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 - 열외 하나. 사유는···
기숙사와 저택에 있는 푹신한 침대를 잊고 허리가 쑤시는 야외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 생도들은 쭉 나열된 나무상자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오늘에 한해서 평소처럼 풍족하고 자극적인 아카데미 식당의 음식은 없다.
야외 수업에 배정된 점심은 육포부터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 등의 숙영 느낌이 풀풀 풍기는 음식부터.
직접 만들어 먹을 자신이 있는 생도들을 위한 간단한 재료도 있었다.
사용인을 부리는 귀족자제들이 자신의 손으로 요리를 해본 경험이 있을리가 있나.
있어봐야 정말 극 소수에 불과하다.
결국 작위가 높고 명가라 불리는 가문의 자제가 많은 기사학부는 절대다수가 바로 먹을 수 있는 투박한 식량을 들고 투덜거리며 돌아갔다.
그나마 검술학부에서는 호기롭게 요리재료를 가지고 가는 인원들이 제법 존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리케의 파티였다.
'양을 일단 많이해서···교단의 사제들에게 먼저 돌리고 오빠한테도 자연스럽게··.'
로버트가 정신놓고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녔다면 그냥 대놓고 요리를 전했겠지만.
천막에 쥐죽은듯 뻗어있는 로버트의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전과 같이 행동하는게 옳다는 판단.
잡음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은 길이다.
몇몇생도가 아까 숲으로 들어가는걸 본 건지 시체마냥 조용해진 로버트를 보고 리케를 의아하게 보곤 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었다.
의아함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있는건 로버트 주위에 모여있는 여자들이었다.
자신들의 불쾌한 감정을 표정과 시선에 담아 숨기지않고 리케에게 쏟아낸다.
최근 얼굴에 철판 깔고 생도들 앞에서 들이밀기 시작하던 로버트에 의해 일면식도 없는 여생도 무리들이 저런 적대적인 눈길을 보이곤했다.
'나서서 부정한다고 듣지도 않을거고···건방지니 뭐니 말 꼬투리나 잡고 늘어지겠지.'
음욕을 숨기지 않는 남자들 그리고 어떻게든 말꼬리를 잡으려는 여자들과 대화하는것 자체가 무척 피곤한 일이다.
현재 그녀들이 원하는건 알고싶지 않은 로버트의 진심이 아니다.
로버트의 관심이 쏠린 자신을 물어뜯을 구실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만은 안봐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로버트와의 약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혼인을 기약하라니.
단기간에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힌 리케가 생각할 수 있는 죽음보다 절망적인 상황 중 최상위권에 위치한 일 중 하나였다.
분명 그러한데 신기하게도.
이 생각을 할 때마다 귀족이라는 껍질이 조금씩 벗겨지는 감각을 느끼고.
더불어 지금 자신이 쥐고있는 행복한 현실을 마주할 수 있기에.
상상을 해봐도 그려지지 않는 미래 따위에 기분이 곤두박질 치는 일은 없었다.
저런 솔직한 질투의 눈길은 남자들의 음습한 눈길에 비하면 이제 기분 나쁘다기 보다는 우스울 뿐.
-
외부와 신경을 완전히 차단한 리케는 머리에 쌓아둔 레시피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쌓아둔 야채가 숭덩숭덩 썰리며 빠른 속도로 쌓이기 시작했다.
"거기 첫번째 그릇에 있는 재료만 지금 넣어줘."
"아,네!"
아카데미 점심시간에 리케도 클로에를 자주 보게되면서 어투를 편하게 하기 시작했지만 클로에는 여전히 존대를 놓지않았다.
사실 그런 사소한건 어찌되든 좋았다.
지금은 클로에가 자신에게 욕을 하건 음담패설을 하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오빠는 당근은 푹 익히고 감자는 식감이 살아있는 살짝 단단한 상태를 좋아하니 여기서 조금만 끓여서··.'
지금은 숲에 하루 동안 있으며 끼니를 가볍게 해결했을 자신의 연인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재료들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풍족하게 먹일 것인지에 대해 리케는 집중력과 정신을 불태웠다.
*****
'····'
에클레어는 천막 밖으로 나와 웅성거리는 인원들 사이에 즐거운듯 미소를 지으며 요리를 돕고 있는 클로에를 보았다.
원만한 교우관계.
그 장면을 보기만해도 가슴속에 있는 돌덩이 하나가 사라지는 기분이라 신분을 숨기고 수업에 온 것을 벌써 만족해버렸다.
멍하니 있다보니 생도들의 시선이 과할 정도로 자신에게 몰리는것 같아 에클레어는 다시 천막으로 돌아왔다.
자리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모험가를 보니 그는 딱히 식사를 할 생각이 없는지 한쪽 다리를 떨며 콧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따로 식사는 하지 않는건가? 아무리 차이가 없다해도 약간은 먹는게 좋을거다."
"아~ 조금 기다려달라던데?"
기다려달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잠시 생각하고 있으니 천막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딘가 들떠있으면서도 기품을 잊지않는 걸음걸이.
스륵-
입구에 있는 천이 밀려올라간다.
그릇 두개를 평평한 나무판으로 받치고 천막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여성의 얼굴에는 십자 모양의 흉터가 존재했다.
클로에와 친우로 추정되면서도 뒤에서 능글거리게 웃는 모험가의···.
"실수로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요···오기 전에 사제님들도 챙겨드렸답니다."
아쉬운 말투와 목소리는 분명 정면으로 마주한 자신을 향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은 자신을 보고있지 않았다.
'이건 놀랍군···.'
뒤로 시선을 날리며 그녀가 보이는 표정은 찬란한 빛이 나는듯한 미소였다.
그건 단순히 얼굴에 있는 흉터조차 흠이 되지않는 아름다운 미모 때문이 아니다.
이 영애가 숨길 생각 없이 뿜어내는 아우라와 감정은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적나라 했다.
단 몇시간 본게 전부였지만 분명 방금까지 감상은 저리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여성이라 생각되지 않았었다.
입에 담기도 머뭇거려지는 그 감정이 도대체 뭐라고 저리 사람이 변하는지 자신은 모를 일이다.
"오우- 안그래도 배고팠는데!"
뒤에서 녹은듯이 의자에 붙어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이 그릇이 평소처럼 간을 조금 진하게 해놓은거고 ㅡ "
"음음-"
옆에 투명인간이 되어 서있는 자신의 눈에는 두 사람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앞에서는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둘은 참 신기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설명을 듣는 로만의 얼굴은 평소처럼 예측할 수 없고 능글맞거나 가벼워보이는 웃음이 아닌 투명하게 감정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피해줘야겠지.'
저런 감정은 자신과는 연이 없는 주제이기에 흥미를 돌리는 것도 빨랐다.
보고 있자니 피부가 근질근질하여 앉아서 눈을 돌리고 귀를 닫고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이야기가 끝났는지 돌아온 그가 자신의 앞에 그릇을 놓았다.
아카데미에서 준비한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만든 토마토스튜였다.
고기는 없어도 항시 몸을 따뜻하게 하는게 중요한 숙영에 좋은 선택지.
점심이라 해봐야 그리 길지않은 시간이었는데 어찌 했는지 푹 끓여만든 티가 난다.
"클로에도 열심히 도왔다더라."
"····."
클로에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지 않았어도.
동생의 정성과 시간이 들어간 요리는 먹어본 적도 없고 자신에게 먹을 기회가 있을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에클레어는 갑주를 해제하고 펑퍼짐한 로브의 소매를 걷어올려 수저를 들었다.
후룩-
살짝 심심하면서도 혀 끝을 감도는 채소의 단맛이 수저를 다시 들게한다.
"분에 넘치는 미식이야···."
*****
"점심시간은 이제 끝이다. 집합해라!"
생도들을 집합 시키자 로버트와 매번 붙어있는 여생도 하나가 손을 들었다.
나는 턱짓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말해라."
"···기사학부 로버트 볼트 생도는 몸상태가 좋지않아 수업에 참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천막을 슬쩍 보니 내가 돌아왔을때와 같은 자세로 엎어져있다.
아직 죽은건 아닌지 호흡에 따라 어깨와 등이 올라갔다 내려오는게 보인다.
바로 옆에는 이것저것 음식이 쌓여있는데 여자들이 가지고 온 점심도 거른듯 했다.
"사제님들에게는 말했나?"
"예···."
역시 마음의 상처는 힐이 안되나?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생도들이 모여있는 중심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 저녁까지는 평소의 실전 수업과 같이 대련을 병행 할거다. 지형은 근처에 있는 숲을 이용할거고."
눈을 빛내며 기대하는 인원은 소수.
그럴줄 알았다며 수긍하는 인원이 절반 정도.
나머지는 이미 표정으로 질색하고 있다.
"검술학부는 본 교관이 그대로 진행 할 예정이지만 기사학부는 여기 계시는 기사님에게 배움을 청한다는 선택지가 있다. 검술학부의 생도들도 원한다면 신청해도 좋다."
"이 기사님이 미처 공개하지 못하는 실력과 명성은 내가 보증하마."
생도들의 눈동자가 우르르- 굴러 갑주를 입고있는 인물에게 향했다.
붉게 뿜어져 나오는 안광에 깜짝놀라 눈을 돌리는 생도들도 있었다.
"기사의 검은 본디 기사에게 배우는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격식없는 모험가를 상대 해보며 임기응변을 기른다 생각하면 교관을 선택하는게 옳을지도 모르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실전 수업에 눈을 빛내던 생도들은 모두 신중히 고민하는 얼굴이다.
확실히 이런 중요한 일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쨍- 하게 떠있는 해를 보았다.
마치 오늘은 밤이 찾아올것 같지 않은 힘찬 빛.
-으음···.
아직도 침음을 흘리며 학구열을 불태우는 생도들을 보니 굳이 한쪽을 고르게 할 필요가 있나 싶어졌다.
교육자로서 가져야 할 생각이 너무 가볍고 짧았나?
"아니,아니지···지금부터 저녁시간이라 하면 평소 수업보다 훨씬 긴 시간이 되겠지? 그냥 둘 다 한번씩 하는걸로 한다."
-오오ㅡ!!
-아···.
내 말에 누군가는 슬프게 탄식 하고 누군가는 좋은 답이라는듯 탄성을 뱉었다.
에클레어를 모른다 해도 강자한테 죽을 걱정없이 한수 배울 수 있다는건 천운이나 다름 없는데 배부른 녀석들···.
이런 기회를 누워서 놓치는 로버트만 배가 아플 일이다.
'괜찮네.'
다시 봐도 나 같은 돌머리가 즉흥적으로 낸 답치고는 꽤 좋은 방안이었다.
이거라면 리케가 클로에를 꼬드길 필요없이 당연하게 에클레어를 만나게 되며.
리케도 미래에 에녹 스카디를 상대할만한 연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