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 - 피어나는 소녀
"클로에.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클로에는 저녁 늦게 저택으로 돌아온 에클레어를 따라 서재로 향했다.
사용인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에클레어의 서재에 들어온 클로에는 의자에 등도 붙이지 못하고 뻣뻣한 자세로 앉아있다.
"편하게 있어도 된다."
"아··네에··!"
에클레어가 그렇게 말해도 클로에의 굳은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쪼르륵-
제국의 5기사가 정성스러운 손길로 차를 우린다.
자신의 저택에서도 풀어지지 않는 고고한 분위기를 흘리며 에클레어가 반대편에 착석했다.
"····"
사교성이라곤 없는 둘이 앉아있으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
··
"···아카데미는 어떻지?"
한참을 지나 에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고민끝에 나온건 저번에도 했던 질문이었다.
깜짝 놀란 클로에가 머리를 최대한 회전시켰다.
"어··어··그, 대단히 유익하고···보람찬 시간을···보내고 이,있습니다."
"그런가."
"네에···."
친구에 대한 이야기나 어떤 수업이 개인적으로 힘들다던가 하는 사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에클레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혼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저런 소극적인 태도에서 본심이 나오기는 할까?
그래도 일단 말은 해봐야 한다.
"이번에 본가에서 혼담 이야기가 나왔다. 건축 자재 유통을 담당하는 상단의 장남이라더군. 곧 합법적인 매관으로 귀족이 될거다."
에클레어가 이야기를 꺼내고 클로에를 빤히 보고있으니 그녀는 이제서야 누구의 혼담 이야기인지 알아차린듯 했다.
"저,저 말인가요?"
"그래."
"하지만! 저는···저··."
클로에는 뭐라 말을 하려다 에클레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입을 꾹 닫고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눈만 봐도 주눅이 드는 클로에를 보며 에클레어는 짜증이 아니라 착잡함을 느끼고 있다.
피를 나눈 사이가 붕 떠버린듯한 외로움.
클로에가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해도 그것은 자신의 업이라.
이게 언젠가는 회복 할 수 있는 사이인지 막막하기만 하다.
"조금 지나친 간섭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일단 거절 해뒀다···혹시 혼담에 생각이 있다면 말하도록 해라."
"···네에."
"나가봐도 좋다."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와 용도를 다시 한번 실감한 클로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예법을 하나하나 지키고 서재를 나갔다.
샤륵-
에클레어는 혼자 남자마자 머리끈을 풀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본가의 기형적인 상태부터 어정쩡한 가족과의 관계.
단순히 노력만 하면 이상적인 미래가 올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깊이 생각할수록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정말···나는 이도저도 아닌 인간이군."
그녀는 검과 정해진 업무를 제외하면 다른 일은 어떻게 해야할지 시작점 조차 잡을 수 없었다.
동생을 더 챙겨주면 잡음이 여기저기서 나올 것이고 그렇다고 저리 두자니 걱정이 태산이다.
내게 어떤 재능도 없었다면? 여느 자매들처럼 클로에와 쇼핑을 즐기거나 시답잖은 연애사를 논하며 지냈을까.
'···다 부질없는 가정이야.'
지금 에클레어에게는 현상 유지만 해도 벅찬 일이었다.
평소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술 한잔이 간절해지는 밤.
이제 정말 하루쯤은 푹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리케는 로만이 돌아온 날 정말 깊은 숙면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연인이 혹시나 다쳤을까.
예상도 못한 어떤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을까.
혼자서 끼니는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걱정으로 살얼음 같은 얕은 수면을 이루던 시간이 끝났다.
욕구의 해소와 정신의 안정이 주는 양질의 숙면은 리케의 컨디션을 하늘까지 올려놨다.
티끌 하나 없는 정신의 쾌청함과 깃털 같은 육신의 가벼움.
막힌 벽을 넘어서는데 더 없이 좋은 타이밍이다.
이른 시간에 개운하게 일어난 리케는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간질간질 한 감각을 잡아내기 위해 마당에서 로만에게 가르침을 받고있었다.
"시작한다."
로만이 검을 잡고 신체에 새겨진 경로를 통해 엄청난 양의 마나를 움직인다.
목적에 비해 과할 정도로 많은 마나가 움직이고 리케는 안광을 빛내며 그것을 보려고 애쓰고 있다.
화르륵-!!
로만의 신체에서 이동한 마나가 가시화 되고 검을 매개로 푸른색 불길을 성화처럼 뿜어냈다.
"조금 귀찮아도 기본적인 경로를 제대로 터득해야 자신만의 경로와 방법을 만들 수 있는거야."
"응··."
"다시 한번 간다."
··
"다시."
··
"다시."
-
보고자 하면 볼 수 있을거라 했다.
내 재능과 능력을 믿는게 아니다.
그저 오빠의 말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보고자 마음 먹으니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신체를 순환하여 무기로 향하는 마나가.
'···진짜 보여!'
볼 수 없던게 보이며 마나가 한 호흡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져 나갔지만 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
리케는 똑똑히 봤다.
그제야 이 눈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왠지 지금이라면···일단 해볼게."
리케는 바니타스를 꺼내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집중을 시작했다.
방금 보여준 마나의 움직임이 머리에 선명했다.
마나라는 무형의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이미지화를 하니 빛 하나 들지않던 골목에 햇볕이 쏟아지는 느낌이다.
'이건 내 눈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 한 방법이라고 그때 말했지···.'
분명··· 오빠도 오러를 터득할 때까지 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 시행착오를 모두 제거하고 몇개인지 모를 갈림길 사이 단 하나의 정답을 자신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간이고 쓸개고 내어주는 그를 보면 정말 가슴이 벅차서 미칠 것 같다.
'나는 저렇게 마음을 증명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은 가르침을 받고 성장을 증명 하는 것이다.
*****
"후우-"
핏. 핏. 핏-!
리케가 들고있는 바니타스에서 푸른 빛이 점등하기 시작했다.
로만은 어떤 말도 하지않고 숨을 죽이고 그녀를 지켜봤다.
오러를 다루는 감각은 한번만 열면 그 이후로는 훨씬 수월해진다.
몸에 체류하는 마나를 가시화 시키는 단 한번이 어려운 것이다.
'나도 열심히 안하면 금방 잡히겠는데.'
그로토가 남긴 사역마의 잔재나 중간중간 크고작은 영약을 먹이긴 했지만, 리케가 벌써 오러를 감지하고 시도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재능이다.
토납법을 전수받기 전까지 반쪽짜리 연공법을 사용해 왔으니 리케가 마나를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시간은 아주 짧다.
하지만.
리케가 특별한 눈을 가지고 사람의 요동치는 감정만이 아닌 마나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 점.
그것은 남들이 직감에 의거해 도착점을 찾아야 하는 불모지에서 혼자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더불어 히로인 특유의 재능까지 더 해지니 그 시너지가 어마어마했다.
틱- 팟! 팟! 팟!
푸른 빛이 점등하는 주기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리케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덩달아 나도 주먹을 쥐고 숨을 멈췄다.
'조금만···진짜 조금이다!'
화륵-! 화륵! 지이잉-!
그녀의 원대한 목표를 위해 크게 한발 내딛는 개화의 순간.
바니타스의 어두운 날을 청색 마나가 코팅하듯 감싼다.
그녀의 차분함에 걸맞는 아주 깔끔한 오러였다.
-
지금 아카데미 생도 1학년 중에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 몇명이나 있을까.
로버트? 그의 [광명]은 평범한 오러보다 범용성이 넓고 강력할지 모르지만 그 당사자가 오러를 쓸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재능 좀 있다하는 무가의 자제들이 오러를 개화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죽어라 엘리트 코스를 구른다는 가정 하에 20대 초중반에 도착하는게 평균.
생존의 위협이나 살기위한 발악 같은 특별한 경험으로 이른 나이에 오러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으나 그건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다.
리케는 그런 특별한 경우도 아니고 정식 코스를 밟은 경우도 아니지만 배운 기간으로 봤을때는 내로라하는 대륙의 천재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진짜 이거면 괜찮아?"
"응!"
리케의 폭발적인 성장을 축하하며 뭐라도 해주려 했는데 리케가 원하는건 아카데미에 등교하기 전 자신과 같이 빵집을 가는 것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리케 나름의 새로운 루틴이 생긴듯 하다.
'일이 없으면 매일 같이 가줘야겠네.'
다른건 괜찮고 이거면 충분하다 하니 정작 내가 아쉬움을 느끼며 따라갈 뿐이다.
아직 터무니없는 소식가지만 예전에 비해 식욕이 생긴 리케가 보기 좋았다.
"거의 다 왔어!"
내 손을 잡고 앞장서는 리케에게 이끌려 도착했다.
지금은 모험가 길드의 근처에 있는 상권을 이용하지만 이쪽 상권도 기억이 있다.
'집에서 밥을 해먹으려고 노력해봤던 시기에 이 근처에 자주 들렸었지··.'
리케가 말하는 빵집도 어디인지 알 것 같다.
"오오! 냄새 좋다."
"그치?"
빵집에 가까워 질수록 몸이 따뜻해지는 냄새가 난다.
'죽어라 살아온 보람이 있네··.'
평화로운 이 순간이 더 없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늪고래를 잡고 흑마법사를 처리하고 용병들을 쓸어내는 하루가 특별하다 하겠지만.
나는 분명 그 순간들을 금세 잊을 것이다.
하지만 새벽에 리케와 손을 잡고 빵을 사러 온 날은 잊지 못할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