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 - 혼자 맛있는거 먹었나?
본질이 모험가인 나야 의뢰를 나가지 않으면 바쁠 게 없다.
아카데미 수업이라 해도 지금은 주에 한번.
많아봐야 누구 수업이 펑크 나면 부탁받고 두 번 들어갈까 하는 시범 수업이지만.
생도인 리케는 지금까지 해온 일이 있으니 이제 출석도 아슬아슬할 것이고 시간표도 빡빡할 것이다.
"오빠! 다녀올게."
나는 문 앞에서 리케를 한번 안아주고 보냈다.
'역시 마음의 상처를 고치는 건 사랑을 나누는 게 최고지.'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고치는 것이다.
리케는 오늘부터 아카데미에 가보겠다며 새벽에 일어나 내 아침밥까지 준비해 놓고 나갔다.
나와 관계가 발전하면서 한순간에 밝아진 그녀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정신을 위협하는 위기를 만나도 그때그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리케의 멘탈은 강철을 넘어서지 않았을까?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나.'
히로인 중에서도 리케 정도로 멘탈이 강하고 회복이 빠른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는 리케가 준비해 둔 간단한 요리를 먹으며 비몽사몽 한 정신을 깨웠다.
어설프게 썰린 재료들이 인상적인 크림스튜였다.
'···집에 이런 재료가 있었나? 너무 신경을 안 쓰긴 했네.'
정말 간단한 요리라도 집에서 뭔가를 해먹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 나도 받기만 하면 양심이 더는 못 버텨···요리랑 청소라도 해야겠으니 진짜 말리지 마. )
최소한 가사노동을 전담하겠다는 그녀를 말릴 길은 없었다.
노동력에 걸맞은 용돈을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나는 스튜를 깔끔히 비우고 거실에 서서 생각에 빠졌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구나.
메모하는 습관이 없다 보니 지금도 뭔가 잊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끼익-
현관문을 열고 햇살을 맞으며 길을 걷는다.
그렇게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해가 쨍쨍하게 떠있었다.
'확실히 아침을 제대로 먹으니 든든한 게 힘이 나네.'
속이 뜨끈한 게 몸에 활력이 돈다.
남자 혼자 살아봐야 끼니를 얼마나 잘 챙겨 먹겠는가.
오히려 의뢰로 나가있을 때가 더 잘 챙겨 먹는 편이다.
'누가 챙겨주는 게 나쁘진 않구나···.'
나는 자다 일어난 후줄근한 차림으로 배를 긁으며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
"여기 수수료- 지금 의뢰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닌데 당분간은 중단. 까먹을까 봐 미리 낸다."
"감사합니다."
짤그락-
나는 어제 준비해 둔 금화를 주머니에 담아 접수대에 넘겼다.
기본적으로 모험가 길드가 먹는 수수료는 등급별로 나누어져 있다.
지명으로 만 골드를 받든 봉사정신을 가지고 무료로 하든 의뢰를 수행하면 길드에 내야 할 수수료가 있다.
금은 얼마요, 청금은 얼마요, 백금은 얼마요, 의뢰를 완수하면 길드에 내야 하는 금액이 각각 정해져 있기에 거기에만 맞춰주면 모험가가 할 일은 끝이다.
지금과 같이 확실한 기준이 생긴 이후로 모험가들도 편해졌다.
물품을 대가로 받고 의뢰를 진행했을 때는 수수료 같은 것도 애매했으니.
'내 돈이 아니니 아깝지가 않네.'
이번 수수료는 그로토와 헬 브룸의 주머니가 제공해 줬다.
"그럼 고생해~"
정신 놓고 있으면 까먹기 딱 좋은 일 하나를 끝내고 나는 미련 없이 길드를 나와 발을 옮겼다.
터벅- 터벅- 터벅-
일반인들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골목을 이리저리 헤집는다.
너무 자주 다녀서 이제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여기 냄새는 적응이 안돼.'
수도에서도 흔히 빈민가라 불리는 지역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나는 멈춰 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빠지면 빈민가.
왼쪽 골목으로 가면···
-까악! 까아악!!
-퀑! 퀑퀑!
-그르르릉···
철장에 동물들을 가둬두고 판매하는 지저분한 골목.
식용이 대부분이지만 애완용으로도 판매하고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조류가 든 철장을 길처럼 쌓아둔 가게로 향했다.
-삑-! 삐익! 삐삐삐!
귀에 직격으로 꽂히는 새소리를 들으며 철장을 지나 안으로 파고든다.
가게 주인은 나를 보고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이 녀석인가.'
초록색 물그릇이 중간에 달린 철장.
그 앞에 멈춰서 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를 꺼냈다.
안에 앉아있던 작은 새 한 마리가 양발로 총총 뛰어 나에게 다가온다.
-삐익! 삑!
텁!
철장 안으로 종이를 넣는 순간 부리로 종이를 낚아채더니 둥지로 돌아간다.
새가 둥지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을 끝마치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정보 길드도 끝났고··· 다음은 아카데미···.'
-
아카데미는 한창 수업 중인지 밖에 돌아다니는 인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정문을 지나자마자 아카데미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관장은 자리를 비운건지 보이지 않았고 사다리를 타고 정리를 하고 있는 사서만 몇 명 보인다.
책냄새에 정신이 차분해지는 걸 느끼며 다시 한번 에피소드 1에 관련된 책을 찾아 서재를 돌았다.
"···아직도 반납이 안 됐다고?"
이건 여러 가지로 문제였다. 여기 책이 있어도 문제요 없어도 문제인 상황.
에피소드가 아예 진행이 안될 확률이 있을까?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그걸 믿고 누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리케가 아카데미에 있는 이상 인명사고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에피소드 1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리케는 괜찮을 것 같지만.
세상에는 '혹시' 라는 말이 있다.
'로버트가 빌려간 게 아닌가?'
수업이 없는 날도 당분간 출근은 계속해야 할 것 같다.
*****
"어어어-!! 리케 드디어 왔구나! 아픈 건 아니지? 괜찮아?"
"응 괜찮아."
세리아는 역사 수업에 들어와 있는 리케를 보고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비어있는 리케의 옆자리는 세리아가 꿰차서 자리했다.
세리아는 역사 교과서를 읽고 있는 리케의 얼굴을 슬쩍 봤다.
'뭐지? 뭔가···달라졌어!'
여전히 무표정한데 미묘하게 뭔가 다르다.
그래서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추상적이지만.
전처럼 멍하게 허공을 보는 느낌이 아니라 시선이 또렷하다.
'···피부에서 광이 나는 것 같은데?'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아니면-
'나 빼고 혼자 맛있는 거 먹었나?'
변한 건 확실한데 그게 무엇인지 확신할 능력이 세리아에겐 없었다.
그래도 그 변화가 부정적이지는 않은 느낌이라 다행이었다.
"맞다! 들어봐. 어제 언니가 알려준 건데 ㅡ"
*****
'···리케! 드디어 돌아왔구나!'
로버트는 지옥과 같은 제국의 역사 수업에 들어오자마자 리케가 앉아있는 걸 보고 속으로 종이를 뿌리며 환호했다.
며칠 동안 흐트러져 있던 집중력이 자리를 되찾는 느낌이다.
"로버트!! 여기 빨리 앉아~"
"지금 갈게."
뒷자리에 책을 놓으면서도 로버트의 시선은 리케에게 향했다.
'오늘 권유를 한번 해봐야겠어···.'
리케가 결석한 사이 관계를 좁힐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준비 한 로버트다.
옆에 앉아있는 빨간 꼬맹이가 거슬리지만 분명 둘이 이야기할 기회는 생길 것이다.
-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끝내도록 하지."
"""고생하셨습니다."""
목소리가 수면제나 다름없는 역사학 교관이 수업이라는 고문을 끝내고 강의실에서 나갔다.
우르르 생도들이 몰려나가지만 리케와 빨간 머리는 자리에 아직 앉아있었다.
'사람이 다 빠지면 여유롭게 갈 생각인가?'
-
로버트는 일행을 먼저 보낸 뒤 리케와 세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길 기다렸다.
'미치겠네···저 꼬맹이는 말이 왜 저렇게 많은 거야?'
리케는 대답도 안 하는 것 같은데 혼자 말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도저히 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아 로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둘에게 향했다.
"저기ㅡ"
리케와 세리아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가 로버트에게 향했다.
'···결석한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리케의 눈에서 전과 달리 빛이 난다.
꽃봉오리가 아니라 꽃이 완전히 피어난 것 같다.
"···리케.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이신가요?"
리케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되물었다.
세리아가 분위기를 보다가 은근하게 몸을 움직여 리케의 앞에 섰다.
주인을 지키려 하는 작은 강아지 같았다.
"진짜 잠시면 충분해! 분명 리케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야."
"···알겠습니다."
세리아는 리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리를 비워줬다.
이제 강의실에 남아있는 건 로버트와 리케뿐이었다.
"결석이 너무 길어져서 걱정했어."
"···?"
다른 여자들과 달리 아무 반응이 없다.
마치 어쩌라는 눈이다.
살짝 민망해진 로버트는 화제를 돌렸다.
"크흠. 리케도 알겠지만 우리 가문이 교단이랑 사이가 제법 돈독하잖아."
"그러시군요."
"이번에 내가 교단 사제들을 만났을 때 말해봤어. 얼굴에 그 흉터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오늘 교단에 같이 가자."
"···."
"아! 바쁘면 날을 정해서 가도 괜찮아. 내가 좀 갑작스럽게 제안했으니."
로버트는 말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걸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 기뻐해야 할 제안인데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는데 주위의 온도가 낮아진 것 같다.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리케가 빠르게 지나쳐간다.
이대로면 지금보다 멀어지는 건 당연하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자,잠깐만! 나는 이걸로 보답을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약혼자로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려는 거야!"
내 말에 리케는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내 말을 드디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최소한의 성의···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해만 했을 뿐입니다. 애초에 전 이제 스카디가 아닙니다. 약혼도 당연히 없던 일이 되겠죠. 그럼···."
뒤도 안 보고 자리를 뜨는 그녀를 로버트는 입을 열고 보기만 했다.
"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