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고 싶으면 해-919화 (917/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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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뭐하기에 이제 전화 받아요?

대 놓고 신경질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핸드폰 스피커에서 울렸다.

마치 김훈 대표에게 시비라도 거는 거 같은....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요 몇 달 동안 듣지 않아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이 드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렇습니다. 미국 물이 좋은가 봐요? 도통 들어 올 생각이 없으신 걸 보니 말입니다.”

상대가 시비조라서 그럴까? 김훈에게서도 좋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무례한 수준까지 얘기를 내뱉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 했어요. 내일모레 한국에 들어갈 예정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김훈은 눈살을 팍 찌푸렸다. 그는 천성적으로 정확, 명확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싫어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그런 명확하지 않는 말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내일 모레라는 말이었다.

내일 모레는 내일의 다음 날, 즉 모레란 말이다. 하지만 앞에 내일이 붙으니 모레의 다음날, 즉 글피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까....이번 주말에 들어온다는 얘기네요?”

그 말을 쓴 준열이 내일 모레를 글피와 같은 말로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김훈은 뭉텅 거려서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아닌 주말이란 말을 사용했다.

-맞아요. 해서 말인데. 한국 들어가면 김 대표부터 바로 봤으면 하는데. 시간 되죠?

삼명그룹의 현 실세인 백준열이다. 그가 무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보겠다는 데 그걸 바쁘니, 다른 약속, 스케줄이 있니 같은 말로 까는 건, 한국에서 숨 쉬고 살기 싫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되죠. 들어오시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제가 오라는 대로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준열이 한국에 들어오면 어디에 가겠나? 삼명그룹 본사 아니면 어디 특급 호텔이겠지. 그때 서울 안에만 있으면 한 시간 안에 준열이 있는 곳으로 갈 자신이 있는 김훈이었다.

-그럽시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는대로 어디서 볼지 연락드리죠.

전화 건 목적이 자신과 만나는 것이었던지 준열은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통화를 끝냈다.

“쳇....이러면 미국에서 뭘하고 다녔는지 알아봐야 하잖아.”

그 때문에 김훈은 머리가 아파왔다. 준열이 왜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으니 아쉬운 김훈 쪽에서 미국에 가 있는 백준열의 동향을 알아봐야만 하는 지경에 놓인 것이다.

처리자 조직이란 게 그렇다. 워낙 베일에 가려져 있다 보니 그 때문에 의뢰비를 떼이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니까 그냥 무턱대고 의뢰를 받았다가는 좆 될 수 있었고, 그걸 미연에 방지하고 확실하게 의뢰비를 받을 수 있는 대책으로, 사전에 의뢰자의 신상 정보를 먼저 파악하는 거였다. 즉 지금 김훈에게는 미국에 가 있는 백준열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그의 신상 정보를 파악하려면 미국에 사람을 보내거나, 아니면 미국 내 정보조직을 통해 백준열의 최근 동향을 알아봐야하는데 그 둘 다 시간이 부족했다. 백준열이 내일 모레 한국에 들어온다고 하니 말이다.

“하나 있기는 한데....”

그곳에 연락하는 건 김훈으로서 많이 꺼림칙했다. 또 공짜로 알려 주지도 않을 것이고. 하지만 지금 김훈에게 확실한 백준열에 대한 신상정보를 제공해 줄 곳은 거기뿐이었다.

“별 수 없군.”

김훈은 곧장 처리자 에이전시 본사 사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 대표실로 들어가서 비밀금고 문을 열었다. 김훈의 비밀금고 안에는 금괴를 비롯해서 다이아몬드 등의 보석류와 당장 현금화가 가능한 무기명채권, 그리고 비밀장부들이 가득 들어 차 있었다.

만약 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는 이 비밀금고 안의 것만 챙겨서 사라지면 됐다. 그럼 어디를 가든 다시 재기할 수 있을 테니까. 즉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김훈이 이런 비밀금고를 일부러 만들었다는 소리다.

김훈은 비밀장부들 사이에 한손에 속 들어오는 검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수첩의 맨 끝장에 적혀 있는 번호를 보고 바지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 *

한국 사람도 미국의 정보기관인 CIA는 안다. TV나 영화에서 하도 접하다보니 말이다.

하지만 그 본부가 워싱턴 D.C. 인근에 위치한 버지니아 주 랭글리에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을 드물겠지. 바로 그 CIA 본부 정보국의 수장인 정보국장 버틀러는 오늘도 미국의 정책 결정 방향과 국가 안보에 있어서 필요한 정보를 분석, 연구 중이었다.

지이이잉!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그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그 핸드폰을 집어 든 다음, 바로 코앞에서 그 화면을 확인했다. 노안 때문에 생긴 버릇인데 액정 화면에 H.K라는 전화건 사람의 이름 이니셜이 떴다.

“김훈?”

바로 전화 건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버틀러. 그의 입 꼬리가 빠르게 호선을 그렸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게 누구야? 다신 내게 전화할 일 없을 거라며 절연을 선언하신 분 아니신가?”

-크음. 뭐 그때는 상황이 좀 거지같았잖아? 너도 내게 미안해했었고.

“그래서 이쪽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너는 그런 우리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보여줬지.”

-그게 벌써 5년이었지. 나는 미국을 떠났고 여기 한국에서 행복해.

“잘 됐네. 그렇게 계속 행복하게 살아. 그럼....”

-잠, 잠깐만....

버틀러는 블러핑이 아닌 실제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상대는 그걸 아는 듯 다급히 외쳤고 버틀러는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대며 말했다.

“뭔데?”

-그게....도움이 좀 필요해.

“무슨 도움?”

-지금 미국에 가 있는 한국인에 대한 신상정보.

“나보고 지금 너희 나라 사람을 개인사찰이라도 하란 거냐? 그거 불법인거 알지?”

-잘 알지. 하지만....CIA가 하면 불법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그 상대가 워낙 유명한 자라서....

“유명해? 누군데?”

-삼명그룹 부회장인 백준열.

“뭐?”

삼명그룹 백준열이라면 버틀러도 잘 알았다. CIA 국장의 특별지시로 지금도 그와 그 주변에 비밀 공작국 요원들이 감시 중에 있었으니까. 즉 백준열의 이름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훈의 입에서 나온 자체만으로도 버틀러를 긴장케 만들기 충분했다.

왜냐하면 김훈은 CIA에서 탐낸 특작부대 최고 요원이었으니까. 그런 김훈과 백준열이 손을 잡는다면....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버틀러. 하지만 그가 괜히 CIA 정보국의 수장이 된 게 아니었다.

“미안. 대화창에 화날 일이 생겨서 말이야.”

마치 채팅창을 통해서 어디서 열 받는 보고라도 받은 거처럼 연기 한 버틀러. 그는 이게 먹혀 들 것을 확신했다. 요즘 직장인들 치고 컴퓨터 켜 놓고 일하면서 대화창으로 서로 소통하는 거야 다반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세요? 백준열 때문이 아니고? 왜? 내가 백준열과 손이라도 잡았을까봐서 그게 불안한 모양이네?

상대에게 이런 얕은 수는 통하지 않았다. 하긴 김훈이 누구던가? 살인병기이면서도 머리 쓰는 것도 기가 막혔다. 위에서 말하지 않아도 현장에서 알아서 척척 문제가 될 소지가 없게 일을 해결해 버리니, CIA 수뇌부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CIA 수뇌부에서 작정하고 그렇게 그를 영입하려고 혈안이 됐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는데....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CIA 수뇌부만 알았다. 그리고 버틀러는 그런 CIA 수뇌부 중 한 명이었기에 누구보다 그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시....SAC와 지원국 요원까지. 무려 22명이나 잃었지.

CIA 내에서 가장 적은 규모이며 산하에 각종 군사 활동, 정치 공작, 비밀 작전을 담당하는 특수 활동 조직이 바로 CIA SAC이었다.

그 SAC요원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지원국 요원까지 쓸려 나갔다는 건 그 만큼 김훈이 무서운 놈이란 얘기였다. 놈이 작정하고 테러라도 저지르려 든다면....

‘미국에 있어 대재앙과 같은 일이겠지.’

그러니까 김훈과 척을 지는 일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때 그런 버틀러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걸까? 김훈이 말했다.

-내가 필요한 건 백준열이 미국에서 뭘 하고 다녔다는 겁니다. 디테일한 거까지 필요 없어요. 그 정도 정보는 우리 사이에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말이 디테일하지 않은 정보지. 김훈이라면 백준열에 대한 대강의 정보만 줘도 그 디테일한 부분을 유추해 낼 작자였다. 그걸 알기에 버틀러는 망설였고. 하지만....

“좋아. 주도록 하지. 단....”

그냥은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김훈에게 뭔가를 요구했고....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김훈이 흔쾌히 그 요구를 받아드림으로 해서 두 사람 사이에 거래가 이뤄졌다.

* * *

“씨발 새끼....”

CIA쪽의 수뇌부 중 김훈이 유일하게 연락이 가능한 작자가 바로 버틀러였다. 그래서 그에게 미국에 가 있는 백준열의 신상정보를 부탁했는데 역시나 버틀러가 귀찮은 요구를 해왔다.

보나마나 CIA에서 처리하기 까다로운 일일 터. 하지만 그 요구를 김훈은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미국에 가 있는 처리자 직원들도 있었고 말이다. 그들에게 연락해서 그 일을 마치고 들어오라고 전화 한 통만 하면 됐다. 하지만 그로인해서 발생하는 손실은 오롯이 김훈의 처리자 에이전시의 몫이었다.

호주와 캐나다 원정까지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다보니, 김훈의 처리자 에이전시에서도 유능한 직원들을 보냈다.

그 직원들이 국내로 돌아와서 뛰면 벌어들일 돈이 얼마던가? 한데 미국에서 CIA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한다니....

“백준열....나한테 뭘 시킬지 모르지만....이번엔 제대로 벗겨 먹고 만다.”

김훈이 백준열을 만나면 그의 처리자 조직의 손실분을 반드시 복구하고 말 것을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메일로 버틀러가 백준열에 대한 신상정보를 보내왔고, 그걸 확인하면서 김훈은 곧장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지금 미국 어디야? 샌디에이고? 그럼 말이야. 워싱턴으로 가서....”

김훈은 미국에 원정 가 있는 자신의 직원들에게 모종을 지시를 내린 후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버틀러가 보내 준 백준열에 대한 신상정보를 마저 탐독했다.

“음흐음....”

그리곤 버틀러가 예상한 대로 김훈은 CIA에서 준 정보를 머릿속에서 분석하기 시작했고, 그 정보에서 빠진 디테일한 부분을 유추해 내기 시작했다.

“백준열이라면 록펠러 쪽의 횡포를 가만 지켜봤을 리 없어. 상원의원을 뉴욕으로 불러들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고....하아. 이제 하다하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에 골드만 삭스까지 건드렸어? 미친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백준열을 대 놓고 미친 놈 취급하는 김훈.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김훈은 흥분한 듯 잘게 몸을 떨면서 두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크흐흐흐흐. 이거 우리 처리자 조직이 미국으로 진출해야 할지도....아니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진출해야지. 이게 어떤 기횐데....미국 시장이라....이거 포부부터 웅장해지는 거 같군.”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김훈의 눈이었다. 거기서 탐욕의 빛이 뿜어져 나오자, 그 모습마치 사찰의 입구 천왕문(天王門)에 봉안 되어 있는, 그 무시무시한 얼굴로 호령하는 사천왕상 중 하나 같아보였다.

* * *

김훈과 통화 직후 버틀러는 CIA국장을 만나러 갔다. 정보국장인 그를 당연히 CIA국장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바쁘다며 요즘 골프도 치지 않는 자네가 어쩐 일인가?”

하지만 부국장과 더 친한 버틀러였다. CIA국장의 입장에서 이렇게 불쑥 자신을 찾아 온 버틀러가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걸 겉으로 티내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그걸 모를 버틀러도 아니었고. 해서 버틀러도 곧바로 자신이 왜 CIA국장을 보자고 했는지 그 이유를 밝혔다.

“실은 좀 전에 H.K와 통화를 했습니다.”

“H.K? 잠깐만....H.K라면....설마 특작요원이었던 그 김훈을 말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그 김훈이....”

버틀러는 김훈이 왜 자신에게 전화를 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더불어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자신이 그와 무엇을 딜 했는지도 얘기했다. 그 얘기를 다 경청한 뒤 CIA국장이 두 손 깍지를 끼고 정면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랬군....으음....”

그러다가 홱 시선을 버틀러 쪽으로 돌리면서 물었다.

“백준열의 정보를 어디까지 줄 생각인가?”

그러자 이미 그에 대해 생각해 둔 게 있는지 버틀러가 대답했다.

“백준열이 적어도 미국에서 누구를 만나고 뭘 했는지 정도는 김훈에게 제대로 알려줘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지. 좋아. 딱 거기까지만 알려줘. 그리고....알파 계획의 파기와 동시에 정리하는 일에 김훈을 끌어들인 건....탁월한 선택이야. 버틀러 국장.”

비록 CIA조직에서 다른 편에 선 버틀러지만 CIA국장은 그의 혜안을 칭찬했다. 그러자 살짝 무안해진 버틀러가 겸양적어 하며 대꾸했다.

“뭘요. 다 CIA를 위해선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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