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 전조 -1-
흔히 소설이나 게임에 빙의당한 인물들은 주요 등장인물들과 엮이며 살아간다.
이런 경우는 모두 천운에 절여진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당장 내일도 모르는 게 사람의 인생인데, 세상의 전개를 안다는 건 삼라만상을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나는 그런 천운이니 행운이니 하는 단어와는 정반대 편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인생이 까만 후회로 점철되었던 나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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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눈을 뜨고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게임 속에 환생했다는 걸 바로 알았다.
빙의라 하기엔 얼굴이 전생과 같았기 때문이다.
소설 원작의 게임 [ 아카데미 : 빛의 구원자 ] 줄여서 '아카라이트'
한국인인 주인공이 귀족자제에 빙의하여 아카데미의 사건사고를 해결하는 스토리다.
제목과 내용만 봐도 주인공의 성장과 위기 극복용 히든 피스가 구석구석 산재하고 있는 게임이지만.
문제는 내가 태어났을 때는 주인공이고 히로인이고 누구도 태어나지 않은 게 문제였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로프티 아카데미의 100회째 입학생.
지금부터 성인이 되는 순간 입학하는 걸 계산해 보면···.
"하아···답이 없네."
나는 소설과 게임의 시작점에서 25년 전을 기점으로 눈을 떴다.
흔한 클리셰를 따라 삼류 악역 귀족에 빙의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어째서인지 가난한 농가의 자식으로.
귀족의 시점으로 플레이하던 게임에선 느낄 수 없는 농민들의 삶은 각박한 정도가 아니었다.
흉년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부모는 울면서 나와 옆집아이를 바꿔 먹으려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력으로 도망쳤고 한탄했다.
내가 꿈꾸던 판타지 세상은 분명 이런 게 아니었는데.
미래에 일어날 일도 알고 숨겨진 영약이나 아티팩트 같은 히든 피스를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혼자가 된 날부터 하루하루가 악몽 같은 전생을 떠올리게 했다.
지긋지긋한 전쟁용병 시절이 떠올랐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현재의 나를 살렸다.
어리숙한 신체여도 머리에 간직한 경험으로 메꾸며 살아간다.
산에서 살며 고블린과 영역다툼을 벌이고.
밤에는 옅은 잠을 자며 모닥불을 지켜야 했다.
계속해서 이동을 거듭하며 마을을 찾아 나섰다.
성공한 적은 없지만 마차가 있으면 태워달라 사정을 했고 비포장 도로가 나오면 머리를 비우고 며칠이고 걸었다.
수십 개의 마을을 전전하며 잡일부터 누구나 기피하는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일은 시키고 돈은 안 주려는 놈은 가만두지 않았다.
먹는 것도 최대한 아끼며 노숙을 거듭하여 돈을 한 푼 두 푼 모으니 한번 정도 목표를 위해 사용할만한 금액이 모였다.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눈여겨보고 있던 마을로 떠났다.
마을의 이름은 레드 마이어.
피존 블러드 같은 최고급 루비는 아니지만, 세공하는데 무리 없는 루비 광산이 발견되어 마을이라기엔 번성하고 도시라기엔 부족한 곳.
소설과 게임에서도 초반부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주인공이 처음 섭취하는 영약을 찾아 숲을 돌아다녔다.
워낙 작은 식물이라 바닥을 기어 다니며 눈이 빠져라 찾아다녔다.
무릎에서 피가 나고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관절이 아파왔다.
그 고난을 위에서 누군가 지켜본 건지.
나는 결실을 맺었다.
"씨바아아알!!!"
보는 순간 억하심정에 잠겨있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역한 맛이 도는 풀을 웃으며 씹어먹었다.
[ 신체능력이 상승합니다. ]
[ 화염에 대한 내성이 상승합니다. ]
못 먹고 성장하여 수수깡처럼 나약했던 몸에 활기가 돌았다.
급격하게 발달한 몸을 이용해 더욱 고강도 업무를 해나가니 자연스럽게 벌어들이는 재화도 늘었기에 틈이 날 때마다 히든 피스를 찾아 돌아다녔다.
첫 시작은 좋았지만 세상사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영약도 아티팩트도 열 번 떠나서 한 번이라도 있으면 성공이었다.
첫 시작에서 운 좋게 성공하지 않았다면 이미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자리를 지키지 않고 비어있는 히든 피스들의 이유는 높은 확률로 주인공이 에피소드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일터.
그럼에도 본신이 가진 힘이야말로 권리이자 인권인 이 세상에서 나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나이가 차올라 15살이 되었을 때 돈을 다 털어 수도에 상경해 모험가 길드에 소속되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치기 어린놈들은 많았다.
내 나이에 먹고 살 방법이 없어 모험가를 하는 녀석들이 천지였다.
주위에서 모험가들이 비웃었지만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봐도 우스운 게 사실이니까.
한 달이 지나니 그날 같이 등록한 녀석들은 모두 죽고 살아남은 건 나뿐이었다.
처음으로 파티를 이루지 않겠냐고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내가 솔로 플레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히든 피스를 최대한 찾아내고 독식해서 강해지고 싶었다. 팀이 있으면 숨길 것도 많고 템포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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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벤토리를 등록합니다. ]
어느 날은 주인공이 가져야 할 아공간을 가로챘다.
있을 거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올해 최고의 수확이었다.
제법 묵직한 용량을 보관 가능한 말도 안 되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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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가문에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이름이 존재한다는 걸 정보길드를 통해 알아냈다.
그러나 크게 드는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 세계를 버리고 한국으로 도망갈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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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천출인 내가 아카데미에 어떻게든 들어가서 스토리 사이에 있는 단물을 빼먹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허나 긴 시간은 그런 생각을 유야무야 흐려지게 했고 나를 이 세계에 안착하게 만들었다.
좋은 여자도 만났었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술 한잔 마실 놈들도 생겼다.
가끔 정신적으로 지치면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는 꿈을 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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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길드 역사상 처음이었다.
모험가 최강이라 불리는 우루스도 파티를 이루어 활동하는데.
솔로로 활동하는 모험가가 사지멀쩡한 채로 모험가 길드 최고등급인 백금에 도달한 것이다.
모험가 규정상 백금이 끝이다 보니 등급 안에서 모험가들의 실력 차이가 또 나누어지지만.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경력. 그것에 더해 솔로로 백금에 도달한 건 하나하나가 이례적인 일이다.
"후 - 뒤지겠다."
한 달 만에 수도로 돌아오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모험가 길드 지하에 있는 선술집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의뢰가 끝난 날은 바로 집으로 가는 것보다 여기서 배를 채우고 가는 게 내 습관이다.
집은 적적하기도 하고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애초에 집으로 돌아가도 저녁을 먹으러 또 나와야 한다.
"로만! 이번에도 안 죽었구만. 명이 참 질겨 낄낄."
"에이씨- 밥맛 떨어지게 남자는 꺼져."
꺼지라는 내 말을 무시하고 맞은편 자리에 덩치가 앉았다.
그 뒤를 이어 덩치의 파티원 중 하나가 다가왔다.
칙칙한 중년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화사함과 기품을 뿜어내는 여자였다.
"로만 씨! 안녕하세요!"
"릴리네- 오랜만이네. 자리에 앉아."
그녀는 목례를 간단히 하며 테이블 빈자리에 앉았다.
역시 태생이 귀족인 사람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
"매번 그렇지만 대우가 너무 다른 거 아니냐··."
"꼬우면 미인으로 변해서 오던가."
"후후- 로만 씨는 여전하시네요."
깊은 생각이 필요 없는 시답잖은 대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의뢰가 끝나고 돌아올 때면 이런 시간이 기대되곤 한다.
지금 삶에 있어서 몇 안 되는 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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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의뢰는 미정이라고?"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이어가다 의문을 느끼고 되물었다.
길드에서 보기 힘든 파티 중 하나인 그들이다.
라크의 파티는 나름 지명도가 높다.
라크 무리는 현실적으로 경험이 더 쌓이면 백금은 아니어도 그 아래를 노릴만한 잠재력이 있다.
그것을 냉정히 파악하고 있기에 부단히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다.
라크의 파티가 의뢰도 정하지 않고 휴식을 가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저 때문이라··."
릴리네가 원인이라
남한테 피해 주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 그럴 수가 있나?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저희 막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걸 보고싶어서···."
그녀가 귀족 출신이란 건 이 테이블에 있는 둘은 알고 있다.
부모와 연을 끊고 도망쳤지만 동생들을 뒤에서 챙겨주고 있다는 것도.
"그거라면 어쩔 수 없네. 라크가 혹시 못 가게 하면 내가 두들겨 패 줄 테니 걱정 말고."
"미친놈아! 내가 그러겠냐!"
"···정말 죄송할 뿐이에요."
농담에 쉽게 웃어주던 릴리네는 어지간히 마음에 걸리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크의 성격상 마음에 담아 둘 가능성도 없지만···
"릴리네. 지금 아카데미가 몇 회째 입학식이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세계가 아카데미가 주무대인 세상이란 게 기억났다.
나도 어지간히 감화되어 살아갔구나.
몬스터가 존재하는 판타지가 당연하다 생각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이번이 정확히 100회 째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입학식도 축제형식으로 공개행사로 한다 했던 거 같아요."
"흐음- 확실히 기념비적인 숫자네. 그래서 보러 갈 수도 있는 건가."
"맞아요! 경쟁률도 엄청 높았다고 하는데 저희 막내가··· 진짜 감동이에요."
릴리네의 감정 기복이 들쑥날쑥한다.
나는 릴리네의 막내자랑을 들으며 배를 채워나갔다.
결국 이 날이 왔구나.
처음에는 언제 오나 했고 자연스럽게 잊고 살았던 '아카라이트'의 시작점이 와버렸다.
입학식까지 남은 건 약 한 달.
집에 가서 메모해 둔 정보를 다시 정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99회 입학생들한테 사고가 터지는 것도 코앞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