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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귀에 익은 그 목소리에 리암이 빽 소리를 질렀다.
“셀리나!”
“뭐?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셀리나의 말에 리암은 부르르 몸을 떨었지만 뭐라 반박의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뭐라 잘못 말했다간 여러모로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거란 걸 사업가인 리암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눈치 빠른 준열이 고맙게도 현 사태 수습에 나서주었다.
“내가 이래봬도 힘은 세거든요. 최선을 다해 결승까지 가 보도록 할게요.”
“그, 그래. 이왕이면 그 결승에서도 이겨 주라.”
리암이 슬쩍 준열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는 격려했다. 그런 모습이 셀리나는 영 마땅찮은 듯 팔짱을 끼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게 다 저년 때문이야. 학교 다닐 때도 그러더니....아직도 여왕벌 놀이를....왜 하필 내 생일날 하고 지랄이야.”
셀리나의 그 말은 족히 10미터는 떨어져 있는 헬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민한 청각의 주인공인 준열에게는 그대로 다 들렸다. 순간 준열의 눈이 헬렌에서 셀리나, 그리고 리암 사이의 삼각편대를 훑었고 현 상황을 빠르게 추론했다.
‘....그랬군.’
준열은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 거 같았다. 저 앞에 자신의 생일날 주인공이 바뀐 듯한 지금 상황이 불만인 듯 팔짱 끼고 잔뜩 인상 쓰고 있는 셀리나. 하지만 「개눈깔」아이템을 통해 준열이 보고 있는 그녀 몸을 두른 형형한 핑크빛이 말해 주고 있었다.
셀리나가 준열 자신에게 완전히 반해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오해 중이었다.
준열도 다른 남자들처럼 자기보다 헬렌에게 더 관심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물론 미모에서 셀리나는 헬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준열이 여기 있는 건 다 인맥, 즉 록펠러 가문과 연을 맺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리암 말고 록펠러 가문의 일원이며 차기 가주의 딸이기도 한 셀리나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데, 그걸 마다하고 헬렌의 미모를 쫓을 정도로 준열의 눈에 헬렌이 매력적인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헬렌은 준열에게 별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동양인 남자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지, 그녀 몸을 두른 빛에서 살짝 적대적인 암적색 기운까지 엿보였다. 그때였다.
“10분의 휴식 시간이 지났습니다. 승자 8명은 이쪽으로 들 와 주세요.”
어쩌다 팔씨름 경기의 운영을 맡은 셀리나의 지인이 외쳤고, 그 소리를 들은 준열은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에게 리암이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파이팅!”
그러자 그걸 보고 팔짱 끼고 서 있던 셀리나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날렸다.
“흥!”
그런 셀리나를 헬렌이 힐끗 쳐다보더니 리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사이 준열은 팔씨름 8강전을 치르러 널따란 거실 한 가운데로 움직였다. 원래는 뷔페 음식이 차려져 있던 그곳에, 음식이 치워진 기다란 테이블 양쪽으로 각기 4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알아서 늘어섰다.
그들은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팔씨름이 시작도 되기 전에 벌써 눈싸움을 하며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 그때 심판을 맡은 셀리나의 지인이 나서며 말했다.
“다들 각자 상대가 맞습니까?”
“네에!”
8명의 남자들이 서로를 마주 본 체로, 일제히 맞다고 외치자 심판이 이어 말했다.
“다들 팔들 푸시고 1분 뒤에 8강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에 8명의 남자들이 각자 취향대로 팔과 몸을 같이 풀었다.
* * *
준열의 8강전 상대는 흑인으로 역시나 운동 선수였다. 하지만 앞서 준열이 상대했던 덩치들과는 좀 달랐다.
“말릭도 헬렌을 좋아했어?”
“그러게. 나도 몰랐네. 저 녀석 올해 메이저리그에 콜업 되었다고 했었지?”
“어. 뉴욕 메츠. 주전 2루수 조니 부르니가 부상으로 못 나오는 동안 그 자리를 꿰차고 있어. 근데 내일 경기 있을 텐데 지금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홈경긴데 뭐 어때. 그나저나 저 동양인이 말릭까지 이기면....”
“에이. 설마....”
주위에서 들리는 얘기를 통해 준열은 자신의 상대인 말릭이라는 흑인 남자가 프로야구 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자신이 상대했었던 미식축구 선수에 비해 팔 힘이 약하지 않음을 그의 손을 잡는 순간 깨달았다.
즉 순수한 자신의 힘만으로는 상대를 이기기 어려웠다. 하지만 준열에게는 괴력을 끌어 내 줄 능력이 있었고....
“와아아....”
“맙소사. 또 이겼어.”
“말릭도 이기다니. 저 동양인 뭐야?”
야구 선수라서 그런지 몰라도 팔목이 꺾이면서 자신의 팔이 넘어가자, 말릭은 굳이 더 힘주며 버티지 않았다. 그러다 팔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준열은 다른 주위 남자들처럼 악을 써가며 필사의 각오로 이기기 위해 온 힘을 다 쓰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굳이 팔 힘을 빼지 않고 준열은 8강에서 제일 먼저 4강으로 올라갔다.
“4강과 결승은 시간 관계상 바로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8강전을 치르는 동안 셀리나가 슬쩍 심판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하더니 아마도 팔씨름 진행을 빨리 하라고 한 거 같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4강전이 벌어졌고, 이번 준열의 상대는 역시나 흑인이었다. 키가 2미터는 될 거 같은 거구에 솥뚜껑 같은 손 검은 손을 내미는 녀석이 준열을 보고 히죽 웃었다.
“행크 저 녀석 웃는 거 좀 봐.”
“하나마나란 얘기지.”“하긴 체격 차이부터가 뭐....”
그렇지만 준열의 눈에 NBA 농구선수 행크는 앞서 그가 상대했던 야구 선수 말릭에 비해 팔 힘은 약해보였다. 대신 손바닥 악력하나는 진짜 대단했다. 하지만....
“아아....”
“허얼....”
준열이 힘을 주자 맥없이 넘어가 버리는 행크의 팔. 자신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행크. 그 행크의 커다란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어내며 준열이 그 손에 주먹을 쥐락펴락 했다.
행크의 손아귀 힘이 너무 강해 팔씨름 하는 동안 그의 손에 잡힌 준열의 손이 제대로 피가 통하지 않았던 것.
어째든 팔씨름은 상대의 팔을 넘기면 이기는 스포츠인 만큼, 팔 힘에서 준열의 상대가 되지 못한 행크는 자신의 패배가 믿기지 않는 듯 재경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심판이 이를 묵살하자 씩씩거리며 파티 장을 나가 버렸다.
“자자. 이제 결승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긴 사람이 헬렌을 데리고 여길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팔씨름 최후의 승자만이 여왕의 남자가 되어 그녀와 같이 이곳 파티 장을 나갈 수 있었다.
* * *
팔머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해 왔다.
대학에서 미식축구를 했었던 그는 프로까지 갈 실력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학업에 열중하면서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가 가고 싶어 했던 대기업 고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회사에 잘 다니던 그에게 대학 다닐 때 잠깐 사귀었던 헬렌을 볼 수 있다는 친구의 얘기를 들은 그는, 그 친구를 따라서 이곳 파티에 왔고 드디어 헬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왕이었고 팔머는 그런 그녀를 거쳐 간 수많은 남자들 중 하나 일 뿐이었다.
“어머. 팔머. 오랜만이야.”
그나마 헬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해 주어서 그는 오늘 여기 오기 참 잘 했다는 생각했다. 하지만 감히 그녀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주위에 난다 긴다 하는 대단한 남자들이 바글거렸으니까. 그랬는데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팔머는 헬렌을 건 팔씨름 경기에서 결승까지 올라갔다. 이제 저 눈앞에 동양인 남자만 이기면 그는 당당히 헬렌과 팔짱을 끼고 이곳을 나갈 수 있었다.
“헬렌....”
그는 헬렌을 보며 그녀에게 응원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딴 남자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꼭 이기고 만다.’
그게 팔머에게 더 승리에 대한 더 강한 동기부여를 가져 다 주었다. 그런 그 앞에 동양인 남자는 흥분한 팔머와 달리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결승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은 약속이 있어 어디 빨리 가야 하는지 팔씨름 결승 경기를 서둘러 진행 시켰다. 그래서 준열은 가볍게 손목만 풀고 대기 중이던 결승 상대와 손을 맞잡았다.
“단판 승붑니다.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 헬렌과 같이 나가 데이트를 즐길 자격을 얻는 겁니다.”
심판은 그 말을 하며 헬렌을 쳐다봤고 헬렌은 그렇게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자악!”
그리고 팔씨름 결승전이 시작 되었다. 팔머는 심판의 소리와 동시에 죽을힘을 다해 상대 팔을 넘기려 했다.
‘....어어....’
그런데 팔에 전혀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마치 자신의 팔이 마비라도 된 듯 말이다. 그때 그의 앞에 그의 손을 맞잡고 있던 동양인. 그가 씨익 웃더니 천천히 팔머의 팔을 넘기기 시작했다.
턱!
그리고 팔머의 손등이 테이블 위에 닿았다.
“우와아아....”
“하아....어떻게 이런 일이....”
“저 동양인....완전 괴물이잖아?”
미인 쟁탈전, 그 최후의 승자는....준열이었다. 준열은 마치 자신이 이길 줄 알았다는 듯 승리 후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승자의 여유를 즐겼다. 그리곤 헬렌과 팔짱을 끼고 유유히 파티 장을 빠져 나갔다.
* * *
4강전에서 승리 후 준열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가 셀리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그녀에게 말했다.
“헬렌 보내고 나면 우리 같이 한 잔해요.”
“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준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셀리나. 그런 그녀에게 준열은 자신이 관심 있는 여자는 셀리나라고 말했다. 선의로 친구 리암을 돕다보니 상황이 좀 꼬였고. 준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영리한 셀리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준열이 팔씨름에 나선 게 헬렌이 아니라 다 리암 때문임을 말이다. 준열은 그렇게 얼굴이 붉게 상긴 된 셀리나에게 자신의 말을 전한 뒤 곧장 리암에게로 갔다.
“내가 우승하면 먼저 여길 나가서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내가 헬렌 데리고 그 차로 갈 테니까.”
리암도 준열의 그 말에 그가 뭘 하려는 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막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데 어느 새 준열은 뒤돌아서 팔씨름 결승전을 치르러 저 만큼 앞에 가고 있었다.
그렇게 팔씨름 결승전이 펼쳐졌고 준열이 상대의 팔을 넘기는 걸 본 순간 리암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지. 이겼다.”
준열의 승리에 기뻐하던 리암. 그는 곧 준열이 결승전 전에 그에게 한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서둘러 파티 장을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차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헬렌과 팔짱을 끼고 파티 장 밖으로 나온 준열이 곧장 그가 타고 있는 차로 왔고....헬렌만 혼자 그 차에 탔다. 차 밖의 준열이 리암을 보고 말했다.
“잘 가고 내일 봐요.”
“어어. 고마워. 내일 본가에서 보도록 하지.”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리암은 본가 집사격인 아담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내일 본가로 와도 좋다는 대답을 들었다. 아담 실장에게 준열을 데리고 간다고 하니 그가 즉시 가주인 조부에게 물은 모양이었다.
조부야 리암이 왜 삼명그룹 후계자 준열을 데리고 본가에 가겠다고 하는 건지 곧바로 눈치 챘을 테고. 눈치 빠른 준열은 리암의 말에서 내일 록펠러 본가로 마이어 록펠러를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기뻐하며 큰소리로 말했다.
“네. 내일 연락 주십시오.”
내일 언제, 어디로, 어떻게 갈지는 리암이 정해서 알려줘야 했기에 준열이 한 말이었고, 그 말에 리암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일 점심 먹고 연락할게.”
즉 약속이 오후에 잡혔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내일 오전까지 준열도 즐길 거 즐기라는 소리였다. 그 말에 준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리암과 헬렌이 탄 차가 출발하자, 준열은 곧장 뒤돌아서 파티 장으로 돌아갔다.
“이리로....”
준열이 파티 장에 들어서자 그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셀리나가 먼저 그를 향해 손짓을 했다. 준열은 싱긋 웃으며 셀리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셀리나가 그의 손을 잡더니 어딘가로 이끌었다.
“여긴....”
그곳은 바로 셀리나의 방이었다. 파티 장에서 유일하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방. 그 은밀한 곳으로 준열을 데리고 들어간 셀리나. 그녀가 준열 앞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한테 관심 있다고 했죠?”
“네.”
“내 어디가 좋아요?”
반짝 눈빛을 빛내며 묻는 셀리나에, 준열은 그 대답을 두고 조금 갈등을 했다. 진짜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말할지, 아니면 연기를 할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의 결정은....
“처음 본 순간 난 알 수 있었습니다. 운명처럼 당신을 사랑할 거란 걸....”
연기를 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