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58화 (58/250)

Chapter 58 - 돌아갈 시간이 온다.

찐···이 아니고 은색 고구마?

아무튼 에클레어가 떠나고 나는 천막 안에서 깔고 앉아있던 의자를 들고나와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를 쫓아내려고 했던 말과 달리 리케와 야외에서 정사를 치를 생각은 없었기에 손에 들린 의자를 숙영지 중앙에 두고 앉았다.

무리를 이루어 숙영지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생도들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모닥불 준비가 끝난 파티는 저녁을 자유롭게 준비해도 좋다!"

가볍게 지나간 점심때와 달리 현재는 수업으로 격하게 체력을 소모한 상태.

엎친 데 덮친 격 기온까지 서늘해지기 시작하니 다들 먹고싶은 요리가 하나씩은 있는듯했다.

-우리도 저녁 한번 만들어볼까?

-과일 말린거 맛없어서 못먹겠어···.

-감자 같은건 그냥 물에 넣고 끓이면 되는거 아냐?

배가 뜨끈하고 속이 든든한 아카데미 식당이 사무치게 그리울거다.

해가 떠있던 시간과 달리 모닥불이 빠르게 쭉쭉 들어서고 생도들은 저녁에 대한 심도있는 고민을 시작했다.

점심때처럼 그냥 포기하고 육포와 과일을 들고가는 파티의 수는 현저하게 적어졌다.

이 사이에서 리케의 파티는 순항 중으로 딱히 논쟁 없이 한명을 필두로 저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조금 불안해 보이는 점으로.

아직 체력에 문제가 없어 보이는 두명과 달리 클로에는 정체불명의 기사와 긴 대련에 완전히 지쳤는지 등을 붙이는 순간 잠이 들것 같은 눈이었다.

리케와 세리아도 그게 걱정인 눈치였다.

'우리의 로버트군은···.'

로버트가 있는 천막으로 시선을 돌리자 날 보고 있었는지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지금까지 같은 자세로 있었다면 어딘가에 욕창이 도졌을텐데.

엎드리고 있는것도 이제 지쳤는지 여성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바람빠진 풍선처럼 앉아있다.

노곤함이 가득 찬 퀭한 눈.

세상만사에 불만이 가득한 눈알에는 분노가 아닌 두려움이 넘칠듯 찰랑인다.

이때까지 지겹도록 봐온 감정이기에 보기만해도 알 수 있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로버트는 고개를 획! 돌렸다.

'이 새끼 왜 화를 안내지?'

내 입장에서는 잘 놀다 나폴리탄 괴담을 이해해버린 꼬맹이 마냥 반응을 하는 로버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속은 한국인이면서 보통 귀족들 보다 더 선민의식 가득한 행동을 보였으니 길길이 날뛰며 나나 리케에게 따질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재미있는 반응이었다.

재미도 있고 나쁘지도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이미 몇가지 일을 겪으며 메인 스토리의 줄기는 피할 수 없다는걸 깨달았으니.

저대로 사고 안치고 두번째 차원이나 좋은 타이밍에 열어주면 베스트였다.

··

··

"후우 ㅡ 잘먹었다."

리케 덕에 사제들과 나는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든든하게 저녁식사를 먹었고.

피곤한데 배까지 채우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생도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클로에도 정말 한계를 맞이했는지 잠에 들지 않으려고 세리아와 파티의 천막 주위를 걷고 있었다.

모닥불을 지키고 있는 리케와 눈으로 가벼운 장난을 주고받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통-! 통-!

마른 장작으로 천막의 쇠기둥을 때려서 생도들의 잠도 깨우고 집중도 시킨다.

"지금처럼 해가 떨어지면 빛이 들어오는 이른 시간에 움직일 수 있도록 일찍 숙면하는게 좋다."

잘 수 있다는 말에 피곤에 찌든 얼굴들에 화색이 돈다.

"당장에 누워서 편하게 잘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몬스터나 짐승 혹은 독충 같은 위험요소가 존재하는 곳에서 그럴 수 없지."

교보재 박스에 쌓여있는 네모난 병을 집어든다.

마치 담뱃재를 섞은것 같은 탁한 색의 액체가 한가득 들어있다.

"이런 벌레를 쫓아내는 약을 사용하는 경우. 한병을 다 부어버리는 것과 소량을 주위에 붓는 것의 효과는 같으니 마구잡이로 낭비하여 정작 필요할때 못쓰는 일은 없도록 해야한다."

"혹여 예상보다 길어지는 일정으로 적정량을 준수하여 사용했음에도 약이 다 떨어졌다면 허브나 특정 잎을 태우는 수도 있다. 지금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대체법이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불침번을 교환하는 시간은 인원이 각기 다르니 파티마다 달라진다.

시계가 없어 시간을 모르는 상황에는 장작의 개수를 정해두고 몇개를 태우면 바꾸는 방법도 있고 양심적으로 불침번의 피로감에 따라 바꾸는 법도 있다.

"일단 교관은 여기에 계속 깨어있을 예정이니 불침번을 한명에게 가혹하게 몰아준다거나 누구는 서지 않는다는 불상사는 없어야 할거다. 그런 파티는 야밤에 교관과 훈련을 하고 싶다는걸로 알겠다."

부상자나 병자는 예외라는 사족을 붙이며 설명을 끝냈다.

이미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눈을 은근히 아래로 내리는 생도들이 보인다.

아카데미에서 생도는 모두 평등 하다고 말은 해도 그걸 믿는 인간은 누구도 없고 서로 가지고 있는 가문의 위세는 졸업 하는 순간 무시할 수 있는게 아니니 뻔한 일이었다.

"질문이 있다면 받겠다."

검술학부 남자 생도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불침번을 서는 동안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원래는 소음을 내지않고 불과 자리를 지키는게 기본이지만···다른 인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일기를 쓴다거나 잠을 깨기위해 일어서있는 정도는 허용하겠다."

"···그럼 개인 훈련은 불가능 합니까?"

"적이 나타나도 즉시 대처가 불가능한 연공법은 당연히 불가. 거기에 집중력이 필요한 다른 훈련도 마찬가지. 경계는 의식을 외부로 향하게 해야한다."

남자 생도는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이해는 했는지 손을 내렸다.

"더 질문이 없다면 불침번 순서를 정하고 잘 준비까지 마치도록! 이상!"

-

리케와 세리아가 눈이 반쯤 감긴 클로에를 침낭에 억지로 구겨넣는걸 관전했다.

'사이 좋네~'

같이 있는 리케도 나름 즐거워 보이고 생각보다 셋의 사이가 돈독해 보인다.

게이머의 입장에서 보고싶어도 절대 볼 수 없는 이 장면을 눈에 계속 담아두고 싶었지만 자꾸만 내 신경을 거스르는 감각들에 엉덩이를 의자에서 빼고 일어났다.

'아직 준비가 안끝난 파티가 반 정도···.'

빨리 다녀오면 충분해 보인다.

*****

귀족을 암살하지 않더라도 표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조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잡히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는걸 누가 믿어주겠는가.

거기에.

액수가 큰 건은 마나 계약서가 기본 바탕으로 깔려있다보니 암살자에게 정보를 빼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게 요즘 인식이다.

귀찮게 시간 끌지않고 잡으면 바로 목이 달아나는게 요즘 동업자들이 받는 눈물나는 대우.

'그놈의 돈··돈···.'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며 풀숲을 기었다.

일을 하는건 죽을만큼 싫은데 돈 쓰는건 또 너무 재밌고.

지금같은 일로 한탕에 많이 벌어버리면 씀씀이가 제어가 안된다.

평범하게 살면 몇년은 풍족하게 쓸 돈을 한두달 정도면 다 써버리는게 일상이 되었다.

'왜 백금이 아카데미에서 교관을 하고 있는거야··?'

백금이라는 거물을 보는것도 처음인데 하필 적인 상황.

미친 존재 하나가 이번 의뢰를 받는걸 망설이게 했지만 이때까지 본적 없는 큰 금액에 눈이 돌아갔다는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믿는 구석이 없는 자살희망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스킬이면 난다긴다 하는 백금 앞에서 암살은 한번 시도해볼만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기도 했고.

혹 안되더라도 모험가 출신답게 여자를 그리 좋아한다 하니 자신의 얼굴을 보면 바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들은 얼마나 강하든 결국 성욕의 노예.

예전에 기사들에게 잡혔을 때나 경호를 하는 청금의 모험가에게 잡혔을 때도 외설적인 몸뚱이 하나로 살아 돌아온 그녀다.

힘이 어느정도고 계급이 어떻든 여자를 좋아한다는 정보는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정보였다.

딸깍-

케이지가 열리며 까만색 뱀 하나가 기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눈이 파충류의 그것과 비슷하게 변하며 뱀의 시야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 꽃을 먹은 뱀 - D ]

▷ 이성을 유혹했을 경우 성공확률이 늘어납니다.

▷ 일정 이상의 호감도를 쌓은 뱀 한마리 조종할 수 있습니다.

▷ 조종하는 뱀과 감각을 공유합니다.

▷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스킬이 해제됩니다.

일반적인 독사의 독으로는 마나를 가진 인간을 확실하게 죽일 수 없다.

어금니에 약재를 투여하면 사용한 뱀도 며칠 후 죽게 되지만 성공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찌익-

"횻-!"

뱀 머리를 잡아 주사를 마친 그녀는 숙영지 근처로 뱀을 내던졌다.

인간의 지능을 가진 뱀은 상상 이상으로 까다롭다는걸 보여줄 시간이다.

최대한 숙영지에서 멀어진 그녀는 무성한 풀숲에 엎드려 스킬을 발동했다.

스르륵- 스르륵-

뱀을 조종하는 감각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흙과 풀을 배와 허벅지로 긁으며 지나가는 감각···이래서 일을 하기 싫은거다.

'···이것봐. 역시 눈치 못챈다니까.'

알면서도 이제야 안심이 된다.

지금부터 자려는지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아카데미 꼬맹이들이 보인다.

용모파기가 끝난 목표물 - 바스티 가의 도련님도 확실하게 보이고.

'돈도 많은 집안인데 관리 안하나? 엄청 못생겼네.'

누가봐도 기사학부 생도였다. 무슨 이유로 누구의 원한을 샀는지 모른다.

어쩌면 원한따위 없을지도 모르고?

감상은 그게 끝.

뱀의 시꺼먼 가죽을 어둠에 파묻으며 천천히 움직인다.

'어라···?'

뱀의 머리를 좌우로 움직여 백금의 모험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의자가 비어있지만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볼일을 보러 갔을수도 있고 저기있는 천막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력과 경험에서 오는 소름끼치는 감각.

'···아니 그럴리가.'

분명 여기서 자신의 신체가 있는곳 까지 거리는 눈으로 안보일만큼 멀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거라 머리로 되뇌며 스킬을 해제했다.

스킬을 해제하니 시선이 한순간에 바뀌고.

엎드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리니.

눈 앞에 남자 하나가 앉아 있다.

'여신이시여···.'

그녀는 평생 찾지 않았던 여신을 찾게 되었다.

칼도 안들어갈것 같은 근육···밤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검붉은 안광에 하마터면 바지에 지릴뻔했다.

절그럭-

"···!!"

한 손에 감겨있는 쇠사슬.

거기에는 익숙한 동업자들이 목에 사슬이 칭칭 감겨 혀를 내밀고 눈을 까뒤집고있다.

"자,잠시··!"

비어있는 손이 주먹의 형태를 만드는걸 보고 그녀는 반쯤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원래라면 당장 남자를 흥분시키는 말을 하며 다리를 벌려도 모자랄 판이지만.

그녀의 판단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저건 자신에게 흥미가 있는 눈이 아니었다.

그냥 물건을 보는 시선.

촤르르-

뱀처럼 기어오른 사슬이 그녀의 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뚜둑!

*****

시체를 한곳에 던져두고 숙영지에 돌아오니 대부분 준비가 끝났는지 초번을 담당할 인물이 하나씩 나와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초번인 리케와 눈과 손을 이용한 신호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굳이 할 필요가 없어서 더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두번째는 세리아.

말 상대가 없어서 그런지 입이 가려운듯 했다.

자다깬것 보다 대화상대가 없어 말을 못하는게 고통스러워 보인다.

마지막은 이제 정신을 좀 차린듯한 클로에였다.

모닥불에 장작을 쌓아올리던 그녀는 주위 눈치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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