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 - 대화는 입으로만 하는게 아니다.
교단의 사제들이 부상자가 생기기 전까지 휴식겸 대기를 하고 아카데미 생도들이 어수선하게 모여있는 숙영지.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까지 생도들이 기다릴 대기장소이기도 하다.
개개인의 수업을 진행 할 장소와 조금 멀더라도 내 눈과 에클레어의 시야에서 보이기도 하고.
생도들이 몸을 풀고 가볍게 움직일만한 넓은 장소가 저곳 외에는 마땅하게 없었다.
"힘 조절 잘해라. 신성력으로 못고칠 정도로 만들거나 진짜 죽기라도 하면 일난다."
"그럴 일은 없지만···조심하지."
절그럭-
묵직한 갑주를 움직이며 그녀는 나와 정 반대편으로 향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제일 먼저 한 일은 에클레어가 사용할 공간과 내가 교육을 하며 사용할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나무가 울창하게 솟아있는 숲의 중앙에 나는 자리를 잡았고 에클레어는 숙영지 바로 옆 트여있는 작은 평지를 택했다.
그녀와 달리 내 수업은 검법 그 자체 보다는 임기응변과 감각을 다듬는다는 전제를 두었기에 일어난 차이였다.
-
"이것들이··."
의욕이 전혀 없는 생도 몇명을 적당히 상대해주고 보냈다.
하기싫은 티를 팍팍 내는 녀석들을 상대하면 나도 재미가 없었다.
'진짜 왔네?'
서늘한 그늘에 앉아 다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리케의 말대로 클로에는 에클레어가 아닌 나에게 먼저 검을 들고 찾아왔다.
나무 사이로 푸른 눈과 잿빛 머리칼이 휘날리는걸 보고 나는 쭈그려 앉아있던 무릎과 허리를 쭉 피며 일어났다.
"···클로에 드리트나 생도."
"네,네!"
나와 클로에는 수업 중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거기에 대답을 하는것 이외에는 대화를 한적이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대련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름을 호명하니 그녀는 바짝 굳어 차렷! 자세를 하고있다.
"···오늘은 교관이 조금 수다스러울 예정이라. 무리해서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듣기만 해도 좋다. 하지만 귀는 제대로 열어두도록."
스릉-!
보급형 롱소드를 시원하게 뽑으니 클로에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았다.
-
드리트나 검법의 뿌리는 공격 보다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
에클레어의 등장 전까지 충직함을 내세우고 지킨다는 이미지를 고수했던 가문이기에 그럴 것이다.
벽을 완전히 넘은 에클레어 정도의 수준이라면 검법의 형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자신만의 검이 있으니 그런 특성이 쉽게 보이지 않겠지만.
클로에와 합을 나누면 정석적이고 단단한 드리트나 검법을 맛볼 수 있다.
티딕-!
발로 차서 날린 돌과 나무조각을 깔끔히 막아낸 클로에가 신중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불규칙한 폭으로 늘어서있는 숲의 장애물 때문인지 평소보다 찌르기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째앵! 캉-!
뻗어있는 나무 사이로 단단한 금속들이 부딪히며 불똥을 튀겼다.
나는 그대로 공격을 이어가지 않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
평소의 대련이라면 호흡도 참으면서 집중해야 겨우 막을 수 있는 속도로 내리꽂혀야 할 교관의 검이.
오늘은 속도에 한없이 여유를 주며 휘두르고 있으니 클로에도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다.
"생도는 '검으로 말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말을 끝맺는 동시에 롱소드를 번쩍 들어 그대로 내리찍었다.
쿠웅!! 하고 폭음에 비견 될 소리가 울리며 뿌연 흙먼지가 하늘로 비산한다.
"··크읍!!"
"매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상대와 이렇게 합을 주고받다 보면 무기를 타고 감정이 넘어 올 때가 있다."
공격을 받아낸 클로에의 무릎이 후들거리며 신발이 흙바닥을 파고들었다.
카가각ㅡ!!
"읏-!"
힘이 실린 날붙이에 짖눌린 그녀가 대답 대신 침음을 흘렸다.
"지금 내 검은 어떻지? 과할 정도로 큰 동작과 필요이상으로 실린 힘은 절박해 보이나? 아니면 내가 화가 난 것 같나?"
"후욱···!"
롱소드를 크게 밀어낸 클로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세를 다시 잡았다.
"아까 언급했던 '검으로 말한다' 라는 말은 무예에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다. 표정이 적은 용병이 꼭꼭 숨기고 있던 분노와 증오를 자신도 모르게 표현할지도 모르고···전하고 싶었지만 말로는 하지 못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지."
핑!
한발을 내딛는 순간 호흡을 정리한 클로에가 날카롭게 찔러온다.
목을 노리는 검을 피하고 그대로 떨어지는 검의 궤적에서 이탈하며 말을 이었다.
"이때까지 그런 경험이 없다해도 이상할게 없는 것이, 비단 이 사항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이때까지 대답은 없어도 내 말대로 귀는 열어뒀는지, 재능이라는 단어에 클로에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게 보인다.
'···확실히 승부욕은 있어.'
치지직-
클로에의 한발이 옆으로 벌어지며 흙바닥을 긁는다.
공격을 받아내느라 얼얼한 손을 쥐었다 피며 검을 바로잡는다.
침묵을 지키는 클로에를 향해 나는 검을 들이밀었다.
"무기를 드는 목표가 한가지 길로 좁고 명확하면 타인까지 볼 여유가 없기도 하지··· 그게 나쁜건 아니지만 오늘은 다른 것을 보아야 할 거다."
이왕 먼저 왔으니 알기 전까지 보내줄수도 없고.
*****
혹시나 누군가 알아볼까 에클레어는 수업 중에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검을 들었다.
생도 하나가 수업을 열외하면서 보급형 검이 남아 로만에게 빌린 석검은 그대로 허리에 걸려있었다.
'쉽지 않아··.'
시작하기 전에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대다수의 생도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죽을것 같아 그게 자신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거기에 문제를 지적하자니 보이는게 너무 많아 어디부터 알려줘야 할지 기준을 잡기가 어려웠다.
지나가듯 의견을 던지는게 아닌 남을 가르친다는 경험은 딱히 없는 에클레어에게 일일 교관이라는 직책은 생각보다 부담스럽고 무거웠다.
시간상 하나하나 다 고쳐줄 수는 없기에 에클레어는 생도들의 공격을 적당히 받아주며 무기가 향하는 경로를 미세하게 바꿔주는 것을 택했다.
이것만 해도 어딘가 개운해졌다는 표정으로 생도들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저벅- 저벅-
음식을 들고 천막에 찾아올때와 비견하면 사막처럼 건조하기 그지없는 발걸음.
한 손에 강철 봉을 들고 걸어오는 익숙한 여성을 보고 에클레어는 바닥에 꽂아둔 검을 뽑아들었다.
"검술학부의 리케입니다."
'···스카디는 어디 팔아먹은거지.'
덤덤한 인사와 함께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의 허리에 걸려있는 석검이었다.
고개를 들고 무표정하게 봉을 회전시키며 자세를 잡는 그녀를 보고 에클레어는 왼손에 잡은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로만의 존재유무에 따라 완전 다른 사람이 되는 그녀를 보고 에클레어는 투구 속에서 실소를 흘렸다.
백금의 연인이자 클로에의 친구···실력이 대단하든 초라하든 어떤 방향이라도 기대가 안된다면 거짓말이다.
"언제든 들어와도 좋다."
··
··
처음 스카디 후작가의 영애가 무기를 들고 왔을때 에클레어는 황실에서 몇번 만난적이 있는 에녹 스카디를 떠올렸다.
로만이 없을때 보이는 냉랭한 무표정과 분위기는 그 후작을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성기라 할 나이를 지나 기세는 갑작스레 올랐지만 벽은 넘지 못하고 있는 그 에녹 스카디와는 결이 다른 재능이 느껴진다.
찰칵-!
"훌륭하더군."
검집에 검을 넣는 순간 자연스럽게 입이 열렸다.
오늘 수업을 하며 처음으로 꺼내는 칭찬이자 진심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난 덕이죠."
차가운 분위기를 단번에 지우고 포근하게 웃은 그녀는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반으로 구부러진 무기를 들고 숙영지로 돌아갔다.
누군가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깃털 같은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에클레어는 생각했다.
'천재 중에서도 천재··.'
그것도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많은.
리케와 몇 분간 합을 나누면서 느낀 에클레어의 감상이었다.
처음에는 어째서 검이 아닌 봉을 들고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사용하는 숙련도를 보니 그 의문은 단숨에 사라졌다.
스카디 후작가에 전승되는 고명한 봉술이라도 있는 것인지 저 나이에 무기술이 일정 경지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저기에 마나의 총량과 경험이 더 쌓인다면 도대체 어떤 인물이 탄생할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밖에서는 날고긴다는 아카데미 생도들 중에서 현재까지 저 영애와 같은 선상에 둘 인물은 한명도 없었다.
'····!'
에클레어는 다음으로 오고있는 생도를 보고 숨을 멈췄다.
검을 잡고있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탁-! 탁-!
로만이 얼마나 굴린건지 다른 생도보다 꼴이 확연하게 안좋은 생도.
잿빛 머리칼은 완전히 산발이 되어 엉켜있고 옷과 얼굴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다.
하지만 그 사이 소기의 성과라도 있었는지 클로에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갑옷으로 가리고 있어도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는 클로에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동생을 정면으로 본게 얼마만인지.
하마터면 자신이 먼저 눈을 피할뻔 했다.
"클로에··드리트나 입니다··!"
기사학부 생도다운 훌륭한 절도를 보이며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클로에를 보며 에클레어는 검집에서 잠시 휴식시킨 검을 다시 뽑아들었다.
시잉-!
서슬퍼런 소리를 내며 날붙이가 햇빛을 반사했다.
"···당장에 와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