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불치하문 -1-
오늘 산적들한테 피떡이 된 아카데미 생도들을 발치에서 구경했다.
나 말고도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인물들이 많았는지 여기저기 숨어있는 기척들이 많았다.
'병신들이 따로 없군. 기사 학부가 아니라 기사 호소인 수준이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상황을 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믿기지 않지만 나는 시작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있다. 그 두근거림이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다.
"이 다음이···."
나는 집에 앉아서 먼지가 잔뜩 쌓인 책을 꺼내 들었다.
히든피스 기록처럼 보안 마법과 보존마법이라도 걸어뒀어야 했는데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스토리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둔 것이라 조잡하기 그지없는 내용들이지만, 잠들어있던 기억을 자극하고 깨우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아카데미에서 새로운 교수진을 찾아 돌아다니려나."
결론은 정해져 있다.
명목을 위한 기사를 교관으로 내세운 뒤 실전에 뛰어난 모험가를 보조 교관으로 초빙한다.
보조 교관으로 선택되는 모험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외형은 기억한다.
붉은 수염을 가진 도끼쟁이였다.
'길드에서 그런 놈이 있었나? 누구지?'
남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살다 보니 길드에서 봤다고 확신은 하지 못한다.
머리색부터 수염이 붉은 녀석이 한둘이 아니기도 하고.
"아무나 가라~"
결국 기억해내도 쓸모없는 것이.
보조 교관의 역을 맡는 모험가도 100회째 입학 생도의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한 맥거핀이다.
쓸곳 없는 사항들 보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카데미에 어떻게 잠입할 것인가.'
이 세계의 토대를 이루는 '아카라이트'는 아카데미가 주축이 되는 세상이다.
주인공이 아카데미 3년 차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주 활동반경인 아카데미에 여러 가지 히든 피스가 존재하고 있다.
그 대부분이 내가 이때까지 찾아다닌 수도 밖에 존재하는 히든 피스보다 격이 높고 실용적인 것들이다.
'생도는 미친 짓이고.'
내가 생도로 입학한다? 나이가 이미 늦었기도 하고 혹시 들어가게 되면 최소 101회에 입학 하게 된다.
이미 주인공은 단물 다 빨아먹고 트름이나 하고있겠지.
주인공을 죽이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일단 그 사항은 보류다.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히든 피스에 대한 의문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공을 죽이는게 스위치가 되어서 히든 피스가 등장하지 않아도 곤란하다.
만약 죽이더라도.
그놈의 가문이 생각보다 대단한 물건을 보유해서 문제.
애초에 죽이려면 가문 자체를 깔끔하게 멸문시켜야 내가 안전하다.
"···골치 아프네."
책을 빙빙 돌리며 고민해도 역시 직접 잠입하는게 최선이다.
'이번 100회 입학식은 축제형식이라 했나···.'
이건 발을 넣어볼만한 좋은 기회였다.
*****
"농담을 할 만한 행색은 아니군. 슬픈 일이야."
학장실에 들어온 2m가 넘는 거구.
학장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비어버린 오른팔로 향하는걸 보고 눈가를 좁혔다.
"로랜드 입 조심해라. 목이 붙어있고 가족이 살아있는 것만 해도 황제 폐하의 은덕이다."
현재 제국에 있어 황실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아센 프리밀러가 황실을 지지하면서, 황권이 이정도로 강했던 시기가 없을 정도로 하늘에 비견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삼황자가 다쳤다?
아카데미가 폐지되고 연관된 자들의 혈족이 모두 형장의 이슬이 되어도 할말이 없다.
전 교관의 가족은 이미 사라졌겠지만 자신은 팔 하나를 등가교환하여 살아남았다.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자부한다.
"어이구- 그래서 무슨 일로 불렀는지나 말해봐라."
학장은 머리와 입에서 떠도는 단어들을 신중히 조합했다.
오랜 시간 알고지낸 친우라도 결국 기사출신이다.
혹시 그의 기분이 상한다면 다른 기사를 교관으로 초빙하는것도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번 사건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지?"
"들리는 소문은 알고있다. 그리고 황제 폐하가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도."
뻥 뚫린 아카데미 광장에서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했는데 모를리가 없지.
도란 에스카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행정관이 준비해둔 찻잔을 들었다.
"지금 여러가지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검술학부와 기사학부를 통합한다던가···."
제식과 예법 위주의 기사학부와 달리 실전 위주의 수업이 존재하는 검술학부와의 통합.
자칫하면 기사학부라는 명패가 사라질 수 있다.
도란은 말을 꺼내며 곁눈질로 로랜드의 얼굴을 보았으나 그의 얼굴에는 딱히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는 않은데 그게 원론적인 해결책이 되나?"
"기사 출신이면서 기사학부가 사라질수도 있는 이 사항을 긍정적으로 보는건가. 의외군··."
"하하하!! 이 속좁은 친구야!! 그렇게 실속실속 앵무새처럼 울어대더니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읽는건 재주가 없구만."
도란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평소라면 저 미치광이가 또 내 속을 긁는구나 하며 화를 냈겠지만.
초탈한 감정이 대부분인 지금 그의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지. 학부의 통합은 차후에 논의 될 사항이다. 일단은 새로운 교관은 기사에서 선정하여 기사학부의 불만을 줄이고- 보조교관으로 베테랑 모험가 하나를 초빙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지."
"학부 통합보다 확실한 방법이지. 그런데 모험가를 귀족들이 받아들일거라 생각하나? 당장 자네도 모험가를 천한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로랜드는 도란의 가치관을 완벽하게 꿰뚫고있다.
아마 본인보다 더 잘 알고있을터.
귀족의 선민의식을 가진채 마법사로 성공한 그다.
모험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있기에 이번 선택에 로랜드는 제법 놀랄수밖에 없다.
"···그 생각이 완전히 변한것은 아니나, 가치관이 조금 바뀌었다고만 말해두지. 불치하문(不恥下問)이다."
"팔 하나로 그만큼 배웠으면 너무 싼거 아닌가? 크흐흐."
이제서야 장난을 좀 쳐도 된다 생각했는지 로랜드는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저기에 답해주고 화내는건 그가 오히려 바라는 바.
도발을 무시로 일관한 도란은 왼손으로 서랍을 열어 종이뭉치를 꺼냈다.
"모험가라면 조금은 알고있겠지? 후보진이다. 한번은 나에게 도움이 되어봐라."
로랜드는 콧방귀를 뀌며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빠르게 종이를 넘기던 그는 한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여기선 그나마 이놈이군."
경력은 20년이 넘고 도끼라는 흔하지 않은 무기를 사용하는 모험가.
붉은색 수염이 시그니처로 자리잡은 남자였다.
솔로로 활동하는 모험가로 은등급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나마? 이정도면 부족함은 없어보인다만."
"다른 녀석들을 뽑을 수 없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나?"
"뭐가 문제지?"
로랜드는 자신의 백발을 뒤로 넘기며 스트레스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막대기를 연상캐하는 굵은 손가락으로 눈가를 꾸욱 눌렀다.
'이래서 마법사놈들은···.'
그는 손에 들고있던 나머지 종이들을 펼쳐보였다.
"여기! 이놈이 최고로 적합해 보이지만 아직 파티로 활동하고 있잖아!! 어떻게 빼올껀데? 그리고 억지로 빼오면 다른 놈들이 가만있을것 같아?"
급이 높은 모험가는 어지간한 귀족들도 함부로 할 수 없다.
평민들이 귀족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에는 모험가만큼 적합한게 없는 것이다.
거기에 파티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 돈을 주고 한명만 쏙 빼온다?
적게는 수년에서 많게는 십년이 넘게 붙어다녀 아교처럼 착 붙어있는 사이일텐데 한명을 빼내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그게 성공해도 문제다. 버려진 파티원들이 가만있을리가 없다.
모험가는 금등급만 되어도 어지간한 약소 귀족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자신들이 가진 무력의 가치가 어느정도인지 파악하고 있는것이다.
눈 돌아가서 사고 한번 거하게 치고 연방국으로 도망가면 잡을 방도도 없다.
로랜드의 침 튀기는 설명을 들은 도란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 솔로로 활동하는 요 시뻘건 녀석이 제격이라는 것인가···."
"이제 모험가들에 대해 이해가 좀 되나? 매일 책만 보더니 거기서 뭘 배우는거야."
"시끄럽다. 그럼 이녀석으로 하지, 바로 행정관한테 말해서ㅡ"
"잠깐!!!"
"또 뭐냐···."
학장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로랜드의 목청에 도란이 인상을 썼다.
"내가 진짜 쓸만한 모험가 하나를 소개해줄수 있다만? 후보 중에서 고르긴 했지만 이런 어설픈 놈을 쓰면 또 사고가 터질수도 있다고 본다 이 말이야."
"···."
"친구가 왼팔까지 날아가면 조금 슬플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징그러운 소리 하지말고 제대로 말해라. 원하는게 뭐지?"
로랜드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장식장 안에 있는 도란의 수집품을 가리켰다.
이제는 어디가도 구하기 힘든 값비싼 술들. 도란도 아까워서 마시지 않고 모으고만 있는 것들이었다.
"늙어 죽을때까지 저렇게 장식품으로 쓸 생각은 아니겠지? 나 혼자 마시지 않으마. 같이 마시는거다."
"····"
"다음에 왼팔이 아니라 목이 날아가면 저 술은 누가 마시려나~ 아니지, 왼팔이 날아가면 뚜껑도 못 열겠구나 크하하하!!!"
도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얼굴이 붉어졌다.
로랜드의 도발이 완벽하게 들어간 것.
"쓸만하다는 모험가가 누구인지 설명부터 해봐라.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네놈부터 당장 쫓아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