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0 - 림노로 '간다'.
이건 에클레어가 흔히 독서를 하다보면.
특히나 지휘와 전술 같은 다독을 권장하는 교본을 읽으면 자주 경험하는 감각이었다.
1회독을 끝내고 읽었던 부분으로 다시 돌아와 읽으면.
변하지않는 같은 글의 줄과 배열에서 숨겨둔 뜻이 하나둘 보이게 되는 경험.
'둘은 어떤 면으로 판박이야.'
오늘 있었던 그녀와의 대화는 벽 너머가 보이지 않는 미로를 무작정 걷는 감각이었다.
계속해서 가다보면 출구를 찾을것 같으면서도 출구의 존재유무는 장담할 수 없는 그런 미로.
'···'
얼굴에 자리한 흉터를 어루만지던 영애는 누구에게나 이런 말을 하는건 아니라했다.
( 오빠의 눈도 믿지만 저도 기사님을 좋은 분이라 생각했고. 특히 오늘은 감명 받았어요. 가족···클로에를 보는 '눈'과 '감정'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
혹여 급박하게 꺼낸 발언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녀는 자신도 처음 권하는거라 강조했다.
정말 고민을 많이 하고 꺼낸 말이라는건 알아달라며 진중한 사과까지 얹어.
지금은 저택에서 떠난 스카디 영애가 자신과 독대하여 남긴 말이었다.
"으음··ㅡ"
침실에 누우니 어색한 단어들이 머리에 떠다니며 몸을 절로 뒤척이게 된다.
눈을 감고 수수께끼 같은 대화를 되새김질 하다보니 영애가 한 말이 부분부분 이해되기 시작했다.
'특별한 감정이라 함은···내가 로만을? 어이가 없군.'
로만이 좋은 친구라는건 부정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라는 관계가 형성되기 전부터.
의뢰를 위해 오랜기간 그를 마주해왔지만 장담컨데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낀 경험은 없다.
돌아본 대화에서 자신이 이해한게 진정 맞나 다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로만과 있으면 감정이 변할거라고?
그건 도대체 어디서 온 자신감이지?
한낱 인간은 저항할 수 없는 자연현상과 빗대어 설명한 그 신앙에 가까운 믿음만은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자신의 연인에게 호감이 생겨도 걱정말고 찾아오라니···.'
애당초 이게 타인에게 권할 사항인지 그것도 모르겠다.
귀족들도 일부다처제에 권력과 재물이 흩어질까 암투를 주고받는 시대에.
혼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쟁상대를 늘리려는 시도?
연인이라는 관계의 형태는 다수의 틀을 가지고 존재하겠지만 이런 경우는 상상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여타 발언과 달리 수십번을 되짚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
'갈땐 간다고 말하는건 또 무슨 뜻인지···.'
뜬금없이 가긴 어딜?
이동할때 행선지를 재차 확인시켜주면 로만이 좋아한다는 뜻인가.
보고의 체계를 생각하면 기사가 아닌 모험가임에도 훌륭한 습관이긴 하다.
'동행하는 인원이 그런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면 기억은 해둬야지.'
어떤 방향이든 강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기사단에도 흔하다.
통쾌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 대화록에 답답함을 느낀 에클레어는 침음을 흘리며 연신 좌우로 굴러 움직였다.
'···이 불면의 대가는 로만에게 청구 해야겠어.'
곧 있으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데 수면의 질이 말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로만을 좀 압박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에클레어는 천천히 수면에 빠져들었다.
*****
밤하늘 별처럼 뿌려져있는 리케의 걱정 중 하나는 이번에도 혼자 뻗어버려 배웅을 하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눈만 마주치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요동치는 성욕의 발산을 참고 싶지 않은 젊은 남녀가 선택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굳이 사랑을 나누는걸 밤 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을까?
쾌락을 견디다 체력이 바닥나고 자기도 모르게 잠드는 패턴이 최근 이어지면서 리케는 자신이 어느정도 시간이면 회복하고 눈을 뜨는지 어림잡고 있었다.
창문 너머 석양이 지는 순간부터 일어난 후끈한 불길은 야밤이 되어서 사그라들었고.
새벽에 눈을 뜬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는걸 증명했다.
"으으음···오빠아···."
"일어났어? 깨울까 고민은 했는데."
어설픈 계산 끝에 도래한 기적에 오늘만은 여신님에게 감사하리.
눈을 뜨니 나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커다란 등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잤으면 정신에 상처가 될만큼 후회했을게 확실하다.
본능에 패한 이성이란 참혹하기 마련이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상반신을 어떻게든 일으키니 몸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제 괜한 발언을 하는 바람에···진짜 위험했다.
- 당분간 못하는만큼 오빠 마음대로 해줘···난 걱정말고 하고 싶은거 다 해도 돼.
평소 연인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상냥하게'가 아니라 '마음대로'.
그 말은 앞으로도 조심해야 한다고 강하게 다짐한다.
나의 연인은 나보다 나를 자세히 알고있다.
이제 내 몸의 어디가 약점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절정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추는 등.
범접할 수 없는 힘과 체력을 넘어 기교만으로 자신을 완벽하게 지배한다.
'주,죽을뻔 했지···.'
울면서 가게 해달라고 몇번이고 빌었던 기억이 난다.
끝인줄 알았더니 다시 한번 쾌락의 최고점을 갱신한 정사.
그 여운이 너무 강하게 남아있었다.
막 태어난 초식동물 마냥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침대에서 일어났다.
"휴우우···."
무릎에 손을 올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고 있자.
그 모습을 보고 나갈 채비를 멈춘 오빠가 다가온다.
겨드랑이로 들어오는 듬직한 손길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다리에 힘을 풀고 안겨들었다.
"괜찮아?"
"응···."
남성적인 진한 살내음이 마음을 안정시킨다.
되찾은 안정 속에서 아주 작은 감정이 넘어가지 못한 가시처럼 걸려 꿈틀거리니.
걱정.
오빠는 조심한다고 했지만 삼라만상 뜻대로 되는건 없다.
종의 초월을 의심케 하는 무력을 가진 그라도 혹여 다치지는 않을까.
그것에 걱정을 품고 혼자 지내야하는 일주일이 답도 없이 캄캄하다.
보내기 싫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혀를 깨물어 마음에 새겨넣고 입꼬리를 올렸다.
"오빠 아침은 먹었어?"
"가면서 간단히 먹으면 되니깐 더 쉬어. 서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아니. 가면서 먹을 수 있는거 꺼내줄게. 미리 만들어둔거 있어."
정신과 함께 하반신의 감각이 돌아온 리케는 로만의 손을 잡고 침실을 나왔다.
식탁 모서리에 있는 종이 봉투를 그에게 안겨준다.
눈을 보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분명 칭얼거리게 된다.
더 이상 걱정을 입에 담는것 조차 지겹고 부담이 될지도.
자신의 가슴안에 피어나는 애틋한 감정을 전하는 것은 진한 입맞춤 만으로 충분한 법.
"···기다릴게."
"다녀올게."
*****
바싹 구워서 잘게 자른 베이컨을 크림치즈에 섞어 반으로 가른 베이글에 깔끔하게 발라놨다.
한쪽에는 단골 빵집에서 구입한 모카번.
리케가 안겨준 종이 봉투 안을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들어있네."
이건 확실한 형태를 갖춘 행복이었다.
미각만으로 터질듯한 만족감을 느끼며 아침이 찾아온 수도에서 취식보행을 펼치며 걷는다.
에클레어와 만나는건 수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직행으로 림노로 가서 만나는것도 아니다.
이동용 게이트가 없는 림노로 가기위해 마차를 운행하는 다수의 영지 중 한곳을 선정했다.
24시간 가동중인 게이트를 타고 살아생전 처음 듣는 영지로 육신을 던졌다.
··
··
-거기-!! 밀지마시오!
-살아있는 짐승은 새끼라도 들고 돌아가실 수 없으니···.
-취득한 사냥감에 대한 신고는 좌측에 있는 테이블에서 작성을 하셔야 합니다!
'아침부터 웬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
케이프와 후드로 몸을 대충 가리고 인파로 출렁거리는 게이트 존을 빠져나왔다.
특별한 날이라도 되는건지 경비병들이 있음에도 정리되지 않은 게이트 대기줄은 혼잡하기 그지없다.
"여기다."
이제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푹 누른 후드 사이로 번쩍이는 붉은 눈이 보인다.
코까지 올라오는 복면으로 눈밑 하관을 가리고 있으니 그 철두철미한 복장이 성격을 대변해 누구인지 너무 뻔하게 보였다.
"언제 왔는데?"
"20분정도 된 것 같군."
내가 지각을 한건 아니었다.
반대로 조금 빨리 온 편이지.
그럼에도 에클레어는 한발 더 빠르게 와있었다.
나는 아직도 웅성거리며 대규모 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굳이 여길 고른 이유가 있는거지?"
"대단한 뜻이 있는건 아니다. 흥행을 보증하는 사냥제가 열리는 만큼 이런 복장이 주목 받을 일도 없고···파견 중인 정보원들에게 마차를 지원 받을 수 있는 영지 중 대놓고 황가를 지지하는 귀족의 영지가 여기라 그렇다."
충분히 대단한 뜻이다.
"너무 타당해서 할 말이 없다."
내 말을 들은 에클레어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바로 이동한다. 지금 출발해도 해가 떨어져야 도착할거라 보고있으니."
이동시간에 순간 곡소리를 낼 뻔했다.
림노가 그렇게 멀었나···? 아니면 이 영지가 그만큼 외진 곳에 존재하는 걸지도.
'마차라···.'
답답함 하나에 마차 타는걸 선호하지 않는 나다.
허나 이번 의뢰에 한하여 어쩔 수 없으니 앞장서서 쭉쭉 걷는 에클레어를 따라갔다.
사냥제를 향하는 인원들과 반대방향으로 걸으니 인적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변장 같은건 할 필요 없으려나."
"어리숙한 마법이나 아이템은 림노에서 독이라 보고 받았다. 도시의 특성상 얼굴을 가리는 복장 자체는 상관하지 않지만 인식저해나 마법으로 안면이나 목소리를 변경하는건 마도구로 잡아낸다더군."
듣고있으니 그리 길게 생각할것 없이 이유는 몇가지 떠올랐다.
"집장촌이나 도박장이 줄지어 있으니 최소한의 익명성은 보장해주는데 위조나 인조적인건 안된다?"
"···정확한 사실은 모르지만 그런 종류의 이야기겠지."
투명한 욕구의 집합체인 도시임에도 그런건 신경쓰는구나.
'아카라이트'가 15세 게임이다 보니 림노는 다른 영지에 비해 허접하게 구현되어 있어 알지 못한 정보였다.
딱히 올 일이 없을거라 생각해 이야기를 들을때 귀를 열어둔 적도 없었고.
"저거다."
에클레어의 시선끝에 자리한 오두막.
좌측 빈터에 마차 한대와 출발 준비를 끝마친 적갈색 수염이 인상적인 마부가 있다.
장시간 마차를 탈 생각을 하니 눈가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출발해보자."
··
··
오랜만에 타서 답답할거라 생각했는데 말을 모는 실력이 좋은건지 불시에 덜컹거리거나 엉덩이가 쑤시는 일은 없었다.
"마부 솜씨가 기가 막힌데."
"전문적인 양성과정과 교육의 힘이다."
"오··!"
배운다고 그게 되는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감탄했다.
뚫려있는 창으로 시선을 던지던 에클레어는 숨소리도 없이 말을 꺼냈다.
"알다시피 가고있는 목적지는 림노다."
"···? 어어- 알고있어."
"향하는 행선지를 말하는거다."
"···안다니까?"
무슨 당연한 말을 하나 싶었다.
대화의 두서가 농담은 아닌듯 매번 보여주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닌가···.
작은 목소리로 에클레어가 중얼거렸다.
"뭐가?"
"가는 곳을 알려주는거다."
"그러니까 그걸 왜?"
에클레어와 나는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공중에서 시선을 마주쳤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