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47화 (47/250)

Chapter 47 - 뒷골목 회담 -1-

"드문 일이네요~ 매번 쉬라고 해도 절대 쉬지않던 분이."

제출받은 서류를 휙휙 넘기고 있는 에클레어에게 그녀는 재밋다는듯 말했다.

"음···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군."

"후후- 서얼마~ 남자가 생겼다거나?"

"쌓인 휴일을 사용해야 할 뿐이다. 업무 외 사담을 하러 왔다면 더는 답하지 않겠다."

에클레어가 붉은 눈을 빛내며 노려보자 그녀는 도리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재미없네요. 기껏 제가 바쁜 시간 쪼개서 들린건데."

"바쁘면 시간을 쪼개지 말고 일을 해라."

"···싫거든요! 재미없는 사람은 두고 다른 곳에 놀러가야지~"

에클레어는 그녀가 소란스럽게 나가는걸 확인하고 서류와 펜을 잠시 멈췄다.

막연하게 쉬면 조금 머리가 가벼워질것 같아 잡은 휴일이다.

따로 약속을 잡은 것도 없고 쉬면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검이나 휘두르고 서재에서 책이나 읽을까.

-

말을 하지 않았으니 클로에는 내가 쉬는지 모른다.

아침식사를 하고 클로에가 저택에서 나가는걸 보고 서재로 들어왔다.

내가 먼저 나가지 않으니 의문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그러려니 하겠지.

"····"

언젠가 여유가 생길때 보려고 서재에 꽂아두었던 책들 중 하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샤락- 샤락-

"···미치겠군."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바로 전에 읽었던 페이지가 금방 흐릿해진다.

이때까지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검을 휘둘러도 이렇게 집중이 안되는 상태로는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집중이 필요없는···산책이라면.'

아무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걷는다는 행위를 언제 해봤는지 모르겠다.

에클레어는 정말 오랜만에 사복을 입고 저택을 나섰다.

-

수도의 거리에는 행복해 보이는 가족도 있고 복잡한 사연을 간직한듯한 행인도 있다.

장사를 하면서 손님을 보고 억지로 웃어 보이는 주인도 있으며 당장에 죽을것 같은 사람도 있다.

···그 사이를 지나는 나는 어떤 얼굴인지 모른다.

또각-

걷고.

또각-

계속 걷는다.

막상 나오니 갈만한 장소가 없다.

어제 들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정말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생각없이 발만 움직이다 보니 외곽에 위치한 골목까지 와버렸다.

그늘 밑에 잠시 멈춰 저택으로 다시 돌아갈지 고민을 하기 시작할 때였다.

'저 남자···?'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같은 기운에 이름난 기사들 중에서도 보기 힘든 완성된 육체.

황실의 일로 몇번이고 마주한 백금의 모험가였다.

백금인데 이리 마주하기 쉬운 인물은 저 남자 뿐일 것이다.

"음?"

분명히 자신을 의식했음에도 회피하며 발을 빼려는 태도가 보인다.

저 행위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어쩌면 클로에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에클레어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못보고 지나간 것도 아니고···업무가 아니라해도 인사하나 없다니 너무 인색한거 아닌가?"

그의 걸음이 멈추더니 시선이 돌아 이곳으로 향했다.

호의적이지도 않고 적대적이지도 않은 미지근한 시선이었다.

"···또 무슨 의뢰를 들고온건 아니지?"

"아쉽지만 오늘은 비번이다."

"아 그러셔. 그 귀한 날에 왜 여기있는데?"

"···."

말문이 막혔다.

에클레어는 지나가던 로만을 잡은걸 금세 후회했다.

최근에 답답한 마음이 커지면서 생각보다 행동을 먼저하게 될 때가 많았다.

'성급했나.'

에클레어는 업무 외에 로만을 만나는건 이번이 처음이다.

매번 그렇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남자.

업무로 만나도 예상이 안되는데 사석에서는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자신이 최연소로 5기사가 되고 만찬회가 열렸을 당시 황실의 인물과 고위귀족 몇몇을 통해 들었다.

제국의 홍복은 마치 운명의 천칭과 같지 않느냐고.

언제나 자신의 반대편에는 최연소로 백금의 모험가가 된 저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혼자만 가지고 있을 동질감.

혹시 비슷한 고민을 품고 공감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말못할 비밀스러운 업무라도 하는건가? 그럼 고생하고!"

예상 외로 혼자 대화를 마무리하고 벗어나려는 그의 앞을 에클레어가 검집으로 가로막았다.

"그래 맞다. 업무···잠시 업무에 어울려다오···."

*****

업무는 무슨.

그녀의 성향을 알기에 알면서도 한번 속아준다.

골목에 나무 상자를 두개 놓고 우리는 마주앉았다.

그림자 진 공간에서도 그녀의 붉은 눈은 선명하게 보인다.

"정작 어울리라 하고 입을 그리 닫고 있으면 나보고 어쩌라고?"

내 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침묵을 지키던 에클레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기사님? 나도 내 나름 할 일이 있다는 것만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

이리 말해도 에클레어 같은 성격을 싫어하는건 아니다.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이 한가지 길을 파낼 수 있는건 무인에게는 이상적인 인간형 중 하나이니.

하지만 동생이나 부모님 같은 예측이 불가능한 인간관계에 엮이기 시작하면 그녀는 갈피를 아예 잡지 못하게 된다.

이미 여기서 에클레어를 마주하고 대화를 시작한 순간부터 드리트나 자매 이야기의 전개는 예측이 불가능해졌지만.

결국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고민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뜬금없는 질문을 해도 되겠나?"

"듣고 판단할테니 말해봐."

서늘한 벽에 등을 붙이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기사이기에 모험가를 자세히는 모르지만 '백금'이라는 것이 단순히 재능만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건 알고있다."

"···?"

기사인 그녀가 알아주는게 고마우면서도 확실히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귀를 열어두고 뒷말을 기다렸다.

"만인이 동경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고난 하나 없다는건 말이 되지 않겠지. 그게 모험가든 기사든 다른 직업이든···."

"그렇지."

그녀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 입을 우물거리며 본론을 꺼내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드리트나라 하면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니 귀를 기울여줄 의향은 있다.

나는 품에 손을 넣어 인벤토리를 연결해 스크롤을 꺼냈다.

"정 말하기 힘든 사항이면 누설 금지 계약이라도 해주고. 기억 소거는 힘들지만."

에클레어는 내가 기사에게 주먹을 날렸을때 보다 놀란 눈을 하더니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황실에서 신용이라 하면 나보다는 그대가 있을 것이다. 계약을 했다고 생각만 해다오."

"···그래? 대화가 누설되는 일은 없을거다. 뭐 믿는건 자유지만."

미미하게 웃으며 팔짱을 푼 그녀는 앞머리를 시원하게 넘겼다.

"하아···조금 한계일지도 모르겠어···오늘은 정말 어찌돼도 좋을것 같은 날이군."

"···"

"그럼 백금의 모험가인 로만을 믿고 제일 궁금한걸 물어보겠다···이 대화가 밖으로 나간다면 진지하게 애검을 들고 그대를 찾아갈것 같다만."

"믿는다면서 협박은···그래도 무조건 대답을 기대하지는 말고."

에클레어는 마음을 먹었음에도 입을 여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다.

아주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녀가 드디어 화두를 던진다.

"···클로에는 잘 하고 있나?"

고심끝에 먼저 나온건 그녀의 속에 있는 고민이 아니라 동생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내가 피식 웃으니 그녀는 눈을 피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직접 물어보면 될 걸 왜 나한테 물어봐?"

"···우문이군. 가능하지 않으니 그대에게 물어보는거다."

이제 그녀는 내 앞에서 클로에에 대한 관심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잘 하고 있냐는게 성적? 아니면 교우관계?"

"그냥···아카데미 전반적인 생활을 묻는거다."

클로에의 아카데미 생활을 주에 한번 가는 내가 알 턱이 있나!

싶으면서도 그녀가 그다지 기사학부에 스며들지 못하고 있는건 실전 수업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걸 보고 결국 관여하지 않으면 정해진 스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남들이 멋대로 가지고 있는 5기사의 동생이라는 기대감.

하지만 실제 클로에가 가지고 있는 성격과 성향에서 오는 자매 간의 괴리감은 기사학부 생도들이 보면 당황스러울 정도겠지.

결국 제대로 섞이지 못하고 애매하게 겉을 떠돌고 있다.

에클레어 드리트나 라는 뒷배경이 있기에 학부에서 완전히 배척 당하지는 않는다는 정도.

"수업을 하다보면 목소리는 작고 소심해도 나름 독기가 있어. 소심한 성격과 다르게 검에 있어서는 과감하게 의표를 찌를때도 있지. 결론은···잘 하고 있다고 본 교관은 평가한다."

"···그런가. 확실히 클로에라면 나와 달리 총명한 아이라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하겠지."

에클레어는 내 이야기에 만족한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변칙적인 수가 누구를 보고 배웠는지 알면 더 기뻐하겠지만 그걸 말하면 내 입장이 스토커마냥 이상해진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결국 이야기가 처음에서 완전히 틀어졌군."

"처음에 꺼내려 했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지?"

품고있는 고민이 동생의 안부 보다는 꺼내기 쉬운 말인지 에클레어는 검을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건··· 어쩌면 그대가 공감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이 훨씬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지만 에클레어의 입장은 달라보였다.

순간이지만 피곤함이 얼굴에 드리운 그녀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나에게 말했다.

"건방지거나 오만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노력으로 안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루지 못한 일은 내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누가 뭐라해도 그걸 완고하게 믿었기에 멈추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에고가 있다는건 강점이라 생각하는데?"

내 말을 들은 그녀의 호흡에 여러가지 감정이 섞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체감하게 되더군. 최근들어서는 조금 심하게···이제 뜻을 가지고 뭔가 해보려고 해도 할수록 내 뜻에서 멀어지고 있는것 같다···정말 노력만으로 내가 원하는 결과에 닿을 수 있는 것인지 나도 자신을 못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는 이야기다."

평생 자신을 움직이게 한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을 꺼내는 에클레어의 눈은 처음으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