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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블랙머니에서 만난 박 비서. 다른 직원들은 아직 출근도 하지 않은 시간.
나 때문에 30분 일찍 출근한 그는, 내 지시에 의아해 하면서도 내가 시킨 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미래를 아는 나로서는 왜 그런 과감한 투자를 하는지에 대해, 박 비서에게 딱히 둘러 댈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촉이 그러니 그렇게 하라고, 거의 억지에 가까운 지시였다.
알다시피 투자회사 블랙머니는 100% 내가 출자한 회사다. 그런고로 내가 하겠다면 누구도 그걸 제지할 방법은 없었다. 아마 그래서 박 비서도 내 지시에 반대하는 말을 결국 꺼내지 못한 것일 터.
“그럼 순항 중인 유가 선물 투자는 어떻게 할까요?”
박 비서가 그 내 일방적 지시에 대해 분위기 환기라도 하려는 듯, 다른 해외 투자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얼마 올랐는데?”
“10%정도요.”
“그래? 그건 좀 더 지켜보자고.”
두 달 전 넣은 유가 선물에서 벌써 1억 달러를 회수한 상태였다. 이렇듯 내가 하는 투자가 전부 대박 성공을 하고 있으니 박 비서도 내 투자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 놓는 게 꺼려지는 것일 수 있었다.
박 비서에게 지시할 것을 얼추 다하고 나자, 블랙머니 직원들이 하나둘 씩 출근을 했고 회사 안이 점점 더 부산스럽게 변해갔다.
“그럼 수고 해.”
“네.”
나는 내 할 말을 다하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내가 내릴 지시를 다 내렸으면 나도 이제 JYB엔터로 출근을 해야 했다.
“대, 대표님!”
“허억. 대표님께서 언제....”
내가 대표실에서 나오자 블랙머니 직원들이 다들 깜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휑하니 블랙머니를 빠져 나왔고, 대기 중인 차를 타고 JYB엔터로 향했다. 그렇게 JYB엔터 본사로 출근해서 대충 얼굴을 내 비치고 급한 서류 몇 가지를 결제한 후, 바로 그곳을 나온 나는 종로 방면으로 움직였다.
“저기 있네요.”
종로 2가 사거리에서 보면 우측에 위치한 대형 건물에 JG자산투자운영의 간판을 발견한 조수석의 김종훈.
그렇다. 나는 지금 JG자산투자운영의 윤재구 회장을 만나러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서울에 온 윤 회장이 지금 JG자산투자운영에 있었고, 잠시 후 10시에 이 근방에서 나와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JG자산투자운영의 본사 건물 뒤쪽이라고 했으니 저기서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을 김종훈이 내 차 운전기사에게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내 옆을 보니 문대식이 불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마도 오늘 아침에 내가 수행비서 김종훈의 편을 들어 준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김종훈이 좋아서 그의 편을 들어 준 건 아니다.
김종훈이 그 만큼 내게 잘 보이려 노력을 하니까 그의 편을 들어 준 거뿐이다.
아마 문대식도 그건 알 거다. 그러니 뭐라 말도 못하고 이렇게 꽁해 있는 거지.
이럴 경우 그냥 내 버려두면 문대식이 어련히 다 알아서 할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문대식이 여태 내 곁에 붙어 있지 못했을 테니. 그 정도 능력과 저력은 가지고 있는 문대식이었다.
잠시 후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고, 나는 김종훈을 앞장세우고 문대식을 옆에 끼고서 윤 회장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침 첫 비행기로 김포 공항에 도착한 윤재구 회장. 그는 공항 입구에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그 차에는 그의 고문 변호사가 타고 있었고, 곧장 그가 직접 그의 손으로 만든 JG자산투자운영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동 중 내내 윤재구 회장은 자신의 고문 변호사와 심각한 얘기를 주고받았고, 얼추 아침 출근 시간에 JG자산투자운영 본사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윤재구 회장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회, 회장님!”
“아니. 회장님께서 어떻게....”
“와아. 진짜 회장님이시다.”
직원들의 출근 시간에 떡하니 등장한 윤재구 회장으로 인해 JG자산투자운영은 아침 댓바람부터 발칵 뒤집어졌다.
“윤 상무와 윤 부장, 박 상무, 윤 감사 불러. 당장.”
비어 있는 회장실에 들어간 윤 회장은 자신의 아들들과 사위, 그리고 딸을 불렀다.
그렇게 자신의 혈육들이 올 동안 윤 회장은 자신의 고문 변호사를 통해서 자신이 보유 중인 국내 10대 그룹의 모 기업 주식, 그러니까 지주사의 주식을 전부 한 사람에게 넘기게 했다.
윤 회장의 고문 변호사는 미리 윤 회장에게 언질을 받은 터라 주식 양도를 위한 모든 준비를 다 갖춰 놓고 있었기에, 윤 회장의 보유 주식을 누군가에게 양도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회장님. 다 넘겼습니다.”
“....”
고문 변호사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서 윤재구 회장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였다.
“아버지!”
“아빠!”
“장인어른!”
그가 부른 그의 혈육들이 회장실에 나타났다.
“이리 와 앉거라.”
윤 회장은 자신의 자식들과 사위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서 그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유언을 직접 자기 입으로 전했다.
“너희들에게 줄 건 내 이미 다 나눠놨다. 이제 남은 건 이 회사와 제주도의 별장뿐인데....”
윤 회장은 JG자산투자운영의 자기 지분과 제주도의 별장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그의 아들과 딸이 발끈했다. 왜냐하면 윤 회장이 죽으면 그것들은 알아서 그들의 몫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때 사위가 말했다.
“장인어른. 10대 그룹 주식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자란 두 자식과 달리 똑똑한 사위는, 쭉정이 말고 윤 회장의 진짜 자산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언급했지만....
“뭐, 뭐라고요? 그걸 왜 그 놈에게 줘요?”
“말도 안 돼. 그 놈이 뭐라고....”
윤 회장이 이미 그 10대 그룹 주식을 누군가에게 양도했다는 말에 혈육들은 다들 기겁 했다.
“아버지. 그 놈에게 당장 그 주식들 도로 토해 내라고 하세요.”
“형 말이 맞아요. 아버지.”
“장인어른.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게 어떤 건데....”
“아빠. 미쳤어? 그게 다 얼만데. 그걸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새끼한테 넘겨요.”
하지만 윤 회장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그러자 자식들이 울고불고 윤 회장에게 매달렸고, 윤 회장의 마음도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그가 백준열에게 10대 그룹의 주식을 넘긴 건 정당한 거래에 의한 대가였다. 근데 그걸 도로 내 놓으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이걸로 내 할 말은 끝났다. 앞으로 상속 문제는 여기 있는 서 변호사와 얘기를 하거라.”
윤 회장은 독하게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장실을 박차고 나왔고 그런 그를 쫓아 붙잡으려는 혈육들을, 회장실에 남아 있던 그의 고문 변호사인 서 변호사가 만류하며 말했다.
“회장님의 상속에 관한 문제는 저와 얘기하면 됩니다. 우선 여기 계신 분들이 물려받으실 회장님의 재산 목록부터 보시고....”
혈육들은 정확히 윤 회장이 그들에게 남긴 재산이 뭔지 확인하기 위해 회장실에 남았고, 그 사이 윤 회장은 JG자산투자운영을 빠져 나와 백준열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 * *
원래 윤 회장은 오늘 오전 9시에 자신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는 로펌에서 나와 만나기로 했었다. 한데 기상으로 제주도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는 비행기가 연착하면서, 그 시간이 한 시간 뒤로 미뤄졌다. 그 과정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도 바뀌었고.
그로 인해 내 스케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뭐 덕분에 블랙머니에 들러서 박 비서를 만나 미국으로 가기 전 해외 투자에 대한 지시를 내릴 수 있어서, 내 입장에서는 퍽이나 다행스럽긴 했다. 대신 윤 회장에게 할애하기로 했던 시간이 대폭 줄었다. 하지만 약속을 변경한 건 내 쪽이 아니라 윤 회장 쪽이니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먼저 윤 회장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박 비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어. 어. 그래? 알았어.”
박 비서의 말에 따르면 좀 전 윤 회장이 내게 자신이 보유 중인 국내 10대 그룹의 지주사의 주식의 양도 절차가 끝났다고 했다. 한마디로 내가 윤 회장에게 챙길 건 다 챙겼다는 얘기다.
윤 회장은 이제 내게 줄 거 없는 제주도 사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윤 회장이 곧 죽을 걸 안다.
“잘하면 이게 그를 보는 마지막이 될지도....”
내가 미국에 갔다 왔을 때 윤 회장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었다. 자칫 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영전의 그를 보거나 아니면 무덤에 들어간 그를 보게 될지 몰랐다. 그랬기에 나는 오늘 윤 회장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그가 여기 나타나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일찍 왔군.”
그때 약속 장소에 윤 회장이 나타났다. 그는 내가 안 본 사이 많이 수척해지고, 그로인해 확 더 늙어보였다.
“주식은 잘 받았습니다.”
“쯧, 매정하기는....사람을 봤으면....늙은이 안부부터 물어야지.”
“딱 봐도 안색이 안 좋으신데 안부는 무슨....”
내 말에 윤 회장이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얼굴을 더 굳혔다. 원래 윤 회장은 내게 주식을 양도하고 자식들에게 나눠 줄 유산을 고문 변호사를 통해 대신 전달하게 하고 제주도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 얼굴을 보아하니 기어코 자식들을 만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얘기했겠지. 자신의 유언을 말이다. 그 과정에서 10대 그룹 주식을 내게 넘긴 것도 밝혔을 테고.
“혹시 내게 주식을 양도한 걸 후회 하십니까?”
“....”
내 물음에 윤 회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후회를 하고 있다는 거다.
뭐 아깝긴 하겠지. 무려 국내 10대 그룹의 지주사 주식이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그걸 제대로 제값 받고 팔았을 때 그가 챙길 돈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많은 돈을 자식들에게 나눠 준다면 3대? 아니 5대까지는 족히 그의 후손들이 떵떵거리며 이 땅에서 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윤 회장은 차마 내 앞에서 그 후회의 감정을 내 비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부탁을 들어 주는 대가로 그가 주기로 한 주식이었다. 그걸 내가 잘 받았고. 그러니 그의 입에서 도로 그 주식을 뱉어 놓으라는 말은 하기 어려웠다.
‘뭐 한다고 해도 내가 도로 내 놓을 리도 없겠지만.’
윤 회장은 끝끝내 내게 주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제주도에서 보자고.”
윤 회장은 내 애견 엘베가 제주도에 있는 한 내가 제주도에 올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 조만간 엘베 보러 제주도에 가겠습니다.”
나는 그 생각이 맞다고 윤 회장이 생각하게 시원스레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살아생전 나를 보는 건 지금뿐이다. 그는 다음 주 안에 죽는다.
그걸 모르는 윤 회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약속 장소를 떠났다. 아마도 다음에 나를 만났을 때 은근슬쩍 주식 얘기를 꺼내겠지.
얼마라도 더 자신의 피붙이들에게 유산을 챙겨 주려고 말이다.
* * *
윤 회장과 내가 만난 약속 장소는 JG자산투자운영의 본사 건물 뒤쪽에 있는 한 오피스텔 건물의 1층에 위치해 있는 복덕방, 그러니까 공인중개사 사무실이었다. 공교롭게도 거기 건물 주인이 바로 나였기에 그곳을 한 시간 정도 비우게 해서 윤 회장과 만나는 장소로 이용한 것이다.
윤 회장은 시간을 두고 차차 나를 설득할 생각으로, 당장은 별말 하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그의 명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알았다면, 그는 체면 불구하고 여기서 나를 붙잡고 늘어졌을 거다.
“막상 자식들을 만나 보니....생각이 바뀐 거겠지.”
특히 자신의 남은 자식들이 너무 모자라서, 물려 준 재산으로는 얼마 못 버틸 거 같자, 아무래도 내게 주식 넘긴 게 후회가 될 수밖에 없을 테지.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거다.
그런데 윤 회장은 해선 안 될 실수를 저질렀다. 그만큼 죽을 때가 되다보니 그의 사리판단 능력이 흐릿해진 거다.
자신의 자식들이 모자라다는 걸 알았으면 그는 내 얘기를 자식들에게 해선 안 됐다.
왜냐하면 그 모자란 자식들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100% 설칠 테니 말이다.
하긴 나라고 해도 내가 물려받을 재산을 아버지가 덜컥 듣도 보도 못한 놈에게 넘기면 가만 안 있겠다. 그런데 모자란 자식이라면....
“가만 안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날 족쳐서 주식을 도로 토해 내게 만들려 들겠지.”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나를 건드리면 그게 윤 회장이라도 죽는다. 내 손에.
하물며 그 자식들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그 동안 윤 회장은 내게 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한데 정작 그 자식들이 줄줄이 나 때문에 죽어나게 생겼다. 물론 나를 건드리지 않은 윤 회장의 자식은 제 운명대로 살게 될 거다.
그러나 윤 회장이 내게 넘긴 주식이 어떤 건지 아는 그들이, 과연 그걸 되찾으려 하지 않을까? 그나마 내가 누군지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 정도 혜안과 통찰력이 있는 자식이라면, 윤 회장이 그렇게 내게 그 주식을 넘긴 걸 후회 하지도 않았겠지.
고로 윤 회장의 자식들은 탐욕 때문에, ‘나’라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반드시 뛰어 들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