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7 - 어디로 가야하오
나는 지독한 악필이다.
구차한 변명을 해보자면 펜대 쥐는 법을 독학한게 이유일지도.
전생에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기초교육을 받을때.
연필을 처음 잡고 뾰족한 흑연을 얼마나 깨먹었는지 모른다.
성인이 되고 누군가가 펜을 아주 짧게 잡는 손버릇이 문제라 했는데 고칠 생각은 없었다.
계약서 사인이야 인감이나 지장도 있고 날리듯 써도 상관이 없으며, 컴퓨터가 있으니 평소에 손글씨를 쓸 일이 없던게 컸다.
짧게 잡는 습관을 고치고 악필을 교정 하는데 드는 시간과 노력은 막대했기 때문에 갱생은 기각.
하지만 아주 가끔은 옛날에 고쳐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스각- 사각-
"에이씨···."
검은 잉크를 꾹꾹 누르며 노트에 빠른 속도로 글을 적는다.
간만에 펜을 잡았는데 속도까지 더해서 쓰다보니 글씨가 정말 개판이었다.
지금 머리에 있는 양질의 기억과 정보들이 혹시나 휘발되어 사라질까.
기억의 책갈피에서 벗어나 눈을 뜨자마자 노트를 꺼내 글을 적기 시작했다.
'내가 못알아보는 일은 없겠지··?'
일단 빠르게 적고 최대한 깔끔하게 다른 노트에 옮기자는 다짐을 하며 손을 쉬지않고 움직였다.
-
책갈피 속에서 내가 무얼 했느냐.
앉은 자리에서 묽은 양주와 노트북을 낀 채로 아카라이트를 2회 클리어했다.
이때까지 절대 하지않았던 치트와 트레이너까지 사용한 채로.
'이란까지 출장인데 짐이 왜 그따위였지?'
가상세계는 내 몸뚱이가 객실 밖으로 나가는걸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문이 열린다 해도 공간에 제한시간이 있으니 한가롭게 거리에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라이브러리에 잠들어있던 게임을 시작하고 치트까지 써서.
제일 주의깊게 관찰한 점은 로프티 아카데미 1학기의 끝 부터 일어나는 대륙의 사건들.
이 차원을 떠나는게 목표인 로버트 시점에서야 아카데미 이외에는 알 바가 아니었기에.
메인 스토리를 모두 버려두고 아카데미 밖에서만 움직였다.
사이드 퀘스트를 우르르 클리어하며 평소 지나가듯 넘겼던 NPC텍스트에서 소문과 정보를 수집.
게이머가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 결론이 나고 로버트가 간섭할 수 없이 해결되는 사건들이 나에겐 중요했다.
그 결과로.
지금 황실에서 나에게 맡길만한 사건과 안건이 몇가지 있긴했으나.
정작 내가 해온 의뢰나 리케와 터트린 일들이 나비효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흑마법사. 특히 권력층과 깊게 엮여있는 네마 나타스에 관련된 의뢰라면 받는것도 고민을 신중히 해봐야한다.
"····"
현재 에클레어를 다리로 사용해 나를 호출한 황실에서 맡길만한 유력한 사건은.
미궁 혹은 유흥도시.
'두개 전부 의뢰해도 해결은 가능하지.'
아리송했던 정보를 모두 교차검증 했기에 자신이 있다.
그 정보는 모두 로버트가 아닌 나에게 필요한 것들.
선명하고 풍족한 정보에 마음속은 자신감과 안정감이 넘친다.
거기에 아카라이트 2회차가 끝났을때 애매하게 남은 시간은 자연스레 드리트나 자매의 세부 설정집을 탐독하게했다.
게임을 하면서 리케 이외의 캐릭터는 세부 설정집까지 들여다 보며 게임을 하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친목을 쌓는다면 손해 볼 일도 없고. 실제로 만나면 반응이 무엇보다 재밌었다.
'에클레어는 클로에와 달리 단맛이 아닌 풍미가 있는 쓴맛과 신맛을 좋아하며 대인 관계에 큰 어려움을 ㅡ.'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경우 입으로 중얼거리면 더 잘 떠오른다.
탁-!
필요한 정보를 모두 적고나서 펜을 테이블에 굴렸다.
조금만 쉬다 글씨체를 깔끔히 해서 새로운 노트에 옮기면 진짜 끝.
"후우."
한두시간 집중해서 글 쓰는게 던전에서 하루종일 싸우는 것보다 피곤한게 착각은 아니겠지.
'역시 몸 쓰는게 아니면 못 해 먹겠다···.'
눈감고 휴식을 하며 내 적성을 절절하게 체감할 수 있다.
펜대 굴리는 직업은 나와 안맞다는걸.
··
··
삐극-
의자를 발로 건드리며 고민했다.
'돌아갈때 꽃을 사가면 리케가 좋아하려나?'
내일이면 로프티 아카데미 1학기 종업식.
겨우 한학기가 끝나는 것인데 이름있는 귀족들이 모이니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점점 커져가는 스케일에 종업식이 아니라 졸업식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규모가 되었다.
시간이 길어지고 귀찮아지는 과정에 리케는 불만인듯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으니 1학기 마지막 수업을 끝내기 위해 아카데미에 등교했다.
나는 반대로 에클레어와 약속을 잡은 날이라 모험가 길드의 접견실에 와있었고.
정해진 시간보다 여유있게 도착해 탁자에 놓인 포도를 뜯어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센스가 좋아.'
저번 금화 한냥이 마음에 들었는지 접수원이 내준건 껍질채로 먹을 수 있는 포도였다.
알맹이가 주렁주렁 풍성했던 포도줄기가 내 입으로 반 이상 사라졌을때.
높은분이 도착했다.
똑! 똑!
-들어가겠다.
엄격함과 딱딱함이 확연하게 줄어든 목소리.
내가 무어라 답하지 않아도 문을 열고 들어온다.
끼익-
"자주 본다?"
"···그렇게 되었군."
절그럭!
오늘 에클레어는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에 어울리는 업무를 하다 온건지 제복이 아닌 갑주를 입고있었다.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뽀얀 얼굴만 빼꼼 나와있다.
머리는 시그니처나 다름없는 포니테일이 아니라 둥글게 말아 올림머리를 하고있다.
'천상 기사 체질이네.'
초월적인 신체능력이 있어 무겁지는 않겠지만 갑주라는게 여간 불편한게 아니던데.
태생부터 기사 가문인 그녀의 표정은 흔들림 없이 근엄하다.
내 눈은 에클레어를 찍고나서 그 뒤에 서있는 남성에게 향했다.
초면이라 하기에는 이상하게 눈에 익은 얼굴이다.
"그쪽은 누구시더라? 어디서 본 얼굴인데?"
그녀의 뒤에서 투구를 들고 서있는 기사 하나.
나를 보는 눈이 당장 칼이라도 뽑을듯 곱지 않은게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진다.
"먼저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전번의 일로 사과하고 싶은 일이 있다."
"···사과? 무슨 일인데?"
자리에 앉지도 않고 똑바로 서서 공문이라도 읊는것 같은 그녀의 태도에 나는 딴지 거는일 없이 지켜봤다.
"하룬 제국은 모험가 길드에 속해있는 백금의 모험가 로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
에클레어가 눈치를 주니 뒤에 있던 남자가 부정적인 표정을 덮어두고 한발을 뻗어 다가왔다.
"일개 기사단원으로 인해 이때까지 쌓아온 신뢰관계에 금이 간다면 그건 현장의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단장의 책임이기도 하다."
아랫사람 잘못은 윗사람이 책임진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다.
"먼젓번의 일로 은익 기사단의 단원인 레오 플로이드를 징계 처리하였으나. 앙금으로 남을 감정이 없도록 개인이 사과를 전하고 싶다고 간청해 왔다. 받아줄 수 있겠나?"
이름을 듣고 징계라고 하니 기억나는 얼굴.
에클레어가 의뢰를 꺼내며 몇번이고 사과했던 때가 있었다.
예전에 싸가지 없이 입놀리다 코 깨진 놈이구나.
"누군가 했는데 이제 기억나네. 해봐 한번."
척봐도 하기 싫어보이는 놈이 나서서 한다는데 이 재미있는 그림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레오 플로이드는 앞으로."
에클레어의 명령에 남자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철걱- 철걱-
자신의 상관인 에클레어를 지나치는 순간 남자는 정말 하기싫어 보이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상대가 무슨 말을 할지 더 기대가 되었다.
한참을 이를 악 물고있던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뜻은 없었지만···미안하다."
4과문이나 다름없는 발언에 이어지는 뒷말은 없었다.
"끝?"
"?"
이거면 됐지 뭘 더 해야하냐는 저 얼굴.
내 기분 더러워지라고 노리고 한 말이라면 훌륭한 언변이었다.
'뭐 이런 못배워먹은···.'
뒤에서 지금 에클레어가 사람 하나 죽일듯한 도끼눈을 뜨고 있는건 알고 있으려나?
나는 한숨을 뱉으며 몇알 남지않은 앙상한 포도줄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대로 멀뚱멀뚱 서있는 남자를 지나 에클레어의 옆에 섰다.
"저 태도에 내 섬세한 마음이 팍~ 상해버려서···의뢰고 자시고 집에 가서 술이나 마시고 싶단 말이지."
한팔을 들어 팔꿈치를 에클레어의 견갑에 올렸다.
금속의 서늘함이 피부를 타고 느껴진다.
그녀는 혹여 내가 황실에서 들고온 의뢰를 듣지도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긴장한 태도로 앞만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면목없다. 별도로 교육을 실시했는데도···단원의 부족함은 지휘하고 통솔하는 내 잘못이다··."
첫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깔끔하게 해보겠다고 굳이 보이지 않아도 되는 폭탄까지 달고왔는데 에클레어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내 기분 좀 나쁘다고 친구를 힘들게 할 수는 없지. 사과는 받았으니 의뢰나 한번 들어보자."
친구라는 말에 남자의 목이 부서질듯 돌아 나를 향했다.
부하가 눈깔을 어떻게 돌리던 간에 에클레어는 내 말에 안심했는지 참고있던 숨을 내쉬었다.
나는 에클레어의 견갑을 손으로 툭툭 치면서 해괴한 표정을 하고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야! 고생하는 윗사람 힘들게 좀 하지마라. 사고치면 아침밥에 소시지라도 나와?"
뿌드득-
'반응 맛있고.'
나를 죽일듯 쏘아보는 기사가 잇몸을 부술듯 갈아낸다.
그 소리를 들은 에클레어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위엄을 찾았다.
"레오 플로이드. 나가서 이야기가 끝날때까지 부동자세로 대기해라···교육과 다른 행태를 보인 이유는 돌아가서 듣겠다."
"··알겠··습니다."
못참고 검이라도 빼들거라 생각했는데.
일단 종족이 사람인지라 기본적인 사리분별은 하는구나.
끼익- 쿵!
접견실의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