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 정사의 균열 -1-
[ 도서관 내부공사 완료 안내 ]
다음 주부터는 도서관 사용이 가능하다는 게시물이다.
에피소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을 본 나는 바로 도서관 건물로 향했다.
도서관은 청소부와 관리인들로 아주 번잡했다.
"이번에 오셨다는 교관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도서관장님."
도서관장은 지긋한 노인이었다.
게임이 아니라 실제로 보니 학장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인다.
"흘흘ㅡ 그 유명한 교관님이 저를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카데미에서 도서관을 관리하시는 분인데 모를 수 있겠습니까."
아카데미 물에서 '도서관'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긴 한가.
이 클리셰는 '아카라이트'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것 참···이야기는 들었지만. 독특하신 분이군요. 모험가답지 않다고 할지··· 아! 결코 나쁜뜻은 아닙니다!"
도서관장은 자신의 발언에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자주 들으니 신경쓰지 않습니다. 혹시 도서관을 지금 볼 수는 없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마지막 공사와 청소가 끝나지 않아서 불가능합니다."
한권만 빠르게 빌리고 나온다고 말해봐도.
도서관장은 대쪽같이 안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내부에는 수 많은 금서와 복잡한 보안 마법이 있으니 그것들을 손 보느라 정신이 없는듯 했다.
'역시 편법은 쉽게 안되나.'
슬쩍 봐도 몇몇 청소부들에게서 마나가 느껴진다.
나름 위장이겠지만 티가 난다.
"그럼 다음에 열리면 오도록 하겠습니다."
"준비가 끝났을때 오시는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일이 터지기 전에 물건을 회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들어갈 수 없다.
나는 아쉬움에 도서관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아카데미에서 빠져나갔다.
****
리케는 기숙사에 앉아 검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무언가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다.
( 여기까지 쉽지 않았겠지. 틀리지 않았으니 이대로만 해라. )
자신은 그냥 느낄 수 있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강자에게 처음으로 인정 받았다.
정신나간 광인처럼 보냈던 시간이 쓸모없지 않다고.
순수하게 기쁘다.
당장 그놈들의 목을 잘라내는데 한발 가까워진것이다.
-똑똑똑
'누구?'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결국 검을 다시 집안에 넣어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목재 문고리를 꾹 눌러서 열었더니 붉은색 머리카락이 흔들흔들 거리고 있다.
고양이를 유혹하는 장난감 같은 움직임이다.
고개를 살짝 내리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아마도 같은 학부의 생도.
"저~ 바로 옆방인데 인사라도 하려고 왔어요!"
"아···네··."
빨간머리 소녀가 있는 방은 이 복도의 끝이다.
바로 옆이라 해봐야 내가 유일하다.
'수업때 내 이름을 못들었나?'
아직 나를 모르는듯 하지만 내 이름을 들으면 물러날 일이다.
리케는 오랜만에 하는 타인과의 대화에 목을 조금 가듬고 입을 열었다.
상대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는 그림도 예상했다.
"리케··스카디입니다."
"저는 세리아 엘렉트라 입니다!"
'···?'
도망가기는 커녕 드레스를 입은듯 꾸벅 인사하며 장난스럽게 다가온다.
이런적은 처음이라 대응하기 곤란했다.
"바쁘지 않으면 저랑 저녁이라도 먹어요! 3년간 볼 사이니 얼른 친해져야죠!"
"····"
-
리케는 방에서 정말 극도로 배고픔이 찾아오면 기숙사 현관에 비치된 우유와 빵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절약정신이 아니라 그냥 식욕이 없었다.
살기위한 행위.
식사에 그 이상 의미는 없다.
수도에 와서도 마차를 타고 기숙사에 스트레이트로 들어왔기에 식사 등의 명목으로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다.
"저번에 여기에 언니랑 왔었는데 좋은 가게였어요! 제가 찾아갔으니 밥은 살게요!"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세리아에게 뭐라 말도 못한채 리케는 밖으로 끌려나왔다.
어영부영 그녀를 따라 가게에 들어온 리케는 스프 하나만 주문하고 입을 닫았다.
"진짜 그걸로 충분해요? 밤에 배고플텐데."
"괜찮아요···."
세리아는 그런 리케를 보다가 포크를 들어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회전시켰다.
귀족의 식사법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행동이었다.
"사실 훈련하고 잠이나 잘까 했는데. 오늘은 가만히 있기가 힘들어서 찾아갔어요."
"뭔가···너무 큰 벽을 본 느낌이라. 같은걸 겪은 사람은 이 마음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해서요. 하하 ㅡ···하아."
세리아는 힘빠진 얼굴로 웃다가 한숨으로 끝을 냈다.
리케는 다른건 몰라도 그 말만은 이해할 수 있다.
이때는 맞장구를 치면 되나?
처음 보는 사람과, 그것도 비슷한 나이대와 말을 하는게 너무 오랜만이라 쉽지않았다.
"무리해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가 말이 엄청 많거든요."
세리아는 입술을 우물거리는 리케의 그릇에 자그마한 빵을 올려줬다.
"저희 일단 말부터 편하게 할까요? 아카데미 생도끼리는 위아래 없이 똑같고 나이도 동갑이잖아요."
실제 생도 사이에는 거스를 수 없는 고하가 존재하지만, 활자로는 귀족이나 평민이나 모두가 평등하다고 언급한다.
리케가 고민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세리아는 건치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때마침 요리가 나오고 따끈따근한 스프가 리케의 앞에 놓였다.
"···잘먹을게요."
"아아! 바로 방금 말 놓기로 했으면서."
"으으음··· 자,잘먹을게?"
그제야 만족했다는듯 세리아도 수저를 들었다.
세리아는 리케에게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한탄하듯 풀어내며 식사를 한다.
리케도 생각보다 이 자리가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예법이나 형식도 없고 대답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세리아는 눈치 하나로 자신이 불편할법 한 주제를 모두 피해갔다.
달그락ㅡ
메뉴 자체가 저녁이라 하기엔 가벼우니 식사자리는 길지 않았다.
세리아는 원래부터 먹는 속도가 빠른 편이니, 스프만 주문하고 느릿하게 먹는 리케와 시간상으로 큰 차이가 없다.
가게에서 나온 세리아가 아직 해가 떠있는 하늘을 보며 고민하다 말했다.
"우리 나온김에 모험가 길드나 견학 해볼까? 리케가 괜찮다면!"
리케는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녀가 모험가에 얼마나 큰 흥미를 가진지 짐작할 수 있다.
세리아는 졸업과 동시에 수도에서 모험가를 하거나 경력을 쌓아 모험가 지부를 관리하는 일도 생각하고 있는듯 하다.
당장 아카데미가 아닌 실전에서 뛰고 싶어했지만.
혹시나 생각이 바뀌어서 모험가에서 관리직을 지원하려면 아카데미는 나오는게 좋다고 한다.
모험가 혹은 관리직까지 노리는 세리아의 1차적 목표는 언니처럼 자신의 작위와 성을 버리는 것.
'성을···.'
리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벌써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세리아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당장 내일도 다음 주도 모르는 자신과는 다르다.
"가보자. 나도 궁금한게 있어서··"
"오우!"
정사에서는 엮이지 않는 둘이다.
새로운 수업. 새로운 교관.
그리고 많은 인과관계와 어떤 마도구로도 구현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
그것들이 정사에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이러니깐 모험가가 돌머리에 천박하고 더럽다 라는 말을 듣는거다."
나는 모험가 길드 지하에 있는 선술집에서 에일을 마시며 길드 평판을 깎아먹는 것들을 계몽 시키고 있다.
-저새끼 또 지랄이네··.
-누가 릴리네 좀 불러와!
-의뢰 나갔는데?
-아 니미.
··
"어디가서 리자드맨이 꼴린다는 이야기를 할거면 제발 모험가 증표는 빼고 말하란 말이다! 차라리 용인족이 꼴린다 하면 이해라도 하지."
모험가 중 한 파티가 수도 광장에서 리자드맨에 박아보고싶다, 꼴린다며 동료들과 큰 소리로 음담패설을 했다고 길드 접수원짱에게 민원이 들어간 것이다.
나는 옆에서 그걸 듣고 쪽팔림에 얼굴을 가려버렸다.
"로만. 자유를 숭배하는 모험가인 이 몸은 지금 이야기를 쉽게 넘어갈 수 없겠는데."
"정신나간 애꾸새끼. 한판 하자는 거 맞겠지?"
"워워ㅡ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백금 바로 아래 청금의 모험가 노팅엄 그린힐.
눈이 하나 없지만 백발백중 사수로 파티를 수호하며 이름을 떨치고 있는 남자다.
그는 자신의 테이블에 놓인 와인병을 잡아서 마이크마냥 사용했다.
"제군들!! 자신의 성벽에 솔직하지 못하고 부끄러워 한다면 그게 자유를 최고 가치로 삼는 모험가라 할 수 있는가!"
-옳소!!
-역시 배운놈은 다르구만.
-출신이 중요하긴 한가벼.
-나도 리자드맨이 가끔은 생각난단 말이다!!
-방금 누구냐?
-····
··
모험가들의 선술집.
갱생이 불가능한 머저리들을 한번 쓱 둘러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갱생이 불가능한건 이 애꾸도 마찬가지다.
유부녀가 아니라 그 한단계 넘어 미망인만 들쑤시고 다니는 정신병자다.
"역시 미망인 취향의 미친놈은 말하는 뽄새부터 다르군."
"쯧쯧- 처녀를 선호하는건 진정한 여자의 맛을 모르는 애송이다. 소유욕에 물든 어린 시절의 환상이지."
"오케이! 이해했다. 죽여달란 말이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노팅엄이 허리에 걸린 쇠뇌 한쌍을 뽑아들었다.
술을 그만큼 마셨음에도 나를 노리는 손에 잔떨림 하나 없는게 청금은 폼이 아니었다.
-저,저것들 또 싸운다!!!
-또 터졌다 니미!!!
-미친놈들아! 빨리 말려!!
-중간에 끼면 죽는다! 다 올라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모험가들이 자리를 비우고 지하에 남은건 우리 둘이었다.
"내가 이기면 메이드복에 가터벨트로 다리와 엉덩이 라인을 뽐내는 처녀가 최강이라고 평생 인정해라."
"크크큭- 힘만 쌘 꼬맹이 같으니. 미망인의 농익은 맛을 본다면 그딴 시각적인 쾌락에서 벗어나게 될거다."
"기절시킨 다음 유니콘의 피로 목욕을 시켜주지."
유니콘의 피를 마시면 여러가지 이점이 많지만 커다란 단점이 있다.
처녀 혹은 자신이 처녀를 취한 상대가 아니면 성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것때문에 자신이 설거지를 했다는걸 깨닫고 자살해버린 기사나 모험가들 때문에 사회문제가 일어난적도 있다.
바이콘은 이 경우와 정 반대다.
그 사실을 당연하게 알고있는 노팅엄이기에 모욕을 참지않고 쇠뇌를 망설임 없이 당겼다.
자신을 거세시키겠다는 발언이나 다름없기에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로마아아안!!!!"
투다다다다ㅡ!
쇠뇌가 불을 뿜으며 한순간에 수발의 살을 뿜어냈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속사는 경지에 도달해있었다.
전투스킬을 전부 OFF로 돌리고, 테이블을 발로 차 방패로 삼는다.
파바박!
화살이 테이블에 박혀들었다.
모험가 끼리 사사로운 싸움에서 마나를 사용하는 건 절대 금지.
스킬도 당연히 금지다.
모험가는 존심과 억지 빼면 시체다.
매번 시덥잖은 말싸움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쌈박질을 하니 길드에서 아예 규율을 간단하게 정한것이다.
<< 이긴 놈 말이 진리. 진 놈은 반박 금지. >>
내가 이기면 노팅엄이 틀리고 내 말이 맞는것이다.
나는 순수한 완력만으로 테이블을 번쩍 들어 노팅엄에게 내던졌다.
"죽어 씹새야!!"
-
그 사이 윗층에서는 리케와 세리아가 모험가 길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엑-! 술냄새!"
세리아는 들어오자마자 코를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