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8 - 늙은 황제는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너구리다.
끼익 - 쿵!
감정이 담긴 손에 접견실 문이 거칠게 닫히고 항상 그러하듯 에클레어와 둘이 남았다.
"기사단원들이 개구쟁이라 고생이 많네."
수염나는 시커먼 남정네를 개구쟁이라는 귀여운 단어로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사과를 받는다 말한 시점에 모험가가 기사단원을 대놓고 비하하기도 그랬다.
"다수가 모인 집단에서 모든게 내 뜻 같을 수는 없으니 품고가야지···그저 내 통솔이 부덕한 탓이다."
"우중충한 자기 비하는 그만하고. 포도 먹을래?"
눈 앞에 대롱거리는 포도줄기를 본 에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 이제 팔은 좀 내려주지 않겠나."
"아 미안. 무거웠지?"
견갑에 자리한 팔꿈치를 들어올리자 그녀는 갑주를 제몸처럼 움직여 접견실의 소파에 허리가 닿지않는 자세로 조심히 앉았다.
얼른 앉으라는 에클레어의 눈길과 손동작에 나는 그녀와 마주보고 자리했다.
"당연한 절차로 의뢰 내용을 먼저 꺼내야 하지만···그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다."
"저거 때문에?"
내 손가락이 문을 향하자 에클레어는 그걸 보고 부정도 긍정도 하지않았다.
"모험가 길드에서 단원의 행실과 언행을 물고 늘어졌다면 반론은 고사하고 숙이는것 외 선택지가 없는 문제였다. 사건 당일에는 레오가 흥분해 혼자 검까지 뽑았었고···길드에 알리지 않고 묵인해준 사실과 오늘 격 떨어지는 사과를 받아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돌아가면 경징계라도 추가하겠다는 에클레어의 다짐에 나는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여 물었다.
"친구를 잘 두긴했지?"
눈을 빤히 마주하던 그녀는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부정은 못하겠어. 방금 일도 그대가 아니었다면···상상만으로 아찔하군."
이번에 작은 호의를 얻은 타이밍.
에클레어의 사교성 증진을 위해 저 답답한 호칭이라도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부를때 '그대'라고 하는데. 내 이름을 모르는건 아닐거고?"
"알고있다···로만이지 않나."
"잘 알고있네. 알면서 왜 이름으로 안불러?"
"아니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기사단장의 듬직함은 어디가고 당황한 얼굴로 에클레어가 반문했다.
"에클레어."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몸이 갑주와 함께 흠칫 들썩였다.
"···말해라."
"친구 사이에 이름을 부르는건 '상식'이잖아?"
최면물 혹은 상식개변에나 나올법한 음침한 어조이지만 내용 자체는 당연한 사실.
막상 판을 깔아주자 에클레어는 눈을 슬쩍 피했다.
클로에와 자매라는걸 증명하듯 입술로 잔잔한 물결을 그리며 우물거린다.
"로··만··! 이제 의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싶다···."
더 밀어붙여 봐야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이정도면 에클레어 입장에서도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차차 자연스러워질거라 기대하며 오늘은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좋아. 한번 들어보자."
-
에클레어는 챙겨온 서신 두개 중 하나를 펼쳤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 도시 이름 중 '림노' 라는 곳을 알고있나?"
"모험가들은 전부 알지. 가본 경험은 없지만."
그곳은 유흥의 도시라 불리며 엄청난 양의 현물과 귀한 아티펙트들이 매일 유통되고 순환되는 곳이다.
림노를 다스리는 집단과 주인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제국에서 공인한 귀족이 소유한 '영지'는 아니다.
제국의 지배를 받는 땅도 아니고 연방국의 숨결이 퍼진 땅도 아닌.
드물게도 남아있는 독립적인 도시.
긴 시간동안 림노에 자리잡은 이미지의 가치가 워낙 지대하다 보니 한쪽이 가지지 못할거면 남에게 줘서도 안되는 곳이 되어버렸다.
제국이 넘보려 하면 연방국이 알아서 견제하고 연방국이 림노를 탐하면 제국이 최전선을 압박한다.
"나쁜 뜻이 아니라···고위급 모험가들은 대부분 한번은 다녀온다 들었다."
체계화 된 도박장 부터 제국과 연방국 양쪽에서 수입하는 다양한 술과 기호품.
종족을 가리지 않는 공창제의 실시. 제국과 연방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노예제도의 성행.
길거리에서 맞고다니지 않을 힘과 돈만 있다면 변태적인 성욕과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자리를 잡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나는 아니야."
"···그렇군."
황실에서 지금 시기에 나를 써먹을 곳이 어디인지 예상은 되고 있지만 일단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 의뢰는 림노에 가본 경험이 없으면 물건너 가는건가?"
"그건 아니다. 처음부터 설명을 하자면···림노에서 어딘가 출입할때 조건이 있는걸 알고있나."
"무기 휴대금지? 그걸 말하는거면 알고있지."
림노의 흔한 선술집을 시작으로 도박장이나 집장촌 등 특정 지역에 들어갈때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
병장기의 소유가 가능한건 가게를 지키는 직원이나 경비들에 한정한다.
허나 그 법칙을 지키기 위해 전 지역에 검사용 마도구를 보급하는 미친짓을 해둔건 아니다.
몸을 뒤져보거나 간단한 소지품 검사만을 실시하기에 평범한 인력으로는 귀속 무기나 인벤토리를 막을 수 없다.
단순한 방식이 정작 주먹이 주무기인 대상조차 막지 못하는 허울 뿐이라도.
도시 내에서 무력 사용을 억제하겠다는 슬로건의 역할은 톡톡히 하고있다.
"해서 황실에서 적합자를 찾아본게 아닌가 싶군. 맨손으로도 일정 이상의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자."
"어째 내가 주먹질 하는걸 본적이 있는 말투같다?"
에클레어의 시선이 문 밖에 부동자세로 대기하는 누군가에게 향했다.
한번이지만 확실히 보긴 했구나.
"레오 플로이드의 행적은 상급자의 골을 아프게 하지만. 재능과 실력에 있어서는 공동생활을 하는 단원들도 인정하는 기사다."
"···그래?"
저딴게? 라는 말은 삼켰다.
정작 저 말을 하는 에클레어도 마음 먹으면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버릴텐데.
저 말 한마디에 제국의 미래가 암담하게만 느껴진다.
"순수한 무력만 놓고 보자면···황실의 기사들 중에서 중위권에 들어간다 할 수 있지."
"···."
"흠흠 - ! 앞에 잡설은 흘려들어라. 결정권이 없는 내 사견이니. 신중함을 기하는 황실에서 그대···가 아니라 로··만을 선택한건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
업무 이야기에서 벗어났다 생각했는지 에클레어는 헛기침을 하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의뢰 할 내용은? 기간이 안맞으면 애초에 안받을수도 있어."
"기간부터 정리하자면 차후 날짜가 잡히는대로 최소 일주일의 기간동안 림노를 탐색할거다.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이니 7일 전부를 투자하는건 아니지만."
림노 내부에는 게이트가 없다.
제국이나 연방국의 소유가 아니니 내부에 게이트를 설치하지 못한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가까운 영지에 들려 마차와 같은 이동수단을 이용하는게 보통.
"림노를 탐색하는 최소 일주일? 무기한도 아니고···시작일도 정하지 않았는데 왜 일주일인데?"
딱. 딱. 딱.
결과를 알고도 납득이 안되는 기이한 조건에 탁자를 손가락으로 때렸다.
당장에 출발해서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면 나도 곤란했다.
림노의 생태가 궁금하긴 하지만 리케의 종업식이 끝난 시점에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게 걸리기도 하고.
"최대가 7일이기 때문이다. 황실을 지켜줄 인물이 수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같이 가려고?"
황실의 의뢰를 진행하다 보면 늪고래 때와 같이 동행하거나 보조하는 인물들이 있었지만.
중간 다리역을 지켜오던 에클레어가 난입하는건 처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번 의뢰에 대한 예상이 확신으로 변했다.
'설정집 안읽었으면 헷갈릴뻔 했네···.'
원작에서는 에클레어가 혼자 해야할 일에 내가 불순물처럼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번 일에 한해서 그렇게 될 예정이다."
"지휘를 총괄해야 할 기사단장이 7일이나 비운다면 문제가 생기는거 아닌가?"
내 물음에 에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은익 기사단은 그렇게 허술한 집단이 아니다···부단장은 내 업무를 대신할만큼 경험이 많고 빈틈 없는 기사로 믿고 자리를 비울 수 있다."
나는 이대로 일어날 결과만이 아닌 뒷 이야기까지 듣고자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그게 아니라. 제국에 몇 없는 비대칭 전력을 림노까지 보내는 합당한 이유를 듣고싶은데."
"···이때까지 훌륭히 임무를 완수해온 백금의 모험가를 믿지 못해서 그러는게 아니다. 그저 이번 의뢰의 목표가 ㅡ."
에클레어가 들려주는 정보는 간단하면서도 필요한 요지는 모두 들어가 있었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없는 사건.
잡아야 할 대상은 십수년전 황실에서 반역을 일으키려다 황제 시해를 코 앞에서 실패하고 도주한 인물.
말이 잡는다지 그냥 찾아서 죽여달라는 뜻이었다.
"반역자의 실력을 생각하면 손대중은 절대 불가능하다. 어중이떠중이들은 있어도 발각되어 포위망에 구멍이 될 뿐이고···."
에클레어는 기사이자 유력 귀족이었던 상대의 얼굴을 알지만 상대는 성인이 된 자신을 실물로 본적이 없는것도 출전 이유 중 하나다.
그 반역자가 림노에 있다는 수소문이 들려오자 한번 죽을뻔했던 황제의 트라우마가 도졌는지 반역자의 존재만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한다.
늙어서 빌빌 거리는 노인이 자기 목숨은 어찌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황제의 입장에서는 에클레어라는 보검을 사출해 반역의 불씨를 빨리 지워버리고 마음 편하게 여생을 지배자로 지내고 싶은 단순한 마음이었다.
"거기에 내가 빠진 황실의 경비는···제국 최고의 기사가 메꿔줄 거다."
아센 프리밀러가 자신의 영지에서 벗어나 일주일간 수도에 머물든 춤을 추든 나와는 관계가 없다.
기사 중 최고니 뭐니 해도 왕관 쓴 노인 수발 드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일절 관심이 가지않았다.
내게 제일 중요한건 다른 것.
"보상은?"
처음에 들고 들어왔던 두개의 서신 중 남은 하나를 내게 건낸다.
"이 서신은 저번과 같이 내가 열람하지 않았고 전혀 모르는 내용이다. 보상에 관련되어 이야기를 시작하면 넘겨주라고 하셨다. 필시 마음에 들거라고 장담을 하셨지."
돈은 이제 필요없다.
황실도 그걸 모르지 않겠지.
정작 세간에 명성이 대단한 림노에 가더라도 건질만한 히든 피스는 하나 뿐.
나 혼자 품고있는 디메리트를 메꿀만한게 황제의 주름진 손에 있을까.
스륵.
에클레어에게 건내받은 서신을 풀어 정독했다.
허례허식이 가득한 줄은 빠르게 넘긴다.
[ ··· 하여 모험가 길드의 로만이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경우. 차후 스카디 후작가와의 분쟁에서 황실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을 약조하는 바이다. ]
꾸깃-
놀란 손가락에 힘이들어가 서신이 반쯤 구겨졌다.
리케에 대해서는 에클레어가 보고한 사항은 아닐 것이다.
맞다고 해도···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기회.
겁이 많은 황실이 나에게 의뢰를 주는 이상 사소한 식습관을 비롯해 여성편력 정도는 언제나 주시하고 있을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설정상 스카디 후작가문이 대놓고 황제를 추앙하는 쪽은 아니지.'
황실의 힘이 압도적이라고 모든 귀족이 황제를 지지하는 당파인건 아니다.
그렇다고 박쥐마냥 떠돌며 한쪽을 대놓고 지지하지 않으면 이렇게 버림패로 쓰이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이번 일이 얼마나 황제의 신경줄을 건드리고 있는지 알만한 대목에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꺼림직해도 잘만 해결한다면 리케의 미래가 아주 편해질 것이다.
"···의뢰를 시작할 날짜가 정해지면 우편으로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