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 그녀는 눈을 뜨는게 무섭다.
쨍그랑-!!
반으로 갈라진 구슬을 벽에 집어던졌다.
최악의 수를 예상하는것과 그 최악의 수가 적중하는건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예상을 했어도 실제로 일어났을때의 충격은 컸다.
"흑···."
이제 그녀는 세상에 홀로 남았다.
리케 '스카디'가 아니라 자신은 그냥 리케다.
어두운 방에 혼자 있으니 진정이 되지 않는다.
머리를 쥐어뜯고 손톱으로 몸을 마구 긁고 싶어진다.
'보고싶어···.'
생각나는 사람이 한명뿐이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지금 그를 눈에 담으면 미칠것 같은 마음이 진정 될 것 같았다.
살아있는 가족도 보여주지 않는 무상의 애정.
거짓 없는 솔직함.
자신이 닮고 싶은 당당함과 자유로움.
힘이 있으면서도 은근하게 내 눈치를 보는 사람.
내가 그를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이렇게 많다.
덜컥-!
리케는 신발을 신는 것도 잊고 맨발로 아카데미 기숙사를 뛰쳐나왔다.
로만의 집으로 가는 길 외에는 모두 불타고 있는것 같다.
나는 무조건 여기로 가야한다.
"허억··허억···."
손을 놓는 순간 부서질것 같은 심장을 움켜쥐고 비를 맞으며 달렸다.
*****
'내가 빠진 사이 에피소드가 진행된건 아닌가?'
내가 조종하지 않고 감정이 있는 로버트는 예측하는게 거의 불가능하다.
비도 오고 저녁이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딱히 아카데미에 일은 없어보였다.
'다음은 어디부터 가야하나···.'
앞으로를 고민하며 책을 복습하다가도 리케의 얼굴이 아른거려 집중이 안된다.
원래라면 이 사실을 듣고도 스토리상 잘 극복하겠지만.
해결이 급진적이었으니 문제가 일어나도 이상할게 없었다.
계약서를 처음 봤을때와 달리 기숙사로 향할때 본인이 의지를 다진것 처럼 보였지만 솔직히 걱정된다.
지금이라도 아카데미 기숙사로 가볼까?
뜨끈한 우유랑 스튜라도 사서···.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앉아서 혼자 발버둥을 치고있으니 마당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쿵쿵쿵! 쿵쿵쿵!
누군가가 왔다.
문을 두들기는 손길에서 긴박함이 느껴졌다.
열었더니 리케가 서있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솔직하게 기뻐하기 힘들었다.
"···빨리 들어와."
맨발에 정복 차림으로 쫄딱 젖은 몸.
눈은 충혈 되어 있고 입은 경련이 일어난듯 달달 떨고 있었다.
한발 들어와 입구에 아무말도 없이 가만히 서있는 리케를 끌고와 자리에 앉혔다.
"일단은 몸부터 따뜻하게 하자 감기걸려. 옷 준비 해줄테니 씻을래?"
"····"
눈을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수건을 하나 들고와 앉아있는 리케의 뒤에 서서 머리의 물기를 닦아냈다.
사악- 사악-
'단발이라도 남자 머리랑 다르게 손이 많이 가는구나.'
*****
머리를 닦아주는 그의 손길은 투박하지만 애를 쓰고있다는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묻지 않지만 왜 이꼴로 왔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뭐라 말을 해야하지?
"···보고싶어서 왔어요."
아- 나는 항상 로만의 자유로움을 부러워 했지.
생각을 그대로 뱉고도 로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그의 표정과 감정을 보기가 무섭다.
로만이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이제 정말로 버티지 못할것 같다.
"나도 보고싶었어."
"···기뻐요."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저 말이 죽을만큼 기쁘지만 눈을 뜰 수 없다.
저 말이 진실인지 볼 자신이 없다.
애초에 남들처럼 모르면 좋았을걸.
확신없이 어림짐작만 하며 살아가면 좋았을텐데.
"···왜 그래?"
그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린다.
따뜻한 우유라도 가져오겠다며 그가 머리를 닦는걸 멈췄다.
순간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무엇도 없이 그냥 붙어있고 싶었다.
"자,잠시만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품을 꽉 안았다.
로만은 빗물로 축축하게 젖은 나를 밀어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들겨 줬다.
"리케. 왜 평소처럼 내 얼굴을 안봐?"
"죄송해요···죄송해요···제발 그냥 안아주세요···."
로만의 품에 한참을 안겨있었다.
그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나를 토닥였다.
"로만님은 저를···."
"응?"
"저를···."
하고싶은 말을 그대로 뱉는다는건 보통 용기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리케의 머리에 급정지가 걸리며 입이 닫힌다.
"괜찮으니 생각이 정리되면 천천히 말해. 어디 안가."
답이 듣기가 무서운 질문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리케는 한칸 도망가 차선책을 택했다.
"···오늘 안아주세요."
말하면서도 안고있는 팔에 힘이 꽉 들어간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그림은 이게 아닌걸 알지만.
로만이 자신을 원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된다.
*****
'이거 아닌데···.'
당연히 안을꺼다.
나는 이런 기회를 걷어찰 머저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원하는게 아니다.
여자라는 섬세한 생물을 남자는 어떻게 달래야할까.
내가 그저 안고있는것 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리와."
내가 안은 채로 움직이려하니 리케가 다리에 힘을 주고 움직이지 않았다.
"대답해주세요···오늘 제가 있어도 되는거죠?"
나를 안고있는 리케의 팔에서 경직된 불안함이 느껴진다.
얼굴은 아예 파묻고 들 생각을 안한다.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리케를 번쩍 들어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왼쪽 허벅지에 앉았다.
'이거 좋은데?'
물기가 있는데도 훌륭한 감촉이었다.
"읏!"
또 얼굴을 파묻으려하는 리케의 볼을 양손으로 잡았다.
"리케. 나한테 묻고싶은 말이 있잖아?"
내 말에 리케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워···못보겠어요···제발··."
"리케 날 봐."
리케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지금 리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걱정하지마. 분명 괜찮아."
"말은 쉽지만···어떻게 그래요···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게 없는데···."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이 왜 존재하겠는가? 시간이라는 요소가 감정의 농도를 전부 결정하는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 일차원적이고 단순한게 아니다.
"우리가 알아간 시간이 짧다고 품은 감정이 가벼운건 아니야. 그렇지?"
"저는 그래요···."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케. 나도 마찬가지야."
"····"
"사랑해"
리케가 내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꼭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못보겠어···그 말이 너무 듣고 싶었는데···너무 무서워서···무서워요··."
그녀는 지금까지 많은 인간상을 봤을 것이다.
인간의 겉과 속이 다른건 너무나 흔한 경우겠지.
"리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니에요!! 이건 분명···분명··사랑···이에요."
울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는 정말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
나는 허벅지에 앉아있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서 당겼다.
리케는 저항없이 내 손길에 이끌려왔다.
"내가 혹시 리케에게 거짓말한 적 있어?"
그녀는 허리에 있는 내 손을 잡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번 한번만 믿고 봐주면 안될까? 내 마음을 몰라주는건 좀 슬픈데."
슬프다는 말에 그녀는 덜컥 놀라더니 살짝 눈을 떴다.
"리케. 여기 봐."
"····"
"사랑해"
*****
자신이 사모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건 연애경험이 없는 리케도 알고있다.
거기에 얼굴을 알게 된 시간이 짧은데 어떻게 자신의 마음과 같을 수 있을까?
짧은 시간에 품은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가볍게 보이지 않을까?
어쩌면 백금인 자신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무섭다.
그렇게 생각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생각하는 것 만으로 두렵다.
그래서 안기기만 해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로만에게 안기면 오늘의 아픔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한번만 믿고 봐주면 안될까? 내 마음을 몰라주는건 좀 슬픈데."
그가 슬프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 눈은 그를 담아냈다.
"사랑해"
그리고 보았다.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정말···정말로 절 사랑해요?"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뜨고 로만을 보았다.
다시 한번 듣고싶었다.
"사랑해"
"···저는 이제 귀족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는데도 사랑해요?"
들어도 다시 한번 듣고싶다.
"어. 내 마음은 안변해."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사랑해"
"나도···나도 사랑해요."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것 같다.
흑백으로 물들어가던 세상이 다시 색을 찾아간다.
"내 마음이 보여?"
천연덕스럽게 웃는 로만을 보며 나도 웃었다.
우중충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던 세상에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것 같다.
"너무 밝고 선명해서 눈이 부실정도로···."
"그만큼 내가 리케를 좋아하나보다."
"좋아한다가 아니라 사랑한다고 해줘요··."
"그만큼 내가 사랑하나보다?"
차오르는 마음의 풍족감. 살아생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치고 올라오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다.
정신을 시작으로 몸까지 번진 불길에 달아올라서 미칠것 같다.
"빨리··· 못참겠으니까 입술부터 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