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불치하문 -2-
입학식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일.
내가 입학하는 것도 아닌데 기대가 된다.
기대감에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일.
잠입을 해야하는 타이밍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금방 가득차버렸다.
복잡해지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마당에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니 금방 해가 떨어져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저녁 뭐 먹지.'
하루 세끼 무엇을 먹어야할지.
백금급 의뢰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고민이었다.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식단을 매달 공표하면 좋을텐데.
집에서 나와 거리를 걸어도 막상 땡기는게 없다.
몇번이고 주위를 빙빙 돌다 집에 딸기잼이 조금 남아있다는걸 기억해낸 나는 겉이 돌처럼 단단한 바게트를 사서 집으로 느긋하게 돌아갔다.
"행복을~줄 수 없었어~"
이제는 들을 수 없는 가요를 흥얼거리며 걷는다.
나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시선에 들어오기 시작했을때 내 집 앞에 서있는 익숙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헤어밴드. 모험가 길드에 간판 접수원이었다.
'이야- 오늘 좀 풀리는 날인가?'
****
로랜드 볼프강.
키가 2m가 넘는 거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력의 소유자.
날카롭고 깔끔한 검술보다는 파괴적이고 저돌적인 검술과 마창술로 유명하다.
전장에서 살인전차라는 이명을 달고 살았으며 죽지않고 살아있는 기사들 중에는 최고참이라 볼 수 있다.
기사로 오랜 시간을 지내다가 현재는 은퇴하고 손자손녀에게 용돈을 주는 맛으로 인생을 살고있는 남자다.
'적당히 은퇴하고 집에서 술이나 퍼마시면 될것을···.'
오랜시간 알고 지냈지만 로랜드는 도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아카데미 학장자리에 그리 집착을 하는지, 미련한 아집에 참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죽고못사는 책이나 읽으며 노년을 보내면 되는데 아직도 학장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학장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보였다.
이대로 가면 친구가 죽을수도 있겠다 싶어 돕지 않을수가 없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개인실에 자리잡은 그는 음식이 아닌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진짜 이번만 도와준다. 망할놈.'
그는 품안에 있는 모험가패를 만지작 거렸다. 모험가 등급 중 제일 아랫등급의 동색이지만···.
-복수와 은혜는 어떻게든 갚는다···그게 내 신념이다. 이 패가 천금 이상의 가치를 지닐 것이라 약속할테니···딱 한번만 도와다오.
지금은 정말로 천금을 넘어서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로랜드는 그를 처음만난 몇년전의 일을 떠올렸다.
붉게 충혈되어 완전히 살(殺)이 차버린 눈동자.
그때도 깜냥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거물이 될 줄이야.
덜컥!
개인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기다리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귀찮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망할 노친네."
"잘 지내는것 같아 무엇보다 다행이군 로만. 와서 앉아라 식사부터 하지."
그 사건 이후로도 가끔 만나며 지내다 보니 허물없는 관계가 되었다.
로랜드도 자신을 이리 편하게 대하는 젊은 녀석을 만나는게 즐거웠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귀여운 접수원을 바쁘게 해?"
"크하하!! 역시 여자를 보내는게 정답이었군. 도대체 뭘 기대한거냐."
"쯧···앞으론 남자로 보내도 되니깐 외곽으로 여자 혼자 보내지마쇼.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역시 모험가라고 하기엔 도의가 있는 녀석이다.
도란은 직감 같은 불확실한 요소는 믿지 않는다 했지만 로랜드는 누구보다 자신의 직감을 믿는다.
'이 녀석은 곧 죽어도 약속을 지킨다.'
평소처럼 티격태격 식사를 끝내니 따뜻한 커피 한잔이 나오며 코스 요리의 끝을 알렸다.
"그래서··왜 불렀는지 이제 알려줄만 하지 않나?"
로만이 기다리다 지쳤는지 뜨거운 커피를 쭉 들이키더니 로랜드를 노려봤다.
"비싼 모험가를 두고 시간을 질질 끄는건 민폐겠지. 부탁할게 있다."
로랜드는 품안에서 만지작거리던 모험가 패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로만은 그걸 보는 표정을 굳히며 마나를 응용했다.
우우웅-
로만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객실 전체를 감쌌다.
소음을 차단하는 기교 중 하나였다.
평소의 거친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그가 자세를 바로 잡고 로랜드가 내민 패를 받았다.
"잊은건 아닌가 생각했는데···좋아. 뜬금없지만 모험가 패는 확실히 받았다. 황자를 죽이라 해도 죽여줄수있고, 제국에 숨어있는 흑마법사들을 잡아오라 해도 잡아주겠다."
"미친놈! 전자는 못 들은 것으로 하마··· 그런데 제국에 흑마법사가 있나?"
"내가 말해줄 이유는 없다. 단 하나만 들어줄테니 선택해라. 가능한건 뭐든 해주지."
언제나 입을 거칠게 놀리는 녀석이지만 하나하나가 정말 위험한 발언이었다.
문제는 그게 농담이 아니라 외면할 수 없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실 그리 대단한건 아니다 아니지, 그 '백금'을 이런 곳에 사용하는건 대단한 일인가?"
"···."
평소와 달리 '늙은 놈들은 말이 많다'고 태클도 걸지않고, 로만은 로랜드가 결론을 꺼낼때까지 기다렸다.
'완전히 용이 됐구만. 여신님도 무심하시지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로랜드는 완전히 기세가 잡힌 로만을 보며 그가 기사출신이 아니라 모험가라는게 한탄스러우면서도.
이 모험가가 연방국이 아닌 하룬 제국에 있는걸 다행으로 여겼다.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해줬으면 한다."
****
처음 로랜드가 모험가 패를 꺼냈을때.
아카데미 입학식을 가지 않을 것을 각오했다. 시기상으로 몇개의 히든 피스를 놓치더라도 약속은 약속이다.
모험가에게 신용의 문제는 목숨만큼 중요하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결론을 꺼내길 기다렸다.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해줬으면 한다."
"····!"
듣자말자 로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싶었다.
어디서 무슨 문제가 생겨서 인과율이 박살이 난건가. 왜 이런 결과에 도달했는지 모른다.
먼 옛날 로랜드에게 모험가 패를 준 것도 노리지 않은 우연의 이치였으니.
당연하지만 이걸 계산한 행위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협상의 테이블에서 감정을 표출하는건 삼류도 못되는 쭉정이나 할 짓.
나는 이를 악물고 표정을 유지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약속이자 은혜를 갚는 것이니 보수는 받지 않겠다."
"···저,정말인가? 받아줄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리 시원하니 좀 미안해지는데."
로랜드의 얼굴이 드물게도 순수한 놀라움을 품었다.
어차피 돈은 썩어난다.
쥐꼬리만한 교관의 월급을 받는것 보다, 로랜드에게 마음의 짐을 하나 올려두는게 이득이다.
"백금에 걸맞는 의뢰비를 계속해서 낸다면 아카데미라도 기둥이 뽑힐텐데?"
"그건 그렇지···그래서 이야기 하기를 망설인거다. 사실 시간이나 횟수로 조절하여 타협을 보려했지."
"대신 무보수로 일하는 만큼 시간적인 조건과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고 싶은데."
모험가 일도 가끔은 해야한다.
보통 장기적으로 실적이 끊어지면 모험가 등급이 강등 될 수도 있다.
백금에 한해서 그런 일은 없겠지만 가끔 얼굴은 보이는게 좋다.
'밖으로 나돌만한 명분도 된다.'
내가 투잡을 하면서 모험가를 이어가려는 이유는 히든 피스만이 아니다. 이 게임의 결말 이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한국으로 런을 하면 그 이후를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지 세상이 끝나는게 아니다.
나는 이 세계에 남아 살아갈 대책을 강구해야한다.
"조건이라ㅡ 그것 말인데·· 지금 다른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을거다."
"누구? 설마 아카데미 학장이?"
로랜드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고급 레스토랑 이었던 식사와 달리 학장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메뉴에 저렴한 안주가 가득한 선술집이었다.
북적거리는 내부를 지나 안쪽에 들어가니 독립적인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다.
부탁을 한건지 원래 이런 자리가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로랜드가 먼저 자리로 향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반갑소. 분에 넘치지만 로프티 아카데미의 학장직을 맡고있는 도란 에스카로요."
"반갑습니다. 모험가 로만입니다."
"일단 앉으시오."
도란은 로랜드와 완전히 정반대인 남자였다.
차분하면서도 목소리 볼륨이 적당했다.
외팔이에 벌써 적응한 것인지 왼팔을 능숙하게 사용하며 술을 따라냈다.
이미 학장의 팔이 잘렸다는건 골목골목 소문이 다 났기에 놀랄 것도 아니었다.
"럼주로 괜찮겠소? 무설탕이지만 버터를 사용해 향이 제법 좋은 녀석이라오."
그는 목재컵을 내게 건냈다.
"물론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거부 하는건 도리가 아니기에, 나는 럼주를 받아 자리에 두었다.
내가 입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로랜드는 도란에게 모험가 패를 제외하고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무보수로 해준다고 이야기가 나왔을땐 도란도 표정이 깨질뻔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도의적인 경우라 해도 무보수는 내가 허락할 수 없소. 모험가 길드에서 항의서신을 보낼게 뻔한 일이오."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패를 공짜로 아카데미가 부린다?
확실히 모험가 길드 입장에서도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 보조 교관의 월급만큼만 주면 됩니다. 제가 만족 할 만한 보수를 지급했다고 공표해주시죠.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어허!!!"
도란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곰 한마리가 선술집에 들어와 울부짖는 줄 알았다.
로랜드의 목청에 선술집에 있는 시선이 싹 모였다가 그의 덩치를 보고 금방 흩어졌다.
"야이 답답한 놈아. 이정도면 받아주고 여건을 최대한 신경써주면 될것 아닌가! 팔이 사라지면서 눈치도 사라진거냐?"
로랜드가 도란의 비어있는 소매를 잡고 좌우로 펄럭펄럭 흔들었다.
순간 짜증이 확 오른 도란은 로랜드를 쏘아붙이려다 로만이 보고있다는걸 알고 화를 참았다.
"흠흠···그럼 꼭 필요한 조건들 부터 정해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