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9 - 떠나는 것도 준비가 필요하다.
죽음이 누구보다 두려운.
주름진 얼굴을 가진 황제에게 찾아온 불면증의 원인.
제국의 적법한 지배자가 품고있는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림노에 숨어있는 반역자의 정보를 수소문 하여 물어온건 귀족파벌에서 황제의 당파로 들어오려는 한 귀족의 충성심 증명이었다.
몸담고 있던 집단을 배신하고 받아달라 간청하는만큼 그에 걸맞는 증명과 임팩트가 필요한 법.
옛 귀족파벌의 거대한 축이자.
황제를 시해할'뻔'했던 자의 정보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걸 박쥐라 욕하면 박쥐가 피눈물 흘리겠는데?'
대상이 림노에 있다는 사실은 단기간에 알아낸 정보가 아니다.
다수의 정보원들이 희생하여 최근에 진실로 규명 되었으니.
십수년이 넘게 도주 중인 반역자를 잡아들인다면 정보 제공자인 귀족은 황제의 파벌 중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록 배신을 하고 온 만큼 완전한 믿음은 받지못하여 황제파의 겉절이가 되겠지만.
지금 귀족파벌을 버리는 과감한 판단은 미래를 본게 아닌가 싶은 대단한 결정이었다.
장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뒤통수 때릴 준비를 한 만큼 귀족파와 림노에 있는 반역자 무리는 이 사실을 예상도 못하는 상황.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조급한 움직임을 보여선 안된다.
에클레어는 황실에 근속된 이후 첫 장기 휴가라는 명목으로 은익의 부단장에게 인수인계를 진행하였다.
더불어 자신이 림노로 떠나기 전 황실의 지지자이자 제국 최고 전력인 아센 프리밀러가 행사를 겸해 이질감 없이 수도에 오는 일정도 조율해야 했다.
옆에서 보면 쓸모없는 절차가 많아보여도 이것조차 최대한 서두르고 있다는걸 알기에 나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 할 일에 집중했다.
-
'더럽게 바쁘네.'
교단과 잡화점을 순회하여 인벤토리에 소모품을 보충하며 한탄했다.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발걸음은 이제 빈민가 근처의 골목으로 향하고 있다.
삐익-! 삐! 삐익!
쌓여있는 철장 중 하나. 그 안에 자리한 작은 새둥지.
총총뛰는 새 한마리가 좁쌀만한 부리로 물고오는 쪽지를 건내받았다.
스륵-
손톱으로 살살 긁어 펼쳐야 하는 껌종이 보다 작은 메모지.
그 안에있는 동그라미를 본 뒤 다시 철장에 있는 새에게 종이를 물렸다.
'좋아···로버트랑 아이작. 둘 다 영지로 돌아갔고.'
림노로 떠나기 전에 제일 중요한 문제는 리케의 안전과 관련된 사항이었다.
그렇기에 종업식이 끝난 로버트와 아이작이 본인들의 영지로 돌아가는가 확인하는게 중요했다.
로프티 아카데미의 1학기가 끝난 시점부터 둘이 모이는 순간.
두번째 차원을 언제 열어도 이상하지 않은 타이밍이라 보고있었다.
현 시점에서 관측한 정보길드의 소식에 의하자면.
둘은 자신들의 영지로 떠났다.
이대로면 아카데미 2학기가 시작하기 전 넉넉잡아 한달 정도는 여유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두번째 문제는 새로운 형상이었지만.
'죽어라 일만 할거면 애초에 다 때려치웠지···.'
나는 히든 피스를 독식하여 대륙의 최강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인생을 사는게 아니다.
지금 독식한 것도 소화불량에 걸릴 판.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하면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멈추기도 힘들어진다.
거기에 좋은 결과가 없다는건 전생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의뢰를 가는것도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걸 명심해야한다.
대략 일주일간 자리를 한번 비워야 하기에.
종업식이 끝나고 시간이 널널해진 리케와의 일상을 뒤로 미루지는 않았다.
두마리의 토끼를 어떻게든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어때?"
"음 ~ 줄이 물을 따라 흘러가는건지 물고기가 건드리는지 느낌 자체를 모르겠어."
어떤 책을 읽더니 낚시를 해보고 싶다는 리케와 산중에 있는 저수지에 나와있다.
태양빛에 따끈한 열을 품은 넙적한 바위.
그 위에서 리케는 내 품에 앉아 낚싯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두시간이 넘게 한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하거나 둘이서 멍하니 흐르는 물을 보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자연속에 앉아 깨끗한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곧 유흥의 도시인 림노로 향해야 한다는게 거짓말 같았다.
"아~"
두손으로 대를 잡고있는 리케가 입을 벌리면 챙겨온 간식거리를 넣어준다.
주면서 나도 하나 먹고.
새벽부터 일어나 리케가 준비한 도시락을 보면 이 시간을 리케 또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수 있다.
머리 끝을 살살 만지니 리케는 더 쓰다듬어 달라며 뒤통수를 내 가슴팍에 들이밀었다.
"내일 세리아랑 언제 만나기로 했어?"
"저녁식사가 약속이라도···방문할때 빈 손으로 가면 실례 같아서 오후에 세리아랑 만나서 쇼핑 할 것 같아!"
에클레어는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리케가 한번 만나고 싶다는걸 잊지않고 세리아까지 묶어서 저택에 초대했다.
별뜻없이 언급한 것이었는데 이리 챙겨주니 고맙긴 하다.
"의뢰에서 최대한 빨리 돌아올테니 세리아나 클로에랑 자주 만나서 시간 보내고 있어. 알겠지?"
"응···다치지만 말고. 내일 나가기 전에 저녁까지 미리 해두고 갈게."
선술집이나 식당에 들려 간단히 한끼 때우려 했던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요리하는거 귀찮지 않아? 난 밖에서 먹어도 괜찮은데."
"전혀- 오빠가 먹는거잖아. 튼튼하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몸상해."
내가 혼자있을때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있는 리케의 눈에는 걱정이 자리했다.
1학기 초까지 거식증에 굶다시피 지낸 그녀가 나를 식습관으로 타이르는게 참 묘한 기분이다.
"그리고 이틀 뒤에 출발하는데 내일 자리 비워서 미안해···너무 늦지않게 금방 돌아올게."
"뭘 그런걸로. 내 걱정은 하지말고 재밌게 놀고와. 돌아오면 이야기도 들려주고."
*****
클로에의 친구들을 저택에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하는것.
아무리 에클레어라도 이걸 업무나 일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업무처럼 까먹지 않도록 메모하고 계획한 이유는 지금보다 더 바빠지거나 미루게 되면 혹시나 잊을까 싶어서다.
정확하게 예상한 시간에 림노로 갈 준비가 끝나 저녁시간 정도는 낼 수 있었기에.
쇠뿔도 단김에 뺄겸 클로에에게 말해 둘을 초대했다.
친구를 초대한 것이 기쁜지.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서재를 찾아온 클로에에게 둘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해도 되는 서류는 뒤집어두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한번 정리한 뒤 서재에서 나왔다.
"고,고명하신 제국의 기사님을 뵙게되어 여,영광입니다!! 세··리아 엘렉트라입니다!"
"이렇게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리케입니다."
'스카디' 영애라 부르는걸 싫어한다고 이미 클로에에게 듣긴했지만 참 독특한 경우였다.
로만의 어떤 성향에 감화되기라도 한걸까.
클로에의 친구라도 한명은 후작가 한명은 남작가의 여식.
기본적인 예법을 갖추려 하였는데 일개 생도이니 편하게 해달라 말을 하기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일단 앉지."
누가봐도 어떻게 모였는지 궁금해 할 조합이었다.
드리트나 자매에 세리아 그리고 리케까지.
저택에 들어올때 부터 바위처럼 굳어 긴장하고 있던 세리아는 생각보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읽고 입이 풀렸는지 점점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두명의 손님이 사온 디저트를 꺼내 별도의 자리를 가졌다.
"기사님은 우루스 같은 백금의 모험가를 만나신적이 있나요?"
세리아의 물음에 에클레어는 자신도 모르게 리케를 보았다.
로만을 입에 담아도 어떤 상관도 없다는듯 리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우루스를 만난건 1년 하고도 몇개월이 지났지. 한번 나가면 잘 돌아오지 않는 파티니."
"오오···!! 호,혹시 진짜로 키가 3미터가 넘고 불을 뿜는 용을 타고 다니나요?"
녹안을 빛내는 질문에 에클레어가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음유시인들이 퍼트린 과장된 모험담을 너무 순박한 얼굴로 믿고있었다.
"키가 크긴 하지만···2미터 정도 아닌가 싶군. 용이 아니라 혈통 좋은 군마를 타고다닌다."
"그,그런! 목걸이에 담고 다닌다는 용의 마법도 보신적이 없나요?!"
"···우루스가 목걸이를 한 기억은 없는데."
산타는 사실 자신의 부모님이라는걸 알게 된 아이마냥 세리아의 표정이 급속도로 시들었다.
"역시 언니 말대로 음유시인들은···그렇군요···."
현실의 잔혹함에 붉은색 소동물이 골골거리자 클로에는 주제를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어,언니 백금이라하면 우리 교관님이랑도 알지 않아?"
"아 ㅡ 로··만 말인가."
아직 입에 붙지않는 친구의 이름을 말한 에클레어가 손을 들어 살짝 입을 가렸다.
"저희 실전 교관님을 아시는군요!"
와! 아시는구나!
세리아가 모험가 이야기에 다시 눈을 빛내며 활력을 되찾았다.
당사자의 연인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 그 남자를 잘 안다고 말해도 되는건가?
에클레어는 한참을 망설이다 답을 냈다.
"업무상 조금은 알고있다···."
"혹시 - 교관님의 모험담 같은 것도 아시는게 있나요?"
"나,나도 궁금하네에··."
리케는 흥이 오른 세리아와 그에 동조하는 클로에에 관여하지 않고 눈가를 들썩이며 당황하는 에클레어를 구경했다.
에클레어는 극단의 조치로 사용인을 대신하여 진한 홍차를 타오면 간단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둘을 내보냈다.
클로에와 세리아는 신이나서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방을 나섰다.
""····""
떠들던 두명이 사라지자 빠르게 찾아온 침묵.
에클레어는 귀족의 기품이 느껴지는 손길로 찻잔을 들고있는 리케를 보았다.
최근 로만에게 화법에서 많이 말리긴 했지만 에클레어는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듣자하니 나를 한번 만나고 싶었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최근 기사님과 오빠가 자주 엮이는것 같아서."
'오··오빠?'
저 단어는 로만을 말하는건가? 나이차이를 생각하면 분명 이상할게 없는 단어지만···.
에클레어가 듣기에 문장만 보면 여자가 로만에게 다가오는걸 견제라도 하는건가 싶었다.
"오해를 하는것도 이해한다. 업무가 주가 되는것이지 사심을 가지고 찾아간다거나 하는건 아니라는걸 알아줬으면 하는군."
내 말을 들은 스카디 영애는 말에서 어긋남을 느끼는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 이제야 알겠다는듯 입을 살짝 벌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 그런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조급한 나머지 첫말을 잘못 꺼낸것 같네요."
"아니라고?"
"하아 ㅡ 세리아와 클로에가 곧 돌아올것 같아서···단도직입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말을 저렇게 하면 궁금해서라도 듣고싶어진다.
"··상관없다."
"지금 마음에 품고있는 남성이 있으신가요?"
"없다. 혹시 영애는 나와 시덥잖은 연애 이야기를 하고싶은건가? 아쉽게도 경험이 없어 어울려 줄 방도가 없다."
부끄럽다 생각한적 없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여기사에게 정조란 강철같은 신념과 흔들리지 않는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도 있기에.
"그렇군요!"
"어딘가 기뻐보이는군··."
이 영애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자신과 앉아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기사님은 시덥잖다고 하셨지만 사랑이란 절대 시덥잖은게 아니랍니다. 오히려 인생에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감정이죠."
···저런 부끄러운 말을 가감 없이 하는건 로만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혹시 시덥잖은 연애 이야기라 해서 기분이 상한건가?
"···조언은 새겨듣지. 하지만 나에겐 그걸 느낄 연이 없을거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 발언 조차 이해한다는듯 리케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찻잔을 다시 들어 입술을 촉촉하게 만든 리케는 에클레어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기사님은···불어오는 바람이나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피할 수 있으신가요?"
"바람을 피하다니?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거랍니다."
"···점점 모르겠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이렇게 갈피조차 잡을 수 없는.
미로를 걷는듯한 대화는 처음이었다.
"오빠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긴다 해도 그건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것처럼 당연한 일이니. 걱정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순수하게 당연함을 말한다.
마치 그게 불변의 진리라는듯 설파하는 리케를 보며 에클레어는 대화를 이해하고자 힘썼다.
"···특별한 감정?"
"거기서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답니다. 갈땐 간다고 말해주면 좋아한다거나? 여러가지."
"간다니? 행선지를 말하는건가?"
같은 언어인데 말을 할수록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대화.
리케는 문 밖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에 하고싶은 말을 압축했다.
"그저···저와 이야기 할 일이 생긴다면 편히 오시라는 말입니다."
"???"
양으로 따지자면 적지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에클레어의 머리에는 의문만 늘어났다.
드륵-!
의구심을 해소할 틈도 없이.
문이 열리고 찻잔을 양 손에 든 세리아와 클로에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