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 모르는게 좋은 일도 있다.
악마의 힘이 들어간 계약서는 검은 양피지에 서로의 피를 사용한 붉은 글씨다.
헬 브룸이 계약서를 허공에서 꺼내 리케가 그걸 펼치는 순간.
우우웅-
뾰족하고 까만 손톱이 인상적인 손들이 허공에 나타나 헬 브룸을 가리켰다.
계약 위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듯 눈과 혀 그리고 사지를 깔끔하게 가져간 것이다.
"···!!"
피 한방울 나지않는 깔끔한 적출이 끝난 뒤 손은 사라졌다.
기적적으로 숨을 이어가는 것도 잠시.
"고작···고작···이딴···."
계약서의 첫 줄을 읽는 순간 리케의 검이 헬 브룸의 목을 잘라냈다.
-
쏴아아아아ㅡ
수도로 돌아가기 시작한 때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아도 이게 차가운건지 젖는건지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자고싶어···.'
지독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다.
그러나 눈을 감는 순간 또 그날의 악몽을 볼 것 같아 두려웠다.
며칠사이 알록달록 색채를 찾아갔던 세상이 다시 흑백으로 물들어간다.
오늘에서야 자신의 고집이 결실을 맺었다 생각했는데···.
찰박-
안겨있던 몸이 내려오며 발이 축축한 바닥에 닿았다.
고개를 들었더니 저녁 하늘 아래에 웅장하게 서있는 아카데미 정문이 보였다.
"···무슨 일 생기면 편하게 말해. 이번 일을 완전히 마무리 하는 것 까지가 내 일이잖아."
"····"
그가 몸을 낮춰 조심스러운 손길로 비에 젖은 내 앞머리를 정리했다.
내 발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으니 그도 비를 맞으면서 자리를 지켰다.
-
내 몸을 이끌고 까마득한 산을 오르는 법을 알고싶었다.
일단 발을 움직이며 오르는 법을 찾아다녔다.
드디어 큰 산을 넘었다 생각했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주위는 심연뿐이었다.
'나는···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리케는 방에 갇힌 어린 시절부터 분노는 꺼지지 않는 무한한 연료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느 지점에 도달 하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의 끝을 볼 때까지 지쳐 멈춰서는 안된다고.
결코 멈추지 않을 거라.
그때는 이 마음이 절대 꺾이지 않을거라 장담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자신이 생각한 최악보다 더 최악이었다.
한 순간에 모든걸 잊고 백치가 될 것 같았다.
싸아아아-
'····?'
여전히 빗소리는 귀를 때린다.
더 이상 머리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바닥을 보던 고개를 들었다.
로만이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고 있었다.
겉옷을 벗으니 너덜너덜하게 찢어지고 피로 색이 완전히 변해버린 그의 옷이 보였다.
비에 젖으며 그가 이때까지 살아온 삶의 족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온 몸을 뒤덮은 흉터.
저 피와 상처는 내 욕심이 만든 것 이다.
내 두 눈으로 봤다.
부탁해놓고 계속 심장 졸이지 않았나.
'여기서 멈추면···.'
이기적인 년.
위험한 일에 타인을 휘말리게 했으면서 나는 주저 할 뻔했다.
몸을 뚫을듯 내리는 빗속.
로만과 리케가 지금 서로에게서 느끼는건 하나의 심파시였다.
*****
'마무리가 잘 되야하는데···.'
걱정되는 부분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래도 리케라면 잘 하겠지.
리케가 아카데미 기숙사로 걸어 들어가는걸 보고 일단 집에 돌아왔다.
피로 걸레가 되버린 옷을 처리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낸다.
지금 받은 의뢰는 단편적으로 끝났지만 의뢰를 끝마쳤을때의 그 후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계약서를 몇번이나 보고 허망한 표정을 짓는 리케의 표정이 아른거린다.
나에게 이게 거짓말일 가능성은 없냐고 묻던 절박함.
"지금 가서 목을 따버리면···정사가 진짜 박살 나려나."
나는 현 스카디 가문의 가주.
에녹 스카디와 같은 인물을 많이 봤다.
그런 놈은 전생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고 없는 곳이 없다.
목적 없이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어하지만.
형체 없는 목표에 비해 욕망은 타오르는 자.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가족 정도는 '따위'가 되는 인물들.
-
헬 브룸의 중개로 만나게 된 둘.
제국의 3기사 유르게나 디 벤타와 가주 에녹 스카디의 거래는 간단했다.
유르게나는 자신의 비전 검법을 에녹 스카디에게 가르치고.
에녹 스카디는 그 대가로 처인 쥬아나 브라이트의 신병을 넘기고 일어날 상황에 협력하고 묵과할 것.
그 자리에서 에녹 스카디는 고민도 하지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브라이트 가에 무슨 짓을 하려는건지도 묻지 않았다.
에녹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그들의 목적은 단순했다.
목표는 브라이트가의 아티펙트.
브라이트 가의 가주가 대대로 이어받는 아티펙트는 귀속의 성질을 가진다.
그렇기에 소유자가 죽어서 주인이 바뀌지 않으면 사용할 방법이 없다.
네마 나타스는 에녹 스카디와 거래 없이 가문을 급습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역시 그건 좋지 않았다.
물건이 존재하는 건 확실한데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브라이트가의 가주는 고문으로 입을 열만 한 인물도 아니었다. 힘없는 가문임에도 굽히지 않는 기개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이트라는 이름값을 하는 인물로 흑마법사와는 성향상 완전히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
아예 다 밀어 두고 브라이트 가문을 여유롭게 뒤집으며 조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일이 터지며 일어난 게 지금 상황.
권력층에 뿌리를 박아둔 네마 나타스의 방식이다.
'지금 제국이 좀먹는 건 알 바가 아니야.'
계약서를 본 리케가 지금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은 단 하나.
자신의 아버지가 검법 하나에 어머니와 브라이트 가문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이다.
-
뚝-뚝-뚝-
리케가 불이 꺼진 기숙사 복도를 걸을 때마다 빗물이 떨어졌다.
그림자가 진 서늘한 눈과 굳게 닫힌 입술이 그녀의 기분을 말해준다.
지금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내가 나에게 약속했던 것.
선과 악을 떠나서 관계된 자는 모두 죽이겠다는 마음.
다짐했잖아.
'절대 예외는 없다.'
내가 그날 다짐했던 건 어린 날의 치기도 아니고 가벼운 마음도 아니었다.
-
끼이익-
복도를 지나 기숙사 방에 돌아온 리케는 구석에 박아뒀던 고풍스러운 문양이 그려진 상자를 꺼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고도 짐을 정리하지 않아서 아직도 풀지 않은 상자가 가득했다.
리케는 상자를 들고 와 책상에 앉았다.
딸깍.
먼지가 쌓인 상자를 열면 안에는 영롱한 빛이 나선으로 회전하고 있는 구슬이 있다.
서로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아티펙트.
제국 전체를 봐도 장거리 연락을 할 수 있는 수단은 무척이나 귀하다.
명망 높은 귀족 가문도 이걸 가지고 있는 곳은 손에 꼽는다.
연락이 가능한 아티팩트는 모두가 탐낼만한 물건인 게 확실하지만.
리케가 이걸 마지막으로 사용한 건 어머니가 있을 때였다.
가문의 사용인들이 억지로 포장해서 짐에 챙겨 넣었을 뿐 리케는 이걸 사용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영롱한 구슬을 스카디 후작가의 패에 접촉시킨다.
나선으로 돌아가던 빛이 반대로 돌아간다.
핏!
빛이 중앙에 모여들었다.
"아버지···"
<< 스카디 후작가의 영애가 이제 기본적인 예법도 잊은 건가. >>
귀찮다는 게 티가 나는 차가운 목소리.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닌데도 감정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용건만 간단히 하도록. >>
전신의 감각이 비명을 지른다.
물어보면 안 된다.
하지만 알고 싶다.
정말 만일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를 사랑하시나요?"
<< 허··! 그딴 질문을 하는 의미를 모르겠군. 또 그놈의 지긋지긋한 정신병이 도진게냐? >>
리케가 빛이 흐르는 구슬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아버지···단 한 번만 말해주세요. 저는 아니라도··· 어머니를 사랑하셨나요?"
<< ···아직도 과거에 붙들려서 후작가의 위상을 깎아먹고 있군. 스카디의 피를 이어받고 왜 그리 나약한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어. >>
리케의 눈에서 실핏줄이 끓어올랐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신념이라고 매번 교육하셨던 게 있죠."
뒤에 있는 자를 돌아보지 마라.
옆에서 같이 걷는 자들이 앞서 가지 못하도록 경계하라.
앞에 있는 자가 뒤를 보게 만들어라.
<<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군.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은 무엇이지? 실망을 떠나 짜증이 나는구나. >>
아티팩트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려왔다.
격양된 감정을 타고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아버지가 말하는 신념은 귀족다운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변명거리일 뿐입니다!!"
<< ···감히 가주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이년이 미쳤구나!!! 가문의 불량품이···지금 당장 아카데미를 그만두·· >>
"결심이 섰습니다. 저는 오늘처럼 제 피가 저주스러운 적이 없습니다··· 다음에는···다음에는···"
쩌적-!
리케의 마나에 빛을 내던 구슬이 갈라졌다.
"죽여버리겠··· 허억- 허억-··!"
리케는 반으로 서슴없이 갈라지는 마음에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가슴을 움켜잡았다.
한 손을 겨우 뻗어 유일하게 꺼내져 있던 책을 잡고 품에 껴안았다.
"하윽- 엄마···."
스카디의 피를 이은 자신의 육체가 더없이 혐오스러우면서 어머니의 피를 받은 자신이 소중했다.
삶이- 자신의 인생이- 지금 이 공간이- 숨을 쉬는 한 순간이 너무나 공허하다.
어째서 세상은 이리 잔혹하고 한 점의 자비조차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