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 - 에피소드?
에클레어 드리트나 그리고 클로에 드리트나.
드리트나 자매는 나이 차이가 있어서 더 극명한 대비를 보였다.
에클레어는 어릴때 부터 총명하고 비범했으며 비슷한 나이대의 천재들과 비교해도 남달랐다.
전통적인 기사 가문에서 특출난 재능을 가진 그녀가 기사의 길을 걷겠다는데 외모 하나가 아깝다고 말릴만한 인물은 없었다.
무려 제국의 5기사.
에클레어가 기대 이상으로 대성하여 가문을 드높이면서 다음 기대는 자연스럽게 클로에 드리트나에게 향했다.
외형도 닮았고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 신체조건은 더 뛰어났으니 가문의 입장에서는 기대해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신님도 무심하시지.
클로에의 재능은 무난하고 나쁘지 않은 정도.
에클레어를 제외한 드리트나의 기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생도 중에서 중간보다 조금 위. 하지만 송곳처럼 돌출 된 재능은 아닌 수준.
눈에 보이는 닮은 외모가 문제였을까.
클로에도 언젠가는 숨겨진 재능을 개화할거라 드리트나의 기사와 가신들은 믿었다.
그게 클로에 드리트나 본인에게 얼마나 큰 부담인지도 모른 채.
( 에클레어는 어릴 때 산적을 혼자서····)
( 에클레어는 생도가 되기 전 부터 오러를 사용했···)
( 에클레어는 ···)
··
··
'집중···집중해.'
사람들 앞에 서면 머릿속이 소음으로 시끄러워진다.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는 이 시간이 제일 싫었다.
꽈악-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으니 머리에 잡음이 조금 줄어들었다.
스릉!
품에 안고있던 롱소드를 뽑는다.
"···크,클로에 드리트나 입니다."
*****
클로에는 약간 음침하면서 폭발적인 몸매를 보유한 인기 캐릭터면서.
관련 퀘스트만 존재하고 플레이어블이 호감작을 할 수 없는 인물 중 하나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려나?'
게임에서는 로버트의 히로인이 아니라 마법학부에 있는 로버트의 지인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인 걸로 기억한다.
주인공의 히로인이 아닌데도 인기는 확실했지.
"···크,클로에 드리트나 입니다."
최근에 만난 에클레어 때문인지 더 의식이 되긴 한다.
에클레어와 얼굴은 확실히 닮았지만 클로에는 은발이 아닌 재를 뿌린듯한 회색이며.
눈동자 또한 적안이 아니라 맑은 물소리가 날 것 같은 푸른 벽안으로 에클레어와는 차이가 있다.
그뿐일까.
언니가 절대 부서지지 않을 단단한 보석 같다면 클로에는 이미 고열에 굽어진 쇳덩이 같다.
신장은 에클레어 보다 큰데 자세도 구부정하고 눈가가 내려가 자신감이 없다.
저 축 처진 모습에 얼마 전 리케가 생각나 그립기까지 하다.
'성장과정을 보면 이게 당연한 결과인가.'
예전의 리케도 기운이 없긴 했지만 클로에는 리케와 문제의 결이 다르다.
리케는 관계없는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만 가는 타입이라면.
클로에는 언니와 비교당해 온 시간들에 눌려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 쓰게 된 상황.
정말 단순함의 끝으로 예를 들자면 리케는 어딜 가서도 혼밥이 되고 클로에는 남들 눈치 보느라 혼밥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 트라우마에서 생겨난 클로에의 스킬이 있으니.
[ 아델의 페르소나 - B ]
▷가면 아래에 인격을 창조합니다.
▷스킬 발동 중에 신체능력이 상승합니다.
▷스킬 발동 중에 상태이상 내성이 상승합니다.
저 스킬에서 말하는 가면은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장비를 말한다.
진짜 가면도 좋고 투구도 좋다.
하지만 단순한 설명과 달리 쉽지 않은 일.
기사를 노린다 해도 귀족가의 영애가 평생 가면이나 투구를 쓰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본인도 저 스킬을 활용하는 건 졸업 후의 미래를 보고 포기한 상태.
"멍하니 있지 말고 집중해라! 정신 똑바로 차려!"
내 경고에 정신을 차린 건지 클로에가 손을 한번 풀고 검을 다시 잡았다.
철컥-!
이 자매의 이야기는 옆에서 보기만 해도 드는 생각이 많다.
에클레어가 동생을 위해 몸을 혹사시켜 드리트나 가문을 키울수록 그녀의 그림자는 점점 커져간다.
클로에는 선의를 품고 자란 그림자에 점점 잠겨가고.
'여기서는 어떻게 되려나. 끝이 궁금한데.'
게임에서는 깔끔하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아카라이트 게이머들은 드리트나 자매 DLC가 따로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며 손가락만 빨고 있었으니.
"가,갑니다··!"
*****
"헛-!"
로버트가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익숙한 천장이었다.
자신의 기숙사 천장이란 걸 알게 된 로버트는 묵직한 두통에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으으으··."
물에 흠뻑 젖은 솜 같은 몸을 일으키자 탁자 위에 놓인 메모가 보인다.
[ 오늘은 푹 쉬어! 우리가 교관님들에게 사정은 말해둘게! ]
'무슨 일이 있었지···?'
광명을 쏜 직후에 시야가 갑작스레 암전 한 기억뿐이었다.
"씨발···."
기억도 없는데 확신할 수 있는 건 이득도 없고 멋도 없었다는 점.
로버트는 기숙사 방 안을 멍하니 몇 바퀴 돌다가 책상에 앉았다.
'이거라도 해야지···더는 미루면 안 된다.'
책의 반납 일자가 당장 내일이라 오늘 조금이라도 봐야 한다..
[ 차원 마법 실험 보고서 ]
먼지가 살짝 쌓인 책을 천으로 닦아내고 첫 페이지를 편다.
샤락-
[ 하룬 제국과 볼라센 연방국을 고고학자인 아내와 돌아다니며 나는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우리의 지식과 상식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
'이런 당연한 말을···.'
종이가 아까울 정도로 당연한 말 아닌가? 로버트는 책의 시작부터 태클을 걸고 싶었다.
'불안한데···이거 읽다가 시간만 날리는 거 아닌가?'
그날 로버트가 아카데미 도서관을 간 건 우연이었다.
친구들과 밖에 나가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중 불이 켜진 도서관을 보고 기웃거리다 잠시 들렸다.
너무나도 판타지스러운 도서관이 신기해 서재를 산책하듯 돌다가 이 책을 본 것이다.
차원이라는 단어와 보고서라는 말.
거기에 묘한 끌림을 느껴 대여했지만 책의 중반까지는 작가의 에세이에 가까웠다.
[ ··ㅡ 그 던전에서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고 나는 그날로 아내와 대륙 여행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차원 연구에 몰두했다. ]
'이제 좀 본론이 나오네.'
쭉쭉 넘어갈수록 이상한 도형들이 나오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결국 내가 완성한 마법진은 이런 형상이다. 분명 어떤 오차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작동하지를 않아 나는 땅을 치고 울부짖으며 절망했다. ]
이동용 게이트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도 복잡하다 생각했는데 이건 그것보다 10배는 복잡해 보였다.
수백 개의 도형을 종이 한 장에 꽉 채워둔 것이 어린아이가 장난이라도 친 것 같은 그림이었다.
[ ···절망이 지나가고 나는 매일 고찰하고 또 고찰했다. 결국은 시간이 지나 머리가 백발이 되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다른 차원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내가 만든 마법진이 문제가 아니라 발동을 위한 매개체가 문제였다. 나는 이 마법진을 어떤 짓을 해도 발동할 수 없는 것이다.··· ]
[ ···일단 조건 자체가 노력으로 극복이 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단순히 말하자면 답이 없었다. 발동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확인해 본 결과 마나라는 건 결국··· ]
로버트는 책을 쭉 읽다가 생각했다.
'···내 마나로 될 것 같은데?'
이 마법사가 말하는 허구에 가까운 추상적인 조건들. 제일 중요한 걸 구비하고 있는 게 빙의자인 자신이다.
마치 이건 자신이 보라고 만들어진 책 같았다.
로버트는 아까 넘겼던 도형이 가득한 마법진 페이지로 돌아왔다.
"에라이···!"
우우웅-
잠시 망설였지만 마음을 잡고 그 위에 마나를 흘려 넣자.
도형이 가득했던 페이지가 사라지며 마나가 한 곳에 모여든다.
쯔저적-!!
"어,어?!"
허공이 작게 갈라진다.
그리고 갈라진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툭.
"좀 기분 나쁘게 생겼는데···이게 뭐야···."
그 덩어리는 돌덩이처럼 단단하지만 양면으로 다른 색깔이 꾸덕한 물감처럼 흐르고 있었다.
물이 고여있을 때 가끔 보이는 무지개색 기름 같기도 하다.
로버트는 책상에 올려둔 감정용 아이템을 꺼냈다.
"···!!"
이 돌은 불쾌한 외형과 달리 이름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 차원의 파편 ]
"···역시 나는 되는구나!!"
실전 수업의 우울감이 한방에 잊혀진다.
책을 출판한 마법사는 평생을 해도 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은 그저 타고난 것으로 해낸 것이다.
"근데 이거···쓸 곳이 있나?"
깨진 허공에 파편을 살짝 들이밀어 봤지만 메꿔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닫히겠지···?'
뭔가 저 벌어진 틈에는 손을 넣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일단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지금은 이 미상의 물건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이런 건 마법사들이 전문인가? 아니면 연금술사?'
'마법진 페이지가 사라진 것도 곤란한데···.'
일단 똑같은 책이 있는지 수소문해 봐야겠다.
"어디로 가야···아!"
파편을 쥐고 의자에 앉아있던 로버트의 머리에 그럴듯한 인물이 하나 떠올랐다.
마법학부에 있는 안경잡이라면 이 파편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마법에 있어 명문가 출신이기도 하고 사이도 무난하니 물어보기 나쁘지 않다.
혹시 이걸 몰라도 괜찮다.
가끔 만나는 때에도 이상한 실험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 바쁜 녀석이니 이걸 보여주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읏쌰!"
수치스러운 과거는 이미 잊었다.
기운을 완전히 차린 로버트는 품에 파편을 안고 자신의 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