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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세이코가 암캐가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그녀에게 질척거렸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암캐인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묵고 있다는 맨해튼 호텔에 방을 구하는 전화 한 통은 걸었다. 그녀와 오늘 만날 접점은 필요했으니 말이다.
“네. 네. 원래 내가 묵던 곳으로 부탁합니다.”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준열이 뉴욕에 왔을 때 맨해튼 호텔에 두 번 정도 묵었었다. 그때마다 그가 이용했던 스위트룸이면 적당할 거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네? 으음....뭐 어쩔 수 없죠. 그럼 그 옆방으로 하겠습니다.”
그 방은 이미 나갔다고 선객이 묵고 있다는 호텔 측의 말에 나는 그 방과 같은 타입의 그 옆방을 쓰기로 했다.
까다로운 백준열이 묵었던 호텔 방이니 그와 같은 타입의 방이면 괜찮을 거 같아서.
내가 맨해튼 호텔에 가는 이유가 세이코와 그 짓을 하기 위해서니 그 목적에 맞는 방이기만 하면 됐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곧장 뉴욕을 떠나야 했으니까.
그렇게 맨해튼 호텔 측과 얘기를 막 끝냈고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내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하니 내 수행비서 김종훈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쯤 합류해야 하는데 그건 하지 않고 전화질이나 하고 있었다.
“어....뭐?”
김종훈에게 시켜 놓은 일 중에는 내 형수 신미나의 행방을 현지에서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일단 그보다 먼저 현지에서 그녀의 위치는 찾아 놓은 상태였고. 그래서 LA로 가는 즉시 그녀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게 바로 내일부터 내 주요 일정이었고. 한데....
김종훈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다. 분명 어제까지 거기 잘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평소 활동 반경 내에서 지금 그녀를 찾고 있기는 한데, 한 시간 전 뉴욕 외곽 한 주유소 CCTV영상에 그녀가 포착 되었단다.
근데 차림새부터 수상하다나? 하긴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 때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할 만하지.
다행히 김종훈이 뉴욕 경찰을 움직일 수 있을 거 같단다. 그렇다면 도망친 형수를 잡는 건 일도 아닐 터.
“그래. 추격해서 원래대로 해 놔.”
내일 LA에 가면 신미나와 같이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식당까지 예약해 놓았고.
김종훈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식당에 예약을 취소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그렇게 김종훈화 통화 후 나는 오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때 내 핸드폰이 또 울렸다. 확인하니 셀리나였다.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을 이유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 전화를 받았다.
“네. 셀리나양.”
-지금 어디에요? 아직 뉴욕에 있긴 한 거죠?
“네. 그렇습니다만....
나는 비교적 사무적으로 그녀를 대했다. 지금 가고 있는 록펠러 본가에서 그곳 가주인 마이어 록펠러와 얘기만 잘 된다면 내가 셀리나를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옷은 그녀가 구해 준 것. 그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그녀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네. 네....으음. 그렇군요. 어처피 결정은 셀리나양이 해야 할 테지만, 내 생각에는....상황이 힘들 순 있으나 셀리나양이 자신을 힘들게 하진 말았으면 하는....그것이 먼 미래, 지나가는 우리의 시간들을 보며 웃을 수 있는....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항상 나는 '최고'라고 주문을 거세요. 나를 믿고 '괜찮아, 잘 할 수 있어'라고 응원하시고....그럼 거짓말처럼 잘하고 있을 겁니다.”
-....데 이렇게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지네요. 정말 고마워요. 준열.
처음엔 그녀의 고민 상담으로 시작해서 인생 상담까지 해주고 만 나는, 록펠러 본가 입구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셀리나와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바로 리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리암.”
-대체 누구랑 통화 한 거야?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리암이 벌컥 화를 냈다. 셀리나와 통화했다고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셀리나와 내가 무슨 사이인지 리암에게 일일이 다 설명을 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대충 둘러댔다.
“한국 내 회사에서 문제가 좀 생겨서 그거 해결하느라 통화가 좀 길어졌습니다.”
리암도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니 내가 회사 일을 핑계로 대자 그냥 넘어갔다.
-지금 어디야?
“록펠러 본가 입구 앞입니다.”
-그래? 으음....그럼 먼저 들어가지 말고 거기서 좀 기다려. 지금 나도 거기로 가고 있는 중이니까.
보아하니 리암이 나를 본가에 데려 온 공을 어지간히도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죠.”
초행인 나로서는 리암과 본가에 동행하는 게 그리 나쁠 거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요구를 쿨 하게 수락했다.
그렇게 본가 입구에서 10여분 쯤 기다렸을까? 리암의 차가 나타났고 그가 따라 오라며 차 안에서 손짓을 보낸 뒤, 그 차에 탄 채 먼저 본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리암의 차 바로 뒤로 내가 탄 차가 따라 붙었다.
* * *
록펠러 가문의 가주가 기거하고 있는 곳답게 대저택의 정문에서부터 까다로운 검문검색이 이뤄졌다.
그건 록펠러 가의 일원인 리암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나는 그보다 더 심하게 몸수색을 받아야 했고. 경호 차량도 한 대 밖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대저택 건물 안에 들어 갈 때는 근접 경호원을 한 명만 대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문대식과 같이 록펠러 가문의 가주를 만나기 전 잠깐 대기하는 접객 실에 들어갔다.
리암은 여기 들어오자마자 할머니 좀 잠깐 뵙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어디 갔을 지는 뻔했다.
“마이어 록펠러를 만나러 갔겠지.”
아마 가주를 만나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다 얘기를 하겠지. 마이어 록펠러는 리암의 그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나를 만날 테고 말이다. 그럼 아무래도 대화의 주도권은 마이어 록펠러가 쥘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데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니 말이다.
마이어 록펠러는 나를 호구로 잡아서 실패한 가문의 사업에 부실을 최대한 털어 보려 할 거다. 하지만 나와 만나고 나면 그의 생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약점을 몇 가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미래에 벌어질 굵직한 사건, 사고를 알고 있었고. 그 사건, 사고로 인해 록펠러 가문은 여론의 직격탄을 맞고 휘청거리게 된다.
그걸 슬쩍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이어 록펠러는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접객 실 의자에 앉아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었다.
“대표님. 벌써 30분이 지났습니다.”
문대식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손님이 왔는데 그 손님을 30분 넘게 기다리게 한다?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만나려는 상대가 록펠러 가문의 가주 마이어 록펠러라면?
그건 당연한 일이 된다.
왜냐하면 그 만큼 록펠러 가문의 가주인 마이어 록펠러는 만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월 스트리트의 꽤나 유명한 금융가가 마이어 록펠러를 만나기 위해 2시간을 기다렸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차피 오늘 오후 일정은 비워 둔 터라 나는 2시간이 아니라 3시간도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문대식은 그게 아닌 거 같았다.
하긴 그가 알기로 나는 이곳에 초대를 받고 왔다. 그런 나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게 문대식으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경호팀원들을 아예 이 안으로 들이지도 못하게 했고 말이다. 여러모로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문대식에게 내가 웃으며 말했다.
“핸드폰 게임이나 하자.”
“네?”
황당한 문대식을 보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진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기가 차 하던 문대식도 심심한지 핸드폰 게임을 했고, 그렇게 기다린 지 한 시간 쯤 되었을 때 마이어 록펠러의 비서실장이란 양반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담 체이섭니다.”
“백준열입니다.”
그와 악수를 하는 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마이어 록펠러의 비서실장 아담에게서, 나는 마치 발가벗겨 단상 위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뭐 그렇다고 누구한테 쫄 내가 아니지. 나는 피식 웃으며 날카로운 아담 실장의 눈빛을 그냥 받아 넘겼다. 그러자 아담 실장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아무래도 내 반응이 그가 생각한 것과 달랐던 모양이었다.
뭐 어째든 냉기 풀풀 풍기며 접객 실에 들어왔던 아담 실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정중하게, 나를 록펠러 가문의 가주인 마이어 록펠러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 * *
백준열의 예상대로였다.
그에게 할머니 뵈러 가봐야겠다는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은 리암. 하지만 정작 그 할머니는 쇼핑 나가고 대저택 안에 없었다. 대신 리암이 만나고 있는 사람은 록펠러 가문의 가주인 마이어 록펠러였다.
“아담 실장에게 들었다. 그 녀석만 잘 이용하면 스포츠 사업으로 들어간 투자 분은 얼추 건져 낼 수 있을 거 같다고?”
“네. 그리고 아예 이번 기회에 농구단과 축구단을 넘겨 버리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뭐 그럴 수만 있다면....쯧....그러는 게 좋겠지.”
마이어 록펠러도 뉴욕에서 벌려 놓은 스포츠 사업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할아버지께서....”
마이어 록펠러는 리암의 얘기를 쭉 경청했다. 그 다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눈으로 리암을 쳐다봤다. 왜냐하면 그의 손자들은 아직 어려선지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연 한국 삼명 그룹의 막내아들인 백준열에 대해 리암이 제대로 파악을 했는지 그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대 놓고 손자 앞에서 얘기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록펠러 가문은 가문의 일원을 끝까지 믿었으니까. 그게 실패한 것으로 확정 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즉 리암의 말대로 충분히 될 수 있는데 괜히 그가 거기에 초를 치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까.
마이어 록펠러가 힐끗 자신의 비서실장인 아담을 쳐다봤다. 그러자 아담도 그와 같은 생각인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의 생각대로 하자는 뜻이었다.
“알았다. 그렇게 해주지.”
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암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그 녀석 제가 데리고 올게요.”
하지만 그 말에 마이어 록펠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좀 아닌 거 같구나!”
“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리암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마이어를 쳐다보자....
“그 자리에 리암 도련님이 계시면....아무래도 압박감이 덜할 겁니다.”
마이어 대신 그의 비서실장인 아담이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리암이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며 할아버지인 마이어 록펠러를 보고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탈탈 털지는 마시고요. 엔터 쪽이면 추후 이용 가능성이 높으니 말입니다.”
“....”
하지만 마이어 록펠러는 리암의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백준열을 만나보고 나서 그럴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고집스런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더 할 말이 없어진 리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리암이 가주의 집무실을 나가고 나자 마이러 록펠러가 바로 자신의 비서실장인 아담에게 말했다.
“이제 됐으니 그 아이 데리고 와. 올 때....알지?”
“네. 회장님.”
아담이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집무실을 나가는 걸 보고 마이어 록펠러는 주치의가 그렇게 끊으라고 해도 결국 끊지 못한 쿠바제 시가 하나를 입에 물었다.
몇 년 전부터 쿠바제 시가의 수입이 금지 된 미국이었다. 그렇지만 돈이면 못 살건 없었다. 밀수로 기어코 쿠바제 시가를 구한 마이어 록펠러. 그가 불을 붙이긴 전 충분히 담배 냄새를 코로 맡은 다음 라이터를 켜고 시가에 불을 붙였다.
* * *
미츠비시 그룹의 회장인 이와사키 구로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고 그는 요즘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범인데 자식들은 왜 다들 개새끼들인지....
“하아....”
그나마 큰딸은 그의 기대만큼은 해주고 있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남자보는 눈이 너무 형편없었다. 거기다가 피는 못 속인다고 남자를 어찌나 밝히던지.
제 애미가 그랬다. 구로다 회장의 장녀 세이코의 모친은 긴자의 게이샤였다. 당시 최고 인기를 끌었던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구로다 회장은 아낌없이 자신의 애정과 돈을 그녀에게 쏟아 부었다. 그 결과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녀와의 사이에 딸인 세이코까지 뒀다. 하지만 그녀는....
“에이....”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로다 회장은 욱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