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 오리엔테이션 -3-
소녀는 아카데미에 오기 전까지 어떤 생활을 했는가.
아버지와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시종들은 그녀가 말라죽는걸 보고있지 않았다.
자신의 방에서 한걸음도 나오지 않는 그녀를 위해 방문 앞에 식사를 두고 가는게 최선이었다.
-
공허한 시간이다.
이제 검술 수업도 받지 않고 공부도 그만뒀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게 전부다.
슬퍼서 가슴이 아려왔던 연애소설을 읽어도 이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때 알게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품은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있으면 그 감정이 미친듯이 부풀어 올라 원치 않은 불청객이 들이닥친다.
무저갱과 같은 우울감.
그날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를 되돌아보는 무력감.
어머니가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두려운 미래.
도저히 자신의 살점을 파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온다.
'가능과 불가능의 여부가 중요한게 아니야···.'
침대보를 잡고 질질 짜고있어도 변하는건 없다.
어머니가 느꼈을 괴로움, 절망을 다 알수는 없겠지만.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에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
누명이든 어머니가 진짜 흑마법을 익혔든 사실 여부는 관계없다.
선악의 경계선을 벗어나 관련된 자들은 다 죽여버리겠다는 일념 딱 하나.
스릉ㅡ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수업에 사용하던 검을 뽑아들었다.
두꺼운 커튼에 가려져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무작정 몸을 움직였다.
중요하다는 연공법?
배우다 말았다.
나는 제대로 알고있는게 하나도 없다.
묵직한 검을 들어서 그냥 베고 찌른다.
머리에서 아무 생각도 나지않고 쓰러져서 잠이 들때까지.
좌로 베고 아래에서 올려 벤다.
허공을 찌른다.
찢어진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카페트를 가득 적시고 검게 굳을때까지.
****
"리케 스카디입니다···."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이름을 뱉는다.
쿠구구구-
그녀가 검을 뽑는 순간에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살기가 나에게 향했다.
나를 무언가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질척한 점성을 가진 어두운 감정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온다.
'복수심···실제로 보니 딱하기도 하네.'
지금까지 혼자 최선을 다했지만 가지고 있는 전부를 부딪혀 볼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또각- 또각-
다른 생도처럼 거리를 좁히기 위한 돌격은 없었다.
리케가 검을 들고 나에게 한발한발 걸어온다.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해온 것들 그대로.
그녀는 검을 휘두른다.
-
얼마만일까.
생물을 해하기 위한 행위에서 순수하다는 감정이 느껴진다.
그릇도 이루지 못한 조잡한 신체강화.
단순하고 솔직한 검의 궤적.
하지만 그 모든걸 무시하는.
'엄청난 집중력.'
한번도 깜빡이지 않는 시선이 날카로운 송곳같다.
검법에 볼품 따윈 전혀 없지만 나는 알 수 있다.
나이기에 알 수 있다.
그녀가 쌓아온 시간을.
****
로버트는 막심에게 찢어진 입 안을 치료받으며 검을 휘두르는 리케를 응시했다.
자신에 비견하면 속도도 빠르지 않고 정직했다.
저 정도로는 택도 없겠지.
"쓰읍···."
아직도 어금니가 흔들거리는것 같다.
'스킬만 사용할 수 있어도···.'
자만이 아니라, 나는 특별하다.
빙의자가 특별하지 않다면 도대체 세상 무엇이 특별한가.
언제나 나를 위한 행운이 곁에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필기는 공부하지 않고 찍어도 상위권이고 스킬 하나만 있으면 나를 가르치러 온 기사도 이길 수 있다.
내 스킬도 이겨내지 못하는 기사들에게 뭘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선택받았다.
범인(凡人)은 모든 시간을 버리면서 평생을 노력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꽈악.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방금 추태를 여자들이 봤다 생각하니 짜증이 절로 차오른다.
'리케···'
평범한 사람이었던 내가 영문도 모르고 어린아이 몸에 빙의 당했을때.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와의 혼담이 진행되었다.
세간에 흔히 '개연성'이라는 얼굴을 써먹으며 즐기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살아생전 여자와 엮인 기억이 없으니 이건 행운이라 생각했다.
'미인이면 클때까지 좀 기다려 주자.'
전생부터 내가 금사빠 기질이 있긴했지만.
어린 소녀를 보고 한눈에 반할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세상에 절대란건 없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인형 같았다.
그녀는 깨지기 직전의 유리와 같이 섬세했지만 흠이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귀족의 예와 권위가 있으려고 노력했다.
'가지고 싶다.'
보기만해도 알 수 있다.
저건 당첨된 1등 로또였다.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이 세상에서.
내 첫번째 하렘의 자리는 무조건 그녀를 앉히겠노라고.
몇번의 대화를 나누니 재미없는 주제에도 카나리아처럼 재잘거리는 그녀에게 마음까지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에 스카디 후작가와 장모가 될 집안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땐 놀람도 잠시,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이건 절대 나쁜 짓이 아니다.'
귀족 사회의 혼인은 대부분 각자 집안의 권위에 따라 가정의 분위기도 이루어진다.
그녀가 추락할수록 나의 입지는 커진다.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내 입맛대로 모든걸 할 수 있는 기회.
처음으로 부모 아닌 부모들에게 억지를 부려 약혼까지 이어갔다.
그 이후로 기회가 생기지 않았지만 운명처럼 우리는 아카데미에서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교단으로 가면 그 흉한 상처를 내가 지워줄 수 있다고.
다가가서 괜찮냐고 보듬어주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 다가갈 수 없었다.
내 이미지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이때까지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첫발을 잘못 디디면 모든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다들 내가 하는 말을 당연하게 믿을때 까지만···.'
다행히 나 이외에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는 없었다.
그러니 천천히 접근해도 괜찮을거다.
지금은 그것보다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른 인간을 어떻게 할지다.
'천한 모험가놈이···.'
****
쨍-!
검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 벽에 박혔다.
그녀는 검을 놓치고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바짝 세워 내 눈을 노렸다.
'써밍! 이건 제법인데.'
월등한 실력차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
의외의 공격.
급소를 노리는 것이다.
뚜둑ㅡ
내 손바닥에 막힌 그녀의 손가락이 좋지않은 방향으로 꺾였다.
통증에 무감한지 그녀는 그걸 빤히 보고 있었다.
"검을 들었을때 패턴이 단조롭다. 마나의 순환이 엉망이다. 배분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균형 자체가 어색하다. "
"····"
나는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량의 마나를 사용했다. 소리가 밖으로 부서져서 나가도록 망을 만들었다.
밖에서 들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것이다.
"하지만···훌륭하군."
"···?"
그녀는 내 평가를 멍하니 듣다가 마지막 말에 드디어 나를 봤다.
아까까지 시선은 나를 보면서도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또렷하게 나를 보고있다.
"베고 찌른다. 그 정석을 이렇게 깔끔하게 다루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알고있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쉽지 않았겠지. 틀리지 않았으니 이대로만 해라."
"····"
"멀뚱멀뚱 서 있지말고. 가서 치료부터 받아."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는듯 완전히 꺾인 손가락을 한번 봤다가 막심에게 향했다.
마지막 환자인 리케의 치료가 끝났다.
생도들이 처음 왔을때의 줄로 우르르 돌아갔다.
"오늘은 수업 첫날이니 여기까지 한다. 이의제기를 하든 나한테 암살자를 보내든 그건 자유다."
나를 보는 몇몇의 눈에 적개심이 가득했다.
만인의 위에 서는 강자를 꿈꾸지만 이렇게 맞아본게 처음인 녀석도 있을 것이다.
"다음 수업은 더 힘들거다. 그리고 날이 지날수록 강도는 더욱 강해지겠지. 그게 싫고 짜증난다면 방법이 몇가지 있다."
"첫번째는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두번째는 자신의 처지를 납득하고 참고 견디며 적응하는 것. 마지막 세번째는 교관을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죽이는 거다."
"대련을 하면서 나는 힘조절에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생도들이 죽을 일은 절대 없다고 장담하지."
"하지만 생도들은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없다. 나를 죽일 정도의 유망주가 등장한다면 황제 폐하도 기뻐하지 않겠는가. 실로 제국의 홍복이다."
자만도 농담도 아니다.
의뢰로 황제를 몇번 대면한 적이 있기에 알수있다.
그 할아범이라면 나를 죽인 생도가 등장하는 순간 껄껄 웃으며 모든걸 밀어줄것이다.
"이상. 인사는 필요없으니 해산!"
어정쩡하게 서로 눈치를 보던 생도가 빠르게 흩어진다.
-
나는 뒤에서 쉬고 있는 막심에게 다가갔다.
"고생하셨습니다. 사제님."
"허허- 교관님이 고생했지요. 저야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았습니다."
"옛날에는 확실히 이런 방식에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학부모들이 극성맞아지면서 아카데미 수업이 단조롭고 인맥형성에 가까워진 것이지.
로랜드와 도란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것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학장과 노기사이기에 교육 초안에 거친 방법이 들어간것이다.
이번 사건이 어떻게 보면 교육기관으로서 재차 기강을 잡을 기회였다.
"그렇죠. 교단에서 만든 교육기관에서는 이것과 비슷하게 진행합니다."
"오오··."
사제가 널려있으니 가능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교단의 대부분 인원은 전쟁 고아나 계시를 받은 자다.
밖에서 터치하거나 왈가왈부하는 인원도 적을터.
일이 터지고도 변화없이 아카데미를 운영했다면.
세대교체가 몇번 일어나고 교단의 성기사들이 제국 최고가 되지 않았을까.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사제님. 다음 수업에 뵙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끝내고 나는 마지막으로 체육관에서 나왔다.
당장 집에 가기 전.
나는 개학날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에서 나가기 전 중앙현관에 있는 게시판으로 향했다.
소식이 언제 오나 했는데 드디어 반응이 왔다.
[ 도서관 내부공사 완료 안내 ]
첫 에피소드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