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 - 첫 술은 같은 잔
실제 리케가 눈을 떠서 자신의 행적을 후회한건 아직 날이 지나지도 않은 한밤중이었다.
드리트나 자매를 사용한 짧은 망상을 끝낸 리케가 꾸물꾸물 품에 안겨드니 얕게 잠들어있던 로만이 눈을 떴다.
"리케 일어났어?"
"···흐으응."
이불 아래에서 서로의 살결로 온기를 주고받으며 기분좋은 침묵을 보낸다.
리케는 내 팔뚝을 베개삼아 체구에 맞는 가냘픈 숨을 흘렸다.
"아직 밤이니깐 더 자도 돼."
"···술은 안마셔?"
자다 일어나 알콜을 찾다니.
주정뱅이 같은 발언이라도 리케가 말하니 귀여운 타이밍이라 느껴졌다.
"마시고 싶어?"
"아직 마셔본 적이 없어서···오빠랑 처음으로 마시고 싶어. 간단하게라도."
첫 술자리를 특별하게 생각하는건 나만이 아니었다.
적당히 조절하면서 마시면 내일 아카데미를 보내는데 문제는 없겠지.
"옷부터 입자. 감기걸려."
"오빠가 입혀줘어···."
이럴때를 대비해 침대 옆 의자에는 항상 옷과 담요가 걸려있다.
셔츠와 담요를 한손으로 낚아채 이불 안에서 꾸물거리는 리케에게 입힌다.
사이즈 차이가 워낙 크니 내 옷을 입히면 리케에게는 원피스가 되어버린다.
거기에 담요를 허리에 김밥처럼 말아주면 침대 밖으로 나갈 복장은 완성.
온기에 늘어진 리케를 안아든 나는 거실로 나왔다.
마루에 발이 닿도록 내려줬으나 리케는 내 목에 감은 팔을 풀지않았다.
"오빠 위에 앉을래··."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리케와 마주보며 술을 한잔씩 주고받는 것이었지만.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리케는 반대편에 앉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야 이것도 좋으니 리케가 뒤로 편하게 기댈수 있도록 손을 허리에 감았다.
침실과 다른 거실의 시원한 온도에 정신이 들었는지 리케의 눈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이건 무슨 술이야?"
탁자에 놓인 라벨도 없고 색도 없는 수상한 병을 보고 리케가 물었다.
"감람주? 분명 그런 이름이었는데··· 잘봐. 이걸 이렇게 빛에 가까이 하면?"
"오-!"
램프가 뿜은 불빛을 먹고 비치는 녹광에 리케가 신선한 반응을 보였다.
거기에 엘프들이 만든 술이라 하니 눈이 번쩍이며 신기해했다.
"나도 처음 마셔보는 술인데. 일단 마시는 법은 쓴맛이 강한 초콜릿을 먹고 이걸 조금 마시는거라나? 엘프들은 덜익은 과일이랑 마신다는데 무슨 과일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네."
"흐응~"
도란이 알려준 정보를 설파하며 상자를 열자 한알 한알 줄지어 놓여있는 초콜릿이 보인다.
개수가 제법 되어 오늘 마실때 부족할 일은 없을 것같다.
꼴꼴꼴-
사람은 둘이지만 가져온 유리잔은 하나.
거기에 술을 부어 반 정도 채운다.
"혹시 모르니 먼저 마셔볼게."
이게 위스키인지 보드카 같은 증류주인지 아무리 봐도 종류를 모르겠다.
유리잔을 들어 숨을 들이켜도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다.
스읍-
입에 살짝 머금어 가글을 하듯 돌렸다 식도로 넘긴다.
'···제법 도수가 센데?'
스트레이트로 넘기는 순간 식도 모양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도수였다.
맛은 특별히 평가할게 없었다.
곡물을 발효시킨 저렴한 증류주에 가까운 맛.
도수가 높은 술이라 생각하고 그냥 즐기기엔 힘든 맛이라.
반대로 초콜릿과 조합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긴 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다리는 리케를 진정시키고 초콜릿 하나를 꺼냈다.
"아 - 하세요."
"아~"
초콜릿 하나를 꺼내 반은 먹고 남은 반은 리케의 입에 넣어줬다.
리케는 초콜릿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연달아 끄덕이며 허벅지에 앉아 살짝 떠있는 다리를 앞 뒤로 움직였다.
아드득-
사탕이고 초콜릿이고 천천히 녹여먹는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어금니로 박살을 내 수십조각으로 분리된 초콜릿을 입 안에 놀리다 삼켰다.
'오 - 제법?'
이래서 비싼 돈을 주고 당분 덩어리를 사는 것인가.
쓴맛이 단맛보다 즐기지 못할것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는 훌륭한 풍미였다.
세리아에게 좋은 제품을 소개받았다 생각하며 유리잔을 들어 다시 한번 입에 술을 머금는다.
후륵-
입에 남아있는 묵직한 쓴맛과 옅은 단맛에 술을 끼얹는다.
"···좋은데."
"맛있어?"
그냥 마실때는 전생에 마신 이과두주에 가까웠는데 초콜릿의 쓴맛과 부딪히더니 티끌만큼 낮은 당도와 조합되어 오묘한 맛이 난다.
쓴맛 뒤에 숨어있는 고소함과 달달함이 제대로 느껴진다.
이 세상에 적응하며 느끼지 못했던 판타지스러움을 여실히 느끼게 하는 신기한 맛이었다.
"마셔볼래?"
"으음ㅡ."
막상 술잔을 든 리케는 입에 잔을 대지 못하고 망설였다.
"맛 없을까봐? 별로다 싶으면 그냥 뱉어도 괜찮아."
"아니 그건 아니구···나 취해서 오빠한테 이상한 말이라도 하면 어떡해···?"
리케는 표정이 굳을 정도로 진지한 걱정인듯 했지만 나는 웃음밖에 안나왔다.
숨길 수 없는 내 입꼬리를 본 리케가 고양이 같은 손동작으로 내 가슴을 콩 때렸다.
"··왜 웃어!!"
"귀엽잖아 ~ 귀여워서 웃는거야. 그게 걱정이면 마나로 술을 밀어내는 법 부터 알려줄까?"
애초에 이걸 사용할거면 술을 마실 의미도 없지만 알아둬서 나쁠것도 없다.
마나로 신체강화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리케는 오러까지 만들 수 있는 몸.
마나를 다루는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술을 마신 상태에서 마나를 몸에 돌려보면 감각이 둔하게 느껴지거나 제대로 순환이 안되는 곳이 있어. 그곳에 마나를 집중해서 순환이 되도록 풀어주면 해결!"
"···알겠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취해서 뭘 해도 내가 신경이나 쓰겠어?"
"아 ~"
마음을 정한듯 입을 벌리는 리케에게 초콜릿 하나를 넣어준다.
오도독-
호쾌하게 초콜릿을 씹어먹은 리케가 미량의 술을 들이켰다.
술을 넘기는 순간 높은 도수가 선사하는 뜨거운 감각에 놀란건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술이 매워··? 아닌가?"
"도수가 좀 높아서 그럴거야. 다음에는 달달한 와인으로 사와?"
고당도의 와인이라면 특히 여성들에게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니 무난하지 않을까.
"으음-?"
리케는 표정을 풀고 입술을 움직여 쩝쩝 맛을 보다 초콜릿 하나를 더 꺼내 반을 먹고 나머지를 내 입에 밀어 넣었다.
다시 한번 술을 입에 머금은 리케는 잠시 후 눈가에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이거···왜 마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이런것도 괜찮아! 오빠랑 마실 와인도 궁금하지만···."
"다행이네. 다음엔 마시기 쉬운 와인으로 구해볼게."
또 술잔을 잡으려 하는 리케의 손을 잡아 내 팔뚝에 올렸다.
"응?"
"취하는 느낌이 없다고 너무 빠르게 마시면···갑자기 훅 간다?"
당장 아침이 오면 아카데미에 가야하기에 취할 때까지 마시는건 오늘이 아니다.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는건 다음 기회.
마시는데 속도 조절이 없는 리케의 호흡을 보고 나는 반도 안남은 잔만 남겨두고 술병을 봉인했다.
"치이···그럼 다른거 마시게 해줘."
리케는 술잔에 미련을 버리고 내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입 안에는 아주 연하게 초콜릿의 단맛과 쓴맛이 남아있었다.
내 혀를 사탕처럼 빨고있는 리케도 같은 감상을 가지고 있겠지.
겨우 두모금으로 취한건 아니다.
우린 늘 이래왔고 입맞춤이 시작된다고 무조건 정사를 나누지는 않는다.
서로의 애정을 보여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가벼운 애정행각이 끝나면 집에 찾아온 정적에 몸을 파묻고 자연스럽게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아 맞다. 오늘 이 초콜릿 사러갔는데 세리아를 만났거든."
"오빠랑 세리아가?"
내가 가게를 단신으로 찾아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이 초콜릿을 사오는 처절한 경위를 들으며 리케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앉아 숨만 쉬어도 행복하지 않은가.
입이 마를 정도로 이야기하다 대화가 끊어져도 그건 그것대로 즐거웠고 어색함은 없다.
술잔에 남은 술을 느릿느릿 천천히 비우며.
같이 먹으려고 사온 과일을 먹기도 하고 어린애 같은 장난을 치거나 떠들며 시간을 보낸다.
한때는 소파에서 리케에게 깔린 채 잠깐 졸기도 했다.
이런 즐거운 밤을 보내면 아침은 금세 찾아오는 법.
"나갈까?"
"나가자~"
해가 뜨는 걸 보고 따뜻하게 옷을 입은 리케와 손을 잡은 나는 매번 향하는 단골 빵집으로 향했다.
*****
"흐음···."
보통 사람은 불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시간.
에클레어는 침실이 아닌 서재에 불을 끄고 앉아 분수처럼 넘치는 감정을 차분하게 추스르고 있었다.
테이블 한쪽에는 정리되지 않은 포크와 그릇이 남아있다.
클로에와 식사 후 서재에서 디저트를 먹으며 잔잔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흔적.
자매의 대화에 심도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이때까지의 시간이 있었기에 깊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관계에 있어 진전은 분명하게 있었다고 자부한다.
( ㅡ 일이 좀 풀린 친구한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해. 아니면 동생한테 주던지.)
'분명 동생에게 줘도 상관없다 했지만···.'
그가 했던 말이 자신의 입장에서 너무 순탄하고 형편 좋다.
혹시 또 자신만 눈치채지 못하는 모험가식 농담 아닐까?
자신에겐 전부여도 로만에게 클로에는 남이다.
선물로 주고 남한테 줘도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로만에게 받은 검은색 장미 브로치가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 물건의 경위를 클로에에게 설명하는 걸 떠나서···줘도 된다 했지만 진짜 줘도 되는 건가?
예의상 해본 말인데 자신이 문자 그대로 행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 물건이 정말 필요한 건 클로에라는 걸 자신만은 알기에.
고민이 되었다.
로만이 봤으면 답답함에 쓰러질 생각을 긴 시간 하던 에클레어는 어떻게든 결정을 내렸다.
'업무는 아닌데 친구라면···찾아가도 되겠···지?'
이렇게 앉아 자신이 고민해도 답은 안 나온다는 걸 에클레어는 알고 있다.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속 시원한 해답이 나오겠지.
자신은 모르는 미진한 발전을 발판 삼아 그녀는 언제쯤 휴일을 잡을 수 있는지 근무표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