치는데 여러가지 조건이 붙게된다.
그 조건에서 제일 벗어나는게 지금 우리.
일단 내가 문제다. 나는 타인과 합공을 짜본적이 없다.
대형 몬스터라면 모여서 보이는대로 베어넘기면 되지만 상대는 히트박스가 한정적인 인간.
다수를 상대하는건 익숙하지만 한명을 다수로 공격하는건 또 다른 이야기다.
무조건이라 할 근거는 없지만 자신만의 색이 짙은 무인들은 여러번의 시행착오가 없으면 누군가와 섞이지 못한다.
두명이 효율적일지도 모르지만 아닐수도 있는 것이다.
에클레어와 나는 단 한번도 합을 맞춘적이 없으며 각자의 성향은 단기간에 합할 수 없을만큼 확고하다.
'무의식 중에 휘두르는 검로가 겹치기라도 하면···대형사고다.'
그 실수는 적에게 퇴로가 될 수도 있고 역습을 가할 틈이 열릴지도 모른다.
이럴때는 차라리 한명이 퇴로만을 차단하는게 좋다.
지금까지 본능에 따라 손이 가는대로 무기를 휘두른 나와 정석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틀이 잡힌 검법으로 경지에 도달한 에클레어.
내가 살면서 체계가 있는 무예를 배운적? 전생에 익힌 CQC정도가 끝이다.
우리 둘이 연습도 없이 깔끔한 협공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도박은 지겹다.
··
··
경로를 짜고 어디를 어떤 방향으로 전담할 것인지 정하니 타임리미트는 코 앞.
정신없이 움직이니 결단의 날은 금세 다가왔다.
우리는 커틀러스가 새벽마다 모여 술을 마신다는 선술집의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2층은 좁지만 중앙이 뻥 뚫려 1층이 훤히 보이는 독특한 디자인.
-야야!! 가게 비워!!
-문 닫는다! 다 나가!!
어제도 확인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는 커틀러스의 술자리.
정해진 시간은 없어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2층 난간에서 내려다 보니 이종족 하나 없는 인간 집단이 몰려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층에 있던 고객들은 익숙한듯 자리를 비웠고 그들은 2층을 확인도 하지 않은채 술병을 열기 시작했다.
몇없는 손님이 떠나고 2층에 남은건 우리 둘 뿐이었다.
"어때?"
수준을 보니 솔직히 그녀가 위험할 일은 없어보인다.
"문제없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버터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무기를 입구에서 반납하고 들어왔으니 당연한 선택이긴 했다.
"허접한 무기 썼다가 괜히 상처난다."
인벤토리에서 쌓아뒀던 검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냈다.
"이걸 어디서··?"
"모험가는 다 이래. 비밀스러운 수 하나쯤은 감추고 있지."
몇번이나 들은 대답에 에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
톡-
선술집 2층에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유일하게 비어있는 테이블에 깃털처럼 떨어져 내린 그녀가 후드를 벗었다.
1층에 있는 자칭 커틀러스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던 소음이 한순간에 멈췄고.
창문이 닫혀 있음에도 엄동설한의 바람이 가게로 스며든듯 피부에 닭살이 돋는다.
"브루너, 한스, 죠지, 도루네즈, 바호텐, 네레이, 아일란즈, 켄우드 ···"
아름다운 목소리임에도 잘 갈린 칼날 위에 서있는 착각을 들게하는 서늘함.
이제는 지웠던 제국의 이름.
과거의 이름이 불리자 모두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쨍강!
하나가 술병을 깨더니 무기를 만들고 하나는 담배를 꼬나물고 허리에 걸린 손도끼를 꺼냈다.
누군가는 단도를 쥐고 또 한명은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집어들었다.
경력으로 따지면 하나하나가 십년이 우습게 넘은 베테랑들.
림노에서 살아가며 언젠가 이런 날이 올거라 상정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오히려 지금도 늦은편이라 생각했다.
"붉은 눈에 은발···!"
여기도 들리는 소문이 있는데 제국에서 보낸 처형자가 누군지도 모를까.
하나가 뱉는 말에 모두가 몸을 긴장으로 굳혔다.
"ㅡ 이하 호명 된 모든 인원을 반역죄로 처단하겠다."
쭉 모든 이의 이름을 읊은 그녀가 케이프 안으로 느릿하게 손을 넣었다.
그와 동시에 신호를 주고받은 남자들이 무릎을 굽혔다 몸을 앞으로 내던진다.
"죽여-!!!"
"한번이라도 찌르면 된다!"
"으리아!!!"
"방향 나눠서 동시에 달려들어!"
방법 자체는 무식하기 그지없지만 전직 기사들 답게 마나를 사용해 달려드는 속도는 일개 불량배 따위에 비견할게 아니었다.
다수의 적이 무기를 쥔 채 코 앞까지 도달했음에도 에클레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
누군가가 말하길.
에클레어는 적에게 있어 더 없이 친절한 저승사자다.
대다수가 침울하거나 우울한 순간 한번쯤은 생각할 것이다.
'아! 고통없이 잠들듯이 죽고싶다.' 라고.
그녀는 그 꿈을 이루어주는데 누구보다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전장에서 에클레어 드리트나를 상대하고 대사활동을 멈춰버린 사체의 대다수가 가지는 특징은 '표정'이다.
자신이 죽은지도 모르는 표정을 가진 얼굴.
그녀가 제국의 5기사로 임명되기 바로 전.
혹한이 몰아치는 북방의 전장에서 야만족과 부딪히며 활약할 당시의 이야기다.
그때의 작은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병사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그 시기에는 유독 기괴한 시체가 많았다고 증언한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고통스러운 표정이나 삶의 끝을 받아들이고 눈을 감은 시체보다.
제국에 분노하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거나 긴장에 눈을 찌푸리고 썰린채 얼어버린···살아생전 표정을 유지한 시체가 지척에 깔려있었다고 한다.
ㅡ
에클레어는 달려오는 인원들을 보며 선술집의 문을 먼저 확인했다.
'···도망가는 인원은 없다.'
에클레어 드리트나의 장기이자 진가는.
상대보다 빠르게 베기 위해서 상대보다 빠르게 뽑아야 한다는 기본을 우습게 무시하는 속검.
철컥-!
자신을 해하기 위한 쇠붙이가 지척에 왔을때 케이프 안에 잡히는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에클레어가 보이는 이 기행은 스킬도 아니고 불필요하게 오러를 낭비하지도 않는다.
속도에 대한 자만도 오만도 아니며 일격에 최적의 경로를 보는 그녀의 방식이다.
샤아악-
검을 잡고 다리를 벌려 살짝 앉는다.
허벅지에서 오는 근육의 긴장감을 부여잡는 동시 허리로 검을 당겨 휘두른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 잡힌 날붙이가 그리는 하나의 궤적.
단칼에 모두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