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 - 검은손
밖에 나가서 자리깔고 낮잠이라도 자고싶은 맑은 날.
누가봐도 내 꼴은 잘먹고 다니는 한량이다.
백금이라는 이름답게 모험가 업무는 여전히 비워놨고 실전 수업도 없는 날이다.
하지만 난 내 의지로 발을 움직여 아카데미에 왔다.
내가 이렇게 아카데미를 사랑하는 성실한 교관이라니? 리케도 분명 자랑스러워 하겠지.
'책이 있으니 이해는 하지만···음료 반입이 안되는게 아쉽네.'
여기에 커피 하나 있으면 금상첨화인데.
생도들은 모두 수업을 듣고 있는 시간.
한적한 아카데미 도서관에 앉아 책냄새를 즐기며 햇빛을 맞고 있으니 조용한 발걸음으로 노인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도서관장은 만나자마자 품에서 금속으로 만든 카드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건냈다.
"도서관 지하에 출입하기 위한 증표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마법과 세공이 필요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듣자하니 일단 내가 출입이 가능한 것은 도서관 2층까지.
차후에 지하까지 열어준다는 걸 보니 도란은 내게 모든 걸 오픈할 생각으로 보인다.
'좋아. 마음에 드네.'
외부인에게 숨기려고 마음먹으면 숨길 수 있는걸 다 공개하는 진심이 마음에 들었다.
"이 증표를 몸에 소지하고 있으면 자유롭게 2층 출입이 허가됩니다. 한번 사용하는 순간 증표에 기록이 되고 귀속되어버리니 명심해주시길··."
"감사합니다."
2층에 둘러진 방범 마법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그걸 무효화 시키고 허가 된 인원이라 인증시키는 이 증표를 만드는데 제법 큰 돈이 들어갈 것이다.
지하로 가는 증표는 최소 몇 배는 더 들어갈 게 당연하고.
거기에 도란은 위층에서 본 내용에 대한 누설 금지계약도 하지 않았다.
구두로 도서관장이 내게 간곡한 부탁을 할 뿐.
이 신박한 결단은 학장인 자신이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성의를 보이고 표시를 하는 것이다.
나는 밖으로 정보가 떠돌 일은 없을 거라 관장을 안심시키고 몸을 움직였다.
'더럽게 크네.'
아카데미 도서관이 겨우 2층짜리 건물이라고 우습게 볼 수 없다.
넓이나 보유한 서재량이 전생의 흔한 도서관과는 차원이 다르기에 2층이 끝인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끼익- 끼익-
속이 상한듯한 나무계단을 밟고 문제없이 2층에 도착했다.
생도가 접근할 수 없는 도서관 위층은 소문의 마도서 같은 위험한 물건이 있어 접근을 금하는게 아니다.
층에 도착하면 보이는 서재들.
꽂혀있는 책의 대부분이 일정한 양식과 크기를 가지고 있다.
제목이 있어야 할 옆면에는 잉크로 눌러적은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 투박한 도서들.
'뭔지 알고 있으니 내용은 전혀 관심이 안가고···.'
도서관의 2층은 로프티 아카데미 초창기를 기점으로 내부 직원, 교관, 제국의 공무원 등이 참여한 회의록이나 논문 등.
아카데미 설립 당시부터 몇십년간 사용한 여러가지 서류 양식들을 모아둔 창고이자 기록관이다.
실무적으로 사용 할 일은 이제 없겠지만, 직원이나 학장의 입장에서는 흔한 서적과는 비교 불가능한 가치가 있다.
지금 보면 시대상에 맞지 않는 발언도 다수 기록되어 있으니 외부인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겠지.
학장이나 도서관장은 모험가인 내가 이걸보고 실망할거라 생각하지 않을까?
'보자··날짜가··.'
나는 아카데미에 돌고있는 구식 괴담이나 파헤치러 온게 아니다.
특정 날짜의 회의록을 찾아 손가락을 움직인다.
'이거다!'
촤르륵-
뽀얀 먼지가 쌓인 두꺼운 회의록을 펼쳐 페이지를 쭉 넘긴다.
빠르게 넘기면서도 내 눈에는 별의별 내용이 다 들어온다.
[ 제 3회 아카데미 교재 검열에 관한 제국 공무원 간담회 ]
( 서적에 그려진 크라켄이 미끌거리는건 성행위를 연상시켜···)
( 마법을 꼭 써봐야 마법사인건 아니야···)
'···뭔 개소리야?'
게임에서는 볼 수 없던 회의록의 세부적인 내용.
과거 아카데미에서는 도대체 무슨 회의를 한걸까.
지능이 의심되는 발언들은 무시하고 쭉쭉 넘겨 물건을 찾는다.
장황하게 이어지는 회의록 끝 페이지에 누군가 넣어둔 금색 책갈피가 있다.
코팅까지 되어있지만 혹시나 내 힘에 찢어질까 조심스럽게 책상 위로 책갈피를 흘려냈다.
'후 ㅡ 없으면 어쩌나 했네···.'
[ 기억의 책갈피 ]
▷대상의 특정 시간대 기억을 열람합니다.
▷기억의 열람을 위해서는 대상의 동의 혹은 직접 작성한 일기장이 필요합니다.
▷일회용 소모품 입니다.
아카라이트에서 히로인과 관계가 막히거나 스토리 진전이 어려울때 사용하는 소모품.
과거나 특정 사건을 보고 상대의 트라우마를 심층적으로 관조하거나 히로인에게 지뢰로 작용하는 장소나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물건을 분류하고 추론하는게 목적이다.
이제와서 이걸 사용 할 다른 히로인? 그딴건 관심없다.
그럼에도 나는 무신의 첫번째 형상을 얻고난 뒤로 늘 이 물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이 물건을 사용하려고 계획하는건 아예 다른 방향이었다.
인벤토리에 책갈피를 살포시 담아두고 크게 쓸 일이 없어 보이는 히든 피스까지 싹 쓸어 2층에서 내려왔다.
*****
에클레어 드리트나가 단장직을 겸하고 있는 황실의 팔다리 중 하나.
은익 기사단의 단원으로 속해 있는 레오 플로이드는 삶의 황금기를 즐기고 있다.
황실에 속한 기사들은 혼인이 늦더라도 제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포장할 수 있기에 누구도 혼인에 대해 언급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욕망의 구속구가 풀어진 레오의 유흥은 한창 진행 중.
'수도는 여자들의 수준이 다르단 말이야~'
그가 이렇게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황실에 들어간 재능과 실력도 있지만 결과만 보자면 레오는 뒷배경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레오의 부친.
플로이드 가문의 가주는 유르게나 디 벤타와 에클레어 드리트나의 사이.
제국의 5기사 중 4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부친의 존재만으로 제국의 기사들 사이에서는 거부하기 힘든 강력한 입김이 된다.
지금처럼 그의 정신이 풀어지더라도 에클레어가 없다면 단원들이 그를 구타하거나 강하게 나무라기 힘든 상황.
딸부자라 불리는 플로이드 가주에게 유일한 아들인 레오가 얼마나 금지옥엽으로 여겨지는지 알고 있기에···.
원래라면 기사단원들이 초기에 두들겨 패서라도 고쳐야 할 태도였지만.
그것도 흐지부지 지나가버렸고.
에클레어가 서류의 파도에 휩쓸려 집무실에 구속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레오의 줄타기 레벨은 극한까지 올라버렸다.
단원들도 뭔가 석연치 않지만 화 내기에는 애매한 태도들.
막상 꼬집자 하니 거론하는 것 자체가 쪼잔해 보이는 행동.
'결국 은익은 단장이 전부란 말이지.'
단장의 앞에서 선을 안 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에클레어에게 한번 선을 넘었다가 눈빛에 찍혀 죽을뻔한 이후로 그것만은 명심하고 있다.
거기서 얻은 유익함이라 하면···.
거짓말이 아닌 진실로 부딪히면 항상 시간에 쫓기고 있는 단장은 자신을 말로 나무라는 것에서 그친다는 정도.
'막 들이대는 것도 이제는 시도하면 안 되겠어.'
10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어쩌고?
저번에 와인바를 권유한 때 가능성이 아예 안보였다.
이대로는 백번을 권유해도 넘어오지 않는다.
계속하면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 된다.
에클레어 드리트나의 업무적 단호함과 고집은 자신이 플로이드 가주의 자식이라고 징벌을 피하거나 미룰 스타일이 아니다.
'지금도 살짝 위험한가?'
이때까지 권유를 하며 호감도를 상당히 날려먹은 듯했지만 방향을 바꿔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 보면 호감도를 뒤집을 방안은 나올 것이다.
그렇게 레오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타며 스릴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결국 4기사의 아들인 자신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장담이 있으니.
어떤 공성추를 사용해야 그 아름다운 철옹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지.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녀의 흥미조차 끌어내지 못한다는 걸 진하게 느끼고 있다.
고민을 하던 레오가 가게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진짜? 진짜로?! 여기 예약해도 몇 주는 기다려야 한다 했는데!"
"비앙카랑 같이 가려고 미리 예약해 뒀지."
"레오!! 나 눈물 날 것 같아···."
감동을 철철 흘리고 있는 비앙카의 허리를 잡고 갈라진 인파 사이로 들어간다.
내부에는 극소수의 손님만 받고 있기에 넓은 크기에 비해 한적함이 느껴져 좋았다.
그 극소수 보다 자신은 위.
개인실을 안내받아 들어가니 어두운 조명에 깔끔한 인테리어가 자신의 마음에 쏙 든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수조에서 물소리가 들려와 귀도 부담 없이 즐거웠다.
"간단히 마셔볼까?"
··
··
비싼 술에 절여진 비앙카를 사용해 욕정을 두 번이나 해소하고 몰려오는 현자타임에 벗어뒀던 옷을 집어 들었다.
가랑이 사이에 있는 양물은 축 처져 이제 벗고 있을 이유가 없다.
"어머~ 제가 너무 늦게 온 걸까요?"
짤깍ㅡ
스릉!
귀를 파고드는 미성에 레오가 반사적으로 검을 들고 뽑았다.
"···누구지?"
개인실의 문은 애초에 열린 적이 없다.
그럼 저 자는 어디서 들어왔단 말인가.
시꺼먼 후드 아래로 보이는 하관과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만큼 단순한 인간은 황실의 기사가 될 수 없다.
"저는 욕망을 대변하는 어, 뭐라 하면 좋을까··· 하아~ 그 할아범도 막상 없으니 답답하네."
프스스-!
레오의 인상이 일그러지며 검에서 푸른 오러가 피어올랐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빨리 네년의 이름을 말해라."
"이런 건 진짜 성미에 안 맞는데··· 레오 플로이드님.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 저희는 기사님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허. 내 이름을 알면서 이따위로 찾아와?"
생각이 어쩌고 하는 뒷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부친의 명성 하나만으로 황실에 들어온 게 아니다.
레오는 기사학부에서 으뜸이었던 실력과 경험에 자부심이 있다.
말과 표정의 정반대인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빠르게 읽고.
표정을 지운 레오가 몸을 완전히 일으켜 자세를 잡았다.
"여자는 남성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물건. 생각과 자아는 버리고 가만히 몸을 헌납하면 되는 것을···이었나요? 훌륭해요. 욕망에 솔직한 건 최고로 남자다운 거랍니다?"
자신이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밥 먹듯 했던 말이다.
대화 수준이 외설적일수록 웃음바다가 되는 친구들과의 자리···지위가 있는 인물들이 모인 만큼 대화가 노출될만한 여지는 절대 없었는데?
어찌 되었든.
'겁도 없이 플로이드의 뒷조사를 해?'
마치 자신을 다 안다는듯한 말투와 웃음이 짜증 난다.
레오도 실전에서 구를 만큼 구른 기사다. 술기운은 대화를 하며 완전히 날린 상황.
다리에 마나를 집중하고 자세를 낮춘다.
눈으로는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상황에 맞는 대응을 몇 가지 준비한다.
로브 아래에 보이는 입술이 빙글 웃음을 지었다.
"후훗- 오늘은 머리에 새겨만 두세요···저희 '네마 나타스'가 있다면 여자 하나 취하는 욕망정도는 이룰 수 있다는 걸. 다시 만나요~"
쿠우웅-!!!
바닥에서 검은손이 올라와 여성을 덥석 잡아 빈틈없이 감싸더니.
그리고 땅으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이 찐득하고 불쾌한 마나.
"흐,흑마법?!"
앞으로 튀어나가려던 동작을 멈추고 방어자세를 잡았다.
"····"
흑마법사가 바닥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레오는 그대로 문쪽으로 달려가 개인실의 문을 부수고 나갔다.
쾅!
"씨발···뭐야 도대체."
문을 열고 나오니 가게에 있는 인원은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