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입학식 -2-
사실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혼자서 다니지 않으면 움직임이 제약이 되는 면도 있고, 릴리네가 생각보다 시선을 끈다는 게 문제다.
'경비들이 그래도 기본은 하네'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가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고 상시로 경비병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부행사를 공개행사로 전향하면서 보안에 상당히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하긴 자칭 푸른 피들이 이만큼 몰려있는 경우는 연회나 국경행사 말고는 드물다.
혹시 사고를 치려는 자가 있다면 지금이 적기이기도 하다.
입학식이 중간정도는 진행된 건지 바깥까지 들리던 음악소리가 이제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북적한 대강당에 나는 느긋하게 입장하여 제일 높은 층으로 향했다.
<ㅡ하여!! 이번 생도들에게 거는 기대가 정말 큽니다! 다시는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획기적인 수업을 구상했으며···>
듣고 있으니 이게 지금 입학식인지 연설회인지 모를 정도다.
도란은 왼손으로 단상을 치며 호통에 가까운 훈화를 하고 있다.
냉정하고 말을 아낀다는 설정은 어디로 간 건지, 내 눈에는 속에 쌓아둔 울분을 토하는 걸로 보인다.
나는 이마에 핏줄이 불뚝 솟은 도란을 외면하고 입학생들을 빠르게 훑었다.
머리색부터 눈동자의 색까지 전생과 달리 형형색색으로 개성이 넘친다.
'저기 있군.'
로버트 볼트.
볼트 후작가의 장남이자 훤칠한 노란 머리의 미남. 게이머들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게임에서 선택지가 대부분 내로남불의 성향이 강해 제작한 개발자들의 성향까지 의심되게 하는 녀석이었다.
나도 다른 플레이어블이 나오기를 항상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정보길드의 소식대로 기사학부를 선택했는지 주위에 같이 서있는 인물도 제법 눈에 익어있다.
어딜 가도 보기 힘든 수준의 미인들이 히로인을 자처하며 주인공 주위에 돌멩이처럼 뿌려져 있지만 내 관심은 다른 쪽이다.
새록새록 머리에 떠오르는 일러스트.
주인공의 아련한 시선을 따라가면ㅡ.
빙의한 한국인의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있다.
'리케 스카디··.'
어릴 때 로버트와 리케의 부모님들이 구두로 약혼했지만.
코흘리개 시절에 약혼을 한 직후 그녀의 집안이 뒤집어졌으니 주인공도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상황일 것이다.
현재까지 명목뿐인 약혼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주인공의 고집이었다.
'이쁘긴 해.'
그녀의 상태는 척 봐도 멀쩡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히로인이 가진 미모를 잃은 건 아니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자수정 같은 자안(紫眼).
하지만 표정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고 눈도 거무죽죽하니 빛을 잃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주시하게 하는 것은 얼굴에 있는 긴 상처.
귀족가의 영애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십자 모양으로 긁고 지나간 자상이 얼굴에 자리하고 있다.
외모는 뛰어나지만 사연 많아 보이는 분위기와 어지간한 모험가 쌈 싸 먹는 상처에 그녀에게 접근하거나 대화를 시도하는 생도는 없다.
그녀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서 아는 사람들은 애초에 다가가지 않았고.
오히려 달라붙어서 이름을 들었다면 더 놀라서 도망갔을 터.
'서 있는 줄을 보면 역시 검술학부인가.'
모든 게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 공존하고 있다. 불길한 가정들에 막혀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
"세리아~~! 여기! 여기야!"
수많은 목소리를 뚫고 내 귀에 릴리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정 반대편에 앉아있는 그녀는 손을 마구 흔들며 누군가의 시선을 끌어내고 있다.
'···저게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자랑 한 소문의 막내란 말이지.'
릴리네의 머리색이 연한 분홍에 가깝다면 막내는 진한 붉은색에 가깝다.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포근함이 느껴지는 릴리네와 달리 세리아라는 소녀는 눈매가 올라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눈은 또 연두색인 언니에 비해 진한 녹색이라 붉은 머리와 합쳐져 잘 익은 사과처럼 보인다.
그리고 제일 예상 밖인 건 검술학부에 서 있다는 것이다.
시선에 보이는 정보들이 마법사인 릴리네와 완전히 반대 성향이다.
눈을 자꾸 힐끔거리며 릴리네의 방향을 보는 것이 둘 사이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작게 손동작까지 주고받는 걸 보니 보는 내가 흐뭇할 정도다.
'게임에서는 본 기억이 없는데···.'
어쩌면 주인공이 본의 아닌 사고를 치면서 쓸려나가는 생도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있는 이상 어이없게 죽는 일은 없게 해야 한다.
< ··ㅡ제가 발로 뛴 결과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었기에 설명과 함께 유형적인 동의를 얻어 황제폐하께 로프티 아카데미의 최소한의 충의를 보이고자 합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도란은 감정이 흐트러진 것 같으면서도 말 중간중간에 황실 방패를 세워 '이거 동의 안 하면 알지?'를 몰아가고 있다.
역시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내 수업은 사건을 터트린 기사학부는 필수. 검술학부는 선택으로 개설될 예정이다.
100회째 기사학부 생도들이 내 수업을 안 듣는다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고, 만약 동의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아카데미에서 나가야 한다.
경험도 안 해보고 도망갈 인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사학부 생도들에겐 그야말로 외통수인 상황.
< 기사학부 생도들은 다음 주에 첫 수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꼭 동의서를 제출해 주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이제 할 말은 다 한 건지 학장이 단상에서 내려가고 교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올라와 남은 절차를 진행했다.
나는 돌아가는 길이 인파로 번잡해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강당에서 나왔다.
'다시 나오기 귀찮으니 저녁까지 사서 돌아갈까.'
여기서 판매하는 음식들은 가격대비 나쁘지 않은 퀄리티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다양한 메뉴를 가득 산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왔다.
-
다음 주 개학까지 토납법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나면 개학 전날 까지는 굶을 것이다.
마나를 보유한 자들은 초월적인 신체능력을 보유하고 필요한 칼로리도 늘어나지만, 역설적으로 밥과 물을 먹지 않아도 일반인 보다 오래 버틸 수 있다.
허기는 그대로 느끼지만 지금같이 느슨해진 정신을 다잡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
가끔 중요한 날을 두고 하는 방법이라 효과를 떠나 내 마음을 바로잡는 나만의 징크스이자 의식이기도 하다.
"후우ㅡ"
식사를 끝내고 샤워까지 깔끔히 마친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거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토납법은 그 자체만으로 많은 심력과 기력을 소모한다.
하루는 급속도로 배가 고파지기 시작하며 오히려 집중이 되지 않는다.
특수한 호흡법으로 정순한 마나를 순환시키고 자극한다.
허기를 초월하면 이걸 왜 하는가 싶은 짜증이 순간 일어나지만 이때를 잘 넘기는 게 중요하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신체의 대사활동을 넘어서면, 그때는 정말 머리에 잡음이 사라지고 텅- 비어버린다.
날카로운 신경이 내가 놓치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게 하고 평소보다 선명하게 과거를 관조할 수 있다.
오늘 입학식에 갔다가 '아카라이트'를 게임으로 즐겼던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주인공 그놈의 눈깔만 봐도 알 수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주위가 말려들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터트릴 것이다.
자신이 수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겠지.
게임에서야 스토리에 따라 진행하겠지만, 플레이어블이 아닌 '나'는 이 수도 안에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혹시나 지인이 말려들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다 잘라낼 것이다.
'살고 싶으면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할 거다.'
입학식 때 분위기를 보면 주인공 로버트는 당연하게 리케를 구하는 노선을 탈것 같다.
게임에선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이지만 내 직감과 분위기가 그런 느낌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리케를 놓칠 생각은 없다.
실존하는 그녀를 보는 순간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내가 이어지는 게 목표라기보단 주인공이랑 엮이는 걸 볼 생각이 없는 것이다.
여기 오기 전 게이머 시절에도 제일 선호했던 히로인이다.
관련 업적 100%에 DLC에 사운드트랙에 한정판 의상과 무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돈이 애정을 증명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무지했던 1회 차를 제외하고 그녀를 건너뛴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개인적인 지론이지만 '아카라이트'에서 히로인이 가지는 매력은 결코 외모만이 아니다.
완전해 보이는 외모와 넘치는 재능의 역반동으로 다가오는 '결핍'이야말로 그녀들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사회생활이 힘든 사람들, 가족과의 불화로 힘든 자,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게이머 등.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듯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 게임의 히로인들이 가지는 매력이었다.
그러다 보니 게이머들은 외모보다 자신들의 경험과 공감이 되는 히로인들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항상 망설임 없이 리케를 첫 픽으로 골랐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최대한 회전시켰다.
'어떻게든 내 수업을 듣게 해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부터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내가 전생에 그녀를 보고 얼마나 위안을 얻었나 실감해 버렸다.
느긋하게 계획을 세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리케는 게임에서도 1학기에 집중해서 케어하지 않으면 자퇴도 아니고 그냥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게임에서 확실한 언급은 하지 않지만, 후반부에 간접적인 묘사로 좋지 않은 선택을 했다는 건 알 수 있다.
'정 안된다 싶으면 그냥 원흉을 잡아서 목숨줄만 붙은 상태로 가져다주면 안 되나?'
두서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그녀가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정도는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끄으으으ㅡ"
장시간의 토납법(吐納法)이 끝나고 거울을 보니 눈 밑이 퀭하니 파여있었다.
허공에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진 공간에 손을 넣어 포션을 꺼낸 나는 뚜껑을 따서 붉은 액체를 한 번에 들이켰다.
활력이 몸에 차오르며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토납법으로 뭉쳐있는 근육을 풀어주면 금방 내일이 다가올 것이다.
드디어 아카데미 첫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