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60화 (60/250)

Chapter 60 - 시작이 반은 넘더라

자기나름 믿는 구석이 있는 레오 플로이드의 불경함은 집무실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잊었다.

휴식시간 없음.

점심시간 없음.

매번 업무 시작 전에 안정을 찾고자 마시던 홍차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날 집무실에 앉은 에클레어가 쌓인 서류를 몰아서 처리하는 펜놀림은 가히 귀신이 들렸다고 평가 될 정도.

빠른 결재를 위해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서류를 들고 돌아다닐 정도였으니,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제국의 공무원들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 에클레어 드리트나가 직접 보급담당과 예산부서를 들쑤신다더라.

농담도 안통하고 표정변화도 적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소문과 무용담만 해도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을 넘어있다.

검 한자루 없이 손가락 하나로 여기 담당관들을 전부 죽일 수 있는 인간.

물론 그런일은 없을 거라고 모두 알고있다.

허나 헤엄치는 상어가 물지 않는다고 확신이 있어도 수영을 하며 그것에 겁먹지 않는다는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에클레어가 직접 움직이자 역대급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결재는 빠르게 이어졌고 그녀는 저녁시간 전에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처리를 해야하나···.'

행정 말단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생각을 악의없이 하며 에클레어는 들뜬 마음으로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제국을 위해 일하는 모두에게 지급되는 검은색 제복을 걸치고 사이즈가 큰 모자까지 눌러쓴다.

여느때와 달리 마차를 타지 않은 그녀는 직접 발을 움직여 저택 근처 상권으로 향했다.

한발을 내딛기 위해 대단한 요리를 해본다거나.

클로에를 위한 저녁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가벼운 요리는 가능하지만 사용인이 만든 저녁을 대신 할 정도로 풍부한 요리는 그녀도 자신이 없다.

특히 스카디 영애의 요리를 먹은 뒤로 조금 자신을 잃은 것도 있었다.

식사 후에 가벼운 티타임을 즐길만한 디저트를 생각하며 에클레어는 거리를 걸었다.

'클로에가 좋아할 만한것···.'

자신과 달리 어릴때부터 단것을 무척 좋아했지.

베이커리와 초콜릿 등을 다루는 디저트 가게는 어지러울 정도로 많았지만 도대체 발을 어디로 뻗어야 할지 모르겠다.

돌고돌아 줄이 가장 긴 가게를 택한 그녀는 제국민들 사이에 섞여들어 조각케이크 두개를 겨우 건졌다.

-

저택의 문을 열고 에클레어가 들어오자 사용인들이 다가오고 클로에가 허겁지겁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빠르게 걸어온다.

씻고 몸을 정리하다 급하게 나왔는지 잿빛 머리카락 끝에 마르지 않은 물기가 느껴진다.

"클로에. 감기 걸리지 않게 머리는 완전히 말리고 와라."

"···명심하겠습니다."

혼을 내는거라 생각했는지 굳어있는 클로에를 보고 에클레어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본 클로에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명심까지야···가서 천천히 말리고 준비가 끝나면 식당으로 오도록."

"아···? 네,네!"

화다닥 사라지는 클로에를 보던 에클레어는 멍하니 서서 자신을 보고있는 사용인에게 상자를 건냈다.

"이건 식사 후에 클로에와 먹을 예정이니 따로 챙겨두고. 저녁은?"

"···요리는 당장에 낼 수 있습니다."

"클로에가 내려오면 그때 저녁 준비를 하면서 나를 부르도록. 서재에 있겠다."

비단 클로에만이 아니다.

저택의 주인 에클레어의 어딘가 변한 분위기에 모두가 영문도 모르고 놀란 분위기였다.

*****

당장 야외 수업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식기로 필요이상의 소음을 낸다거나.

포크나 나이프의 순서가 틀리는 등.

자신에게 부족한 예법을 교육함에 있어 늘 신경을 쓰던 언니였다.

매번 긴장하고 신경쓰던 예법 부분이 아니라 오늘만은 다른 쪽으로 극도의 긴장을 하고있는 클로에였다.

"야외에서 처음 지내보면 쉽지 않았을텐데, 탈이 난 곳은 없나?"

"네··괜찮습니다."

"정작 나는 아카데미에 다닐때 종자로 발탁되는 바람에 ㅡ"

늘 대화가 없다시피 했는데 갑자기 질문세례를 퍼붙는 에클레어의 행동에 클로에는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야외 수업중에 만났던 기사님이 언니를 찾아가 뭐라 말이라도 한걸까.

'언니가 갑자기 변해버···린.'

클로에의 눈이 에클레어의 식기로 향했다.

그리고 변했다며 함부로 이어가던 생각을 멈췄다.

피하지 않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보이는 것들.

귀를 열어두고 어떻게든 대답하며 클로에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언니는 식사를 시작할때 첫 입을 뜨고 그 이후로 스푼을 들고만 있다.

식사 전에 늘 한컵은 비우던 냉수는 한모금도 마시지 않아 컵에 물방울이 맺혀 흐르고 있다.

손가락에는 손톱으로 꾹 누른 자국을 달고 초조한듯 계속해서 움직이니.

질문은 긴 시간동안 미리 준비한 것처럼 끝도없이 이어진다.

누가 뭐라해도 둘은 같은 드리트나이자 어릴때부터 함께 지냈던 자매다.

에클레어가 아닌척 해도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걸.

클로에는 느낄 수 있다.

이유를 떠나서 자신의 언니가 무리하고 있구나.

'언니는 급작스레 변한게 아니라···.'

어떻게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식사시간에 손을 아예 멈춘채 어떻게든 자신과 말을 이어가려 애쓰는 에클레어가 눈에 담긴다.

클로에는 식탁 아래에 허벅지를 한번 꼬집어 정신을 차리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릴때의 언니와 지금의 에클레어가 흐릿하게 겹쳐보여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어,언니···사실 이번 수업에서 제가 오러를 ㅡ."

이 마음가짐은 야외 수업 덕인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올지 모르는 이 기회를 부여잡자고 클로에는 과감하게 손을 뻗었다.

*****

아카데미에 도착해 인원체크가 끝난 생도들을 해산시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다거나 찝찝함에 씻고 싶다거나 모두 비슷한 이유였다.

이야기가 끝나는걸 기다리겠다는 리케를 다독여 집으로 보내고 나는 도란과 만나기 위해 학장실로 향했다.

덜컥-!

학장실 안 창문을 열어뒀는지 노크를 끝내고 문을 여는순간 선선한 바람이 복도로 뿜어져 나온다.

"완벽하게 수업을 끝마친 교관에게 박수를 치며 맞이하고 싶었지만 칠 수 없는 내 상황을 이해해주겠나?"

바람에 비어있는 소매가 펄럭이는 도란이 농담을 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랫사람은 웃기힘든 농담을 하십니다."

"하하하! 그냥 웃어주게! 정말 한시름 놓았다는 말이 이때를 위한 말이 아닌가 싶군."

도란이 책상에서 벗어나 접견을 위한 소파에 앉자 나도 맞은편에 자리했다.

"죽은 놈들에게서 알만한게 있었습니까?"

숙영지 입구에 천막을 올리고 노가리나 까던 기사학부 교관들에게 암살자들의 시체를 모조리 넘겨 처리까지 맡긴 상태였다.

"얼굴이 알려진 여자와 남자가 하나씩 있긴했으나 딱히 알아낼 수 있는건 한계가 있지···죽이지 않고 사로잡아도 요즘은 마찬가지고."

귀족들이 그만큼 모여있으면 짚이는 것도 한두개가 아니다.

개중 누구를 노리는지 모르지만 누구를 노려도 이상할게 없는 것이다.

차기 가문의 계승을 위한 수작일수도 있고 개인적인 원한일지도 모르며 진짜 아카데미의 위상을 실추시키기 위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애매하다.

권위에 도전했다가 송장이 된 암살자들의 존재를 외부로 알려 아카데미의 우월함을 포장하고 광고할 것인지.

이 사실을 덮어 외부로 나가서 사건이 터진건 학장의 경고를 제대로 듣지 않은 모 가문에 의한 악재였다는 상황으로 밀고갈지.

도란 에스카로는 머리에서 주판을 쉬지않고 튕기고 있다.

"아쉽군요. 증거가 하나만 있었어도 재밌는걸 볼 수 있었는데."

"허어-! 아쉽기는 이 친구야! 오히려 이런 쪽은 무지함을 연기하여 엮이지 않는게 좋지. 귀족들끼리 감정싸움에 들어가면 재밌는건 정말 처음뿐이야."

뒤로 갈수록 눈살을 찌푸릴 일밖에 없다며 도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깍-!

도란은 구석에 있는 장식장을 열더니 술병 하나를 꺼내왔다.

"무식한 덩치 하나가 내 술을 축내고 있어 내줄만한건 이것 뿐이구만. 혼자서는 무엇도 못하는 노인네가 주는 성의를 받아줬으면 좋겠군."

사실 돈이 있어도 이건 못구한다며 도란은 콧김을 뿜었다.

내가 한 일에 합당한지는 모르지만 선물이라 하니 거절은 하지 않았다.

"술은 제가 선술집에서 잡히는 것만 마시다보니···식견이 부족해 이게 무슨 술인지 모르겠습니다."

색이 없는 평범한 물 같은데 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에 비칠때마다 표면에 옅은 녹빛이 감돈다.

아무리 흔들어도 거품이 생기지 않는게 신기했다.

"부르는 이름이 워낙 많아서 제국내에서 정확한 명칭은 없지만 흔히 엘프의 술 혹은 감람주라 하지."

"엘프···? 엘프가 술을 만듭니까?"

흡연이나 술 그리고 성생활은 15세 이용가인 아카라이트에서 자세히 언급되는 부분이 아니기에 나는 흥미가 생겼다.

"물론이지. 그건 연방국에 몇없는 엘프 주조사들이 만든걸 몰래 들여온 것으로 연방국 내부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야."

"호오- 벌써 맛이 궁금해지는군요."

"콜렉터로서 오지랖 좀 부리자면···이 술은 마시는 법이 정해져있다네. 쓴 맛이 강한 다크 초콜릿을 먹어 입안에 단맛과 쓴맛이 돌때 한모금 들이키는 것이지. 엘프들은 설익은 과일과 즐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초콜릿이 더 맞다는게 다수 의견이지."

리케에게 권해볼까.

리케와 술을 마신적이 없다는걸 떠올린 나는 돌아가는 길에 과일과 초콜릿 까지 사기로 했다.

햇볕에 술을 이리저리 흔들어보고 있으니 도란은 용건이 끝나지 않았는지 말을 덧붙였다.

"사실 술 한병으로 이번 일을 묻어버릴 생각은 없네. 술이야 아무리 귀해도 결국 사치품이지만 교관이 구한 내 체면과 목숨은 여흥이 아니지 않나."

"···그리 높게 봐주신다면 뭐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허허- 호쾌하군! 어디···원하는게 있다면 일단 말해보게. 내 최대한 신경써봄세. 이 늙은이는 욕심을 부려 교관···아니, 백금과 더 돈독하게 지내고싶군."

이득을 보고 입을 싹 닦는게 아닌 상부상조의 관계를 형성하려는 도란의 손을 내칠 필요는 없다.

나는 떠오르는 몇가지 사항을 고민하다 길을 정했다.

"그럼··아카데미 도서관을 1층 외에도 사용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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