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 - 은색 고구마
"아으- 턱 빠질뻔 했네."
하품을 조금 더 길게 했으면 턱도 빠지고 입까지 찢어질뻔 했다.
잠도 충분히 잤고 애초에 며칠은 안자도 전혀 문제가 없는 몸인데 뭔가 먹고나면 금세 식곤증이 몰려온다.
눈을 찌르는 오후의 햇볕을 맞으며 탁 트인 나무 사이를 지나갔다.
'일단 저기만 한번 더 돌아보고··.'
지금 나는 야외 수업을 실시하는 날보다 하루 일찍 나와 아카데미 생도들이 숙영을 진행 할 장소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내일 아침이 되면 기사학부와 검술학부 생도들이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도보로 이곳에 도착하는 예정이라.
그때까지 여기서 숙직을 하며 주위에 문제가 될만한 요소가 없는지 재차 확인 해야한다.
도란은 내가 갈 필요없이 아카데미 직원들을 대신 파견해주겠다 했지만 사람이 많아도 쓸만한 인간이 없으면 결과물은 없고 정신만 사나울 뿐이다.
단 하루지만.
이름 있는 귀족가의 자제들이 사방이 트인 곳에 모이는 순간이다.
그야말로 최적의 치고빠지기 타이밍.
아카데미에서 일부러 외부 수업을 한다고 소문을 냈으니 당연하게 경비에 신경을 쓸거라 생각할 것이고.
지금 의뢰를 받거나 암살을 준비하는 놈이 있다면 일을 터트리고 도망갈 자신은 있다는 뜻이다.
그정도라면 아카데미 교직원들을 파견해도 감지할 수 없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리케가 지낼 곳인데 면식도 신용도 없는 아카데미 직원만 믿고 집에 누워있을 수는 없지.
'아주 캠핑장을 만들어놨네··· 실제로 이런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하지만.'
일단 위치와 지형은 더할나위없이 완벽했다.
아카데미에서 인위적으로 손을 본건지 숲의 중앙은 평평하고 넓은 공터가 되어버렸고 시계도 탁 트여있어 인원을 통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보인다.
한쪽에는 장작부터 침낭 그리고 수업을 위한 교보재들이 잔뜩 쌓여있다.
'이렇게 다 준비해버리면 그냥 나들이 아닌가?'
간단한 요리재료와 식기까지 아카데미에서 모두 준비해주니 이게 수업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것들만 봐도 이번 수업에 대해 아카데미의 걱정이 얼마나 과한지 여실히 느껴진다.
도란을 포함한 교직원 일동은 그저 이 수업이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것 보다 아무 문제없이 무사히 돌아오는걸 최우선으로 바라고 있다.
학장의 팔이 날아가는 사건 이후로 뻗지 못한 첫걸음만 제대로 밟으면 뒤따라 오는건 발자국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아마 이 수업이 무사히 끝나기만 하면 대외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건 학장인 도란.
지금같은 상황에 과감하게 움직인만큼 작은 숨구멍 정도는 트이겠지.
-
산책하듯 주위를 걷고있으니 나무 뒤에서 한명이 걸어나온다.
아티펙트를 한번 써보라고 빌려준지 한참 지난것 같은데 뭘 했는지 이제야 돌아왔다.
"물건은 어때?"
에클레어는 여기까지 오면서도 혹시 알아 볼 사람이 있을까 얼굴과 몸을 완전히 가리고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제야 주위에 누구도 없다는걸 확신하고 후드를 벗어 얼굴을 노출시켰다.
"···도대체 그대는 이런 물건을 어디서 구한거지? 황실에서도 이런건 본적도 없고 들은적도 없다."
[ 하겐의 갑주 컬렉션 No.03 ]
▷내장 된 갑주를 착용합니다.
▷마나를 사용하여 수리할 수 있습니다.
-나의 아픈 손가락이여··! 마무리가 아쉬운 작품이라 더 애정이 간다.
내가 빌려준 브로치를 만지작 거리며 그녀는 순수하게 놀라고 있다.
한번 써보더니 경도를 떠나 편의성에서 진심어린 감탄을 했는지 장난감을 받은 어린이 같은 눈을 하고있었다.
처음에는 저걸 클로에에게 줘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그게 사건 자체는 잘 풀릴 확률은 높아도···조바심에 뜬금없는 행동을 하면 뒤가 곤란했다.
애초에 이번 한번으로 끝을 볼 생각은 아니었다.
"안불편하냐? 나는 갑갑해서 못쓰겠던데."
"이 정도면 장인의 손길을 거친 맞춤제작이라 해도 될 만큼 쾌적하다만···마나를 사용하면 갑주의 체형과 외견을 어느정도 바꿀 수 있으니 여성이라 생각될 일도 없겠어···엄청난 물건이군."
···수리만 되는게 아니라 그런 능력이 있다고?
전혀 몰랐던 신기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갑주를 다시 쓸 생각이 없다.
리케도 저건 어지간히 불편한지 한번 써보고는 바로 포기했으니.
"목소리는?"
내 말에 에클레어가 포켓에서 엄지손톱만한 종이를 꺼내보였다.
마도구 제작에 힘쓰는 모 마법사 집단이 독점 판매하는 물건으로.
투구나 얼굴을 가리는 로브 혹은 모자에 붙이면 목소리를 바꿔준다.
하지만 누가봐도 변조했다는게 티가 나는 목소리로 변하게 된다.
획기적인 물건이라도 변조한 티가 안나면 제국에서 판매를 허용해주지 않겠다고 했다나.
"좋아. 갑주는 가지고 있다 끝나면 돌려주고. 수업은 내일 아침부터 시작이니 그때 다시 와."
"···내가 도울건 없나?"
"딱히? 오늘 갑자기 없으면 동생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곧 저녁시간인데."
"업무로 하루이틀 나가있는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생각할거다."
에클레어는 뭔가 돕지않고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잡일거리를 찾아다녔다.
"동생한테 나가서 수업한다고 듣기는 했지?"
"음··아무래도 밖에서 하루를 지내는 사항이니 듣기는 했지."
안봐도 그림이다.
제대로 격려도 안해주고 또 그냥 알겠다고 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있으니 에클레어가 나를 노려봤다.
"···지금 아주 실례되는 눈빛을 하고있군."
"내가?"
입을 넙치처럼 누르며 모른척으로 일관하니 에클레어는 한숨을 쉬며 눈에 힘을 풀었다.
"됐다···여기 아카데미 보급용 검은 없나? 내 무기를 쓰면 클로에가 알아볼것 같은데."
'알고있으면 본인이 들고왔어야지···.'
동생일이라 긴장한 것인지.
사석에서 볼수록 허점투성이인 그녀를 보며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뱉지않기 위해 애썼다.
"기다려봐."
나는 미리 올려둔 천막 안에 들어가 인벤토리에서 검 한자루를 꺼냈다.
천막에서 나오며 에클레어에게 검을 통으로 던졌다.
"부러질 걱정은 하지말고 막 써."
[ 바위 숨결 ]
▷무딘 날을 재생할 수 있습니다.
-바실리스크의 눈은 훌륭한 재료다.
탁-!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는 검 손잡이를 낚아챈 에클레어가 석검을 이리저리 확인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석검의 날을 손가락으로 한번 훑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금속이 아닌 석검이라···거듭 말하지만 신기한 물건을 참 많이 가지고 있군."
"모험가들은 다 그래."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하고 물은건 아니다. 고맙군. 조심히 사용하지."
휙-! 휙-!
공중에 몇번 검을 휘둘러보더니 자로 잰듯한 자세로 허리춤에 바위숨결을 끼워넣는다.
··
··
에클레어의 감각에도 걸리는게 없고 로메리우스의 물약으로 보다 예민해진 내 감각에도 특별히 걸리는건 없다.
있어봐야 산짐승이나 소동물.
혹은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미물이나 다름없는 몬스터들이었다.
나와 에클레어가 여기서 가끔 마나만 흘려도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숙영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 준비해줬으면 내가 말안해도 뭘 해야할지는 알지?"
내 말에 나무밑둥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에클레어의 몸이 살짝 떨렸다.
"알고있다···!"
전혀 모르는것 같은데?
하지만 이 이상은 내가 개입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기회는 몇번 있을거다."
에클레어가 클로에에게 큰 걸음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주위만 서성이는 근본적인 이유.
그녀는 자신에게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어린 클로에와 현재 성인이 된 클로에가 다르다는걸 제대로 인지를 못하고 있다.
어린시절의 충격이 에클레어에겐 한평생을 갈 정도로 큰 것이다.
저런식으로 트라우마나 과거에 얽혀서 사는것도 지독한 정신병이라 할만하다.
이건 타인이 말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
본인의 눈과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판단하여 벽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
지금 에클레어의 금이 간 정신은 거기서 멈추는게 아니라 합병증처럼 여러가지를 물들이고 있다.
에클레어는 클로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예상도 못하고 짐작조차 하지못한다.
클로에는 마음이 천사같은 아이라고 세상 누구보다 확고하게 믿으면서.
자신을 부정해도 그건 당연한거라 시작도 하기 전에 혼자 납득하고 있으니···농담이 아니라 저 정수리에 꿀밤이라도 한번 먹이고 싶다.
'이야기가 한번만 풀리면 시원하게 뚫릴것 같은데.'
아직은 보기만해도 목이 턱턱 막히는게 도대체 이걸 누가 설정했는지 기가 찰 노릇이지만.
자기혼자 세상 심각한 에클레어의 얼굴을 보고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하긴···이래야 그 아카라이트고 이래야 그 드리트나지.'
게임에서도 호불호가 유난히 많이 갈렸던 자매지만 나는 그 시절 이런 막막한 감정선을 좋아했다.
현실로 마주하니 내 생각보다 더 아찔했지만···.
그럼에도 게임과는 달리 탄산 가득한 사이다가 올거라 믿는다.
이건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에클레어라 하는 은색 고구마를 불러서 이번 의뢰를 강행할 수 있는건 완벽하게는 아니라도 클로에의 마음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리케가 돕겠다며 벌써 은근하게 떠보기도 했고.
지금부터 클로에의 속마음을 드러내게 하는건 이 답답한 여자의 몫이다.
··
에클레어는 가만있다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그대는 모험가 아닌가?"
"당연히 모험가지? 내일은 아카데미 교관이지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다. 나를 도와주는건 고맙지만···의뢰비는 어떤식으로 지불하면 되는거지?"
"의뢰비? 아 맞아 받아야지."
그저 빚이라는 명목으로 달아두고 필요할때 쓰려했는데.
이럴때만 눈치가 좋아서는···.
지금처럼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나도 제대로 말해두는게 좋다.
"황실에서 제공하는 금액이 기준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좀 곤란하다만···."
"돈은 지금 필요없는데? 황실에서 저번에 너무 많이줘서 곤란할 정도거든."
나는 손가락으로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에클레어의 눈 앞에 보였다.
"돈이 아니면 무엇으로 지불해야하지··?"
그녀는 돈이 필요없다는 내 말에 오히려 더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머리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리케를 떠올리며 에클레어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게 상응하는 조건일지 모르지만···딱 한번 ㅡ"
··
··
에클레어는 내 제안을 듣고 무척이나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하나의 보험인가···내용은 이해했다. 그 대상은 연인인가?"
"맞아. 제국민이고 신분도 확실하지. 현상수배범이나 범죄를 저질러 쫓기고 있는 신세도 아니니 안심하고."
에클레어는 망설이다 손에 잡히는 브로치를 보고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지금 언급한 문제와 그에 준하는 일이 없다는 가정 하에 받아들이지."
"에클레어라는 이름과 명성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부탁할테니 걱정마."
애초에 그녀를 사용할 기회가 없다면 그게 그냥 베스트다.
"헌데 누구인지는 알려줘야 하는거 아닌가? 그대의 연인이라 해도 짐작가는 인물이 없다만."
에클레어에게 리케를 보여주며 연인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직 여러가지 사정으로 공표를 망설이는 리케와 같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해본 결과 그 에클레어라면 말해도 괜찮지 않냐고 판단했다.
확실히 어디가서 떠들고 다닐 성격은 절대 아니니.
나도 큰 문제는 없다 생각했고 애초에 누구인지는 알아야 일이 터져도 지킬것 아닌가.
"···보면 알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