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50화 (50/250)

Chapter 50 - 전생의 잔재

리케는 매번 그러하듯 아카데미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끼익-

"오빠~ 혼자 뭐하고 있어?"

심각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그가 보인다.

저런 표정은 처음이라 혹시 무슨일이 생긴건 아닌지 리케도 덩달아 긴장했다.

"리케··미안··."

"응? 갑자기 왜그래···?"

갑작스러운 그의 절절한 사과에 리케의 눈에서 안광이 번쩍이며 사고가 미친듯이 회전했다.

로만이 자신에게 사과를 할 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예상조차 불가능했다.

그의 사과가 농담이 아니라는걸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기에 리케는 긴장감에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사실은···"

굳어버린 표정을 지우지 못한 연인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

..

오빠는 내가 귀엽다고 말하면 질색을 한다.

남자에게 귀엽다는 말은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라나?

하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느끼고 있기에 오빠를 놀리는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 무의식적으로 입밖으로 내는 것이다.

나와 비교하면 신장도 월등히 크고 몸도 단단하고 제국에서 무력으로는 말 그대로 주머니를 뚫고나온 송곳이자 하늘에 서있는 강자이지만.

그냥 내 눈에는.

"오빠 귀여워~!!"

쪽!쪽!쪽!

볼에 가벼운 애정표현을 반복하다 젖가슴에 연인의 얼굴을 품었다.

그의 숨이 살결을 간지럽힌다.

오빠는 허탈하게 웃으며 내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집에 돌아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뒷정리가 필요없는 욕실에 오빠를 끌고가 격렬한 정사를 끝내고 살결을 딱 붙여 침실에 누워있었다.

"하아- 진짜 심각한 일인줄 알았잖아··아직도 심장이 아파··."

"···난 충분히 심각하고 진지했는데?"

타인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고나니 상대가 여성이라 자신에게 먼저 말해야 했다는게 생각났다니.

마치 현실을 모르는 여자들이 모여 망상으로 써내린 이야기 같지않나.

여느 투박한 제국의 남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밀한 감정선.

로맨스 소설에 빠져있는 귀족 영애들이 듣는다면 질투심에 이로 손수건을 잘근잘근 찢어버릴 것이다.

모든것이 압도적인 우위에 선점해있으면서.

내 기분을 먼저 신경써주는 그의 모습이 참을 수 없는 욕구로 다가왔다.

더 신기한건 돕겠다고 나선 행위가 여자를 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빠는 진지하게 그 사연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근데 에클레어 드리트나라면 클로에의 언니잖아···?'

클로에는 몰라도 에클레어를 모르는 제국민은 없을것이다.

최근 클로에를 아카데미에서 자주 보게 되었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에클레어를 가까이에서 본적은 없지만 자매가 모두 수려하다고 소문이 나있는데 오빠는 그녀를 무인으로 인정하는 호감 이상의 감정은 없어보였다.

클로에와 닮았다면 보통 미모가 아닐것 같은데.

'성격이나 행동이 오빠 취향이 아닌가? 아니면···.'

··

··

나에게 오빠를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없나?

그럴리가.

솔직한 말로 평생 독점하고 싶지.

나의 감정은 누구보다 무겁고 진심이며 세간에 떠도는 극적인 사랑이야기에 비견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기에 내 미천한 욕망보다 중요한 것이 오빠가 바라는 이상이다.

오히려 나 때문에 하고 싶었던 일을 참으면서 지낸다면···그건 내가 못참는다.

-

상처투성이 소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짠내나는 바닷물을 타고 넘어온 유리병에 들어있는 편지만큼 갑작스러웠고.

순풍을 타고 소리없이 다가온 돛단배와 같았다.

비가 세상을 흘려보낼듯 쏟아지던 날.

처음 오빠와 몸을 섞고 사이가 껑충 뛰어 발전하던 날 나는 분명 오빠에게 다른 여자를 허락했다.

그건 단지 순종적인 모습을 하여 환심을 얻기위한 빈말이 절대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의 연인이 원하는 사항은 그리 지탄받을 일도 아니고 백금이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일부다처제가 하고싶다!!! 라고 말하며 욕망을 표출하고 다니는건 확실히 독특한 경우이지만.

제국에서 일부다처제는 일정이상 권위와 능력을 가진 남자들에게 흔하고 당연시된다.

자신이 브라이트도 아니고 스카디라는 혐오스러운 명찰을 달고 귀족의 삶을 계속 살았다면 어떤 귀족의 몇번째 여자가 될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건 자신의 능력에 걸려있는 것이다.

'유년기를 너무 험하게 보내서 그런가···?'

자신의 연인은 가끔보면 사상이나 가치관이 세상과 아예 맞물리지 않을 때가 있다.

"진짜 그런 분위기라서 얼마나 놀랐는데! 오빠가 나보다 먼저 누구 임신이라도 시킨건가 생각했어···."

"살정제를 아침마다 영양제처럼 먹고있는데 그럴리가."

오빠도 내 반응에 안심이 된 건지 농담을 듣고 시원하게 웃었다.

"···오빠."

"응?"

나는 오빠의 뜻을 거스를 생각이 없고 오빠는 내게 부담을 주는 선택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혹시나 들러붙는 여자가 생겼는데 마음에 들면 나한테 먼저 보여줘."

제국이든 연방국이든 혼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사전적 의미는 하나.

하지만 직위와 위치에 따라 혼인이 가지는 속내는 각각 다르다.

귀족들의 대부분이 생판 남이었던 가문과 연결고리이자 소통의 창구를 만드는 목적을 두고 혼인을 한다면.

농민들의 혼사는 자식을 일단 많이 낳아 노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경우가 당연한 것이기에.

악의가 선의를 물들이며 범람하는 지금 시대상에 '사랑' 하나만으로 맺어진다는건 축복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큼 쉬운일이 아니기에.

자신의 연인과 혼인을 목적으로 끼어들고 엮이려는 자는 진정 사랑이라는 감정 단 하나만 있어야 한다.

연인을 위해 목숨조차 기꺼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진하고 깊은 사랑이 아니면 안된다.

그걸 확인하고 판별하는게 '첫번째'인 내 역할.

'체력도 좋고 몸도 튼튼하면 좋겠는데···.

마나가 늘어나고 신체능력이 향상되면서 연인의 욕정을 더 받아내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멀었다.

자신의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성욕을 끝까지 해소하지 않고 조절하는 것도 당연히 알고있다.

마나가 없는 일반인이면 하루만에 복상사라는 사건이 터질것이다.

나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오빠의 눈을 보고 말했다.

"꼭이야! 애매하다 싶으면 그냥 나한테 데려와. 알았지?"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문신처럼 새겨진 전생의 가치관과 상식이라는 덩어리는 녹아내리는데 한평생이 걸리고도 아직 잔재가 남아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간 시간이 얼마나 긴데 아직도 전생의 기억들이 불시에 달려와 백태클을 걸때가 있다.

허락을 받았으니 마음놓고 옛날부터 꿈꿔왔던 일부다처 판타지를 노리고 움직이면 될텐데.

리케에 대한 애정과 마음이 산불처럼 겉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진정 사랑하는 한 여자를 두고 그것도 참 못할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여자라···.'

그때 리케가 여자를 자신에게 데려오라는 의미도 당연히 알고있다.

나를 좋아 할 여자? 누가 있을까?

'···지금은 여자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것도 일단 엮이는 여자가 생기고 나서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 할 일이다.

-끼이이!!!

휙! 휙!

내 목을 노리는 시퍼런 손톱을 뒤로 피하며 자세를 잡았다.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 얼음 송곳이 만들어지며 날아온다.

[ 첫번째 형(形) - 나찰(羅刹) ]

스릉-!

날아오는 송곳을 깔끔하게 가르며 날붙이가 물처럼 흐른다.

-끄르륵··! 끅···.

반투명한 일반 벤시와 달리 선명한 형체를 갖추고 있는 벤시가 나찰의 칼침 한번에 컨셉을 잊고 곡소리를 뱉었다.

이제는 숙련도가 오르면서 한두번 휘둘렀다고 나찰이 해제되지 않는다.

벤시의 입이 찢어지며 팽창한다.

-키야아아악!!!

쿠구궁!!

파사삭-

먼지쌓인 묘비를 가루로 만들며 날아오는 벤시의 절규를 옆으로 폴짝 뛰어 피한다.

쾅-!

지면에 신발 밑창이 닿는 동시에 발을 강하게 구르며 몸을 화살처럼 쏴 검을 다시 박아넣는다.

-꺽···!

장기도 없고 피가 흐르지 않는 부정한 몬스터는 상성만 맞으면 어디를 때려도 급소가 된다.

이런 힘이 없으면 얼마전의 나처럼 개고생을 해야하지만.

푸스스-

벤시는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하얀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흐음."

샤아아ㅡ

검으로 흘러 들어오는 양이 제법 되지만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

역시 지금 내게 중요한건 여자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러면 너무 오래걸리는데. 골치 아프네-"

나는 해도 들어오지 않는 야산에 버려진 묘지를 빠져나가며 한탄했다.

리케가 아카데미에 가있는 시간에 이런 식으로 혼자 나와 두번째 형상을 열기위해 게이트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

어정쩡한 히든 피스 보다 제대로 된 하나의 스킬을 극의까지 올리는게 우선 사항이기에.

허나 안타깝고 잔혹한 현실.

옛날로 돌아가도 언데드 네임드가 나오는 장소까지 싹 다 기록 할 정도는 안되는게 내 기억력이다.

과거에 기록했던 노트에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고 내 얄궂은 기억만을 더듬으며 제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허탕을 치고도 내가 잘못온건지 네임드가 그냥 사라진건지 등장도 안한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몇몇 몬스터를 제외하고는 입학식 전 쏟아진 유성우와 완전히 관계있다 보기 힘들고··.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는 문제다.

'이제 돌아가서 수업 구상도 좀 해야겠는데.'

쉴틈은 없다.

지금부터는 모험가의 머리는 접어두고 아카데미 교관의 업무를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야외에서 하루 숙영.

리케는 그립기도 해서 오히려 기대가 된다며 좋아했지만 생도들 중 숙영을 반기는 이는 거의 없었다.

'···처음 들었을때 표정이 예술이었지.'

대놓고 하기 싫다는 얼굴이 절반 이상이었지만, 리케를 제외하고도 기대감을 품는 인원이 존재하기는 했다.

아카데미의 지원으로 필요한 물품은 전부 준비가 되어있을 예정이니, 숙영이라 하기엔 호화롭겠지만 애초에 경험이 없으면 이게 편한건지 불편한건지 구분도 안될 것이다.

'이제 그 답답이한테 휴일 잡으라 해야겠네.'

나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허점 투성이 계획을 다시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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