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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임연수는 안형수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안형수가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라고 슬쩍 고갯짓까지 했다. 하지만....
“부장님 뵙고 오세요. 내 얘기는 그때 할게요.”
갑자기 생각을 바꾼 임연수. 그녀는 원래 하려던 말을 하지 않고, 대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형수 PD와 이미영 메인 작가가 동시에 부장에게 불려 간다? 뭔가 있었다.
그 생각과 동시에 임연수에게 뭔가 촉이 왔다. 임연수도 아나운서로 잔뼈가 굵었다. 즉 아나운서의 세계에서는 이눈치 저눈치 다 보고 여태 살아 온 거다. 그런 그녀의 눈치가 왠지 지금은 말을 아낄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해서 임연수는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을 스쳐 지나서 먼저 라디오 녹음부스 밖으로 나갔다.
“쳇! 난 또....”
이미영도 안형수 같이 생각하고 있었던 듯 임연수가 하차 의사를 밝히지 않고, 그냥 부스 밖으로 나가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자. 그만 갑시다. 부장님 기다리는 거 싫어하잖아요?”
“그래요.”
안형수는 실망한 얼굴이 역력한 이미영을 데리고 KVS라디오 편성 부장인 엄지태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똑!
부장실 앞에 도착한 안형수가 먼저 노크를 하자.
“들어 와!”
방밖으로 엄지태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 긴장한 듯 안형수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바로 옆에 이미영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이 쫄았다는 걸 티내지 않으려 제법 힘차게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가며 그 방 창가에 책상을 두고 앉아 있는 엄지태 부장을 향해 좀 박력있어 보이게 머리를 숙였다.
“부장님. 저 찾으셨다고....”
그 뒤 살짝 쭈뼛대며 엄 부장을 쳐다보았다. 방안에 들어서면서 그도 느꼈던 것이다. 부장실 안의 공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말이다.
그런 그의 옆에 이미영이 다가섰고 그런 두 사람을 엄 부장이 쏘아보며 말했다.
“앉아.”
엄 부장이 고개 짓으로 자기 책상 앞에 응접소파를 가리켰다. 그러자 안형수와 이미영이 엄부장이 앉은 상석 소파 양쪽에 알아서 가서 앉았다. 하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지 엄 부장은 한 동안 자기 책상에 더 앉아 있었다. 그렇게 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탁!
엄 부장이 살피고 있던 결재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안 그래도 튀어나온 배를 출렁거리며 책상에서, 그 앞쪽에 위치한 응접소파 상석 자리로 옮겨와 앉았다. 그리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둘....청주로 가라.”
“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안형수가 엄 부장을 쳐다봤다. 이미영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엄 부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위에서 까라니 까야지. 내일부터 ‘FM살롱’은 박언호가 맡을 거야. 메인 작가는 김혜영이 맡을 거고.”
엄 부장의 입에서 박언호와 김혜영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현실을 직감하고 안형수와 이미영이 기겁하며 동시다발적으로 외쳤다.
“부장님!”
그들은 이런 처사의 부당함을 엄 부장에게 성토했다. 아직 설립 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노조 얘기까지 꺼내며 말이다.
“아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맞아요. 이건 노조에서 알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하지만 엄 부장은 그런 그들에게 자기도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을 했다. 하지만 그 발뺌은 사실이었기에 안형수와 이미영도 더 엄 부장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엄 부장에게 그들이 아무리 말한들 이미 내려진 인사발령을 철회시킬 힘은 없었으니까.
“이번 주까지 공가처리가 될 거야.”
엄 부장과 KVS본사 입장에서는 나름 배려를 해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당사자들에게는 다음 주 월요일에 청주 KVS에 출근하라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방으로 좌천 된 게 아니었다. 거기서 그들이 맡을 일이 뭔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 말은....
청주 KVS에서 맨땅에 헤딩하며 프로그램을 맡기까지 또 다시 개고생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짓을 또 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그만두고 말지.”
이미영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막말로 그녀의 입장에서야 작가로 일할 곳이 KVS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건 PD인 안형수도 마찬가지였다. 타 방송국과 종편 방송국에 얼마든지 재취업이 가능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청주 KVS에 가는 대신 과감하게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자 KVS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사표를 깔끔하게 수리했다.
* * *
KVS방송국에서 그것도 인지도 있는 유명 PD나 작가도 아닌 고작 라디오 PD와 작가 하나 날려 버리는 건 내게 있어서 일도 아니었다.
“이런 자잘한 일로 KVS사장에게 전화하는 건....”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거나 진배없었다. 해서 나는 오늘 점심을 같이 먹은 KVS방송국 드라마 국장 도종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타 방송국의 예능 국장과도 친한 걸 보면 안방인 KVS에서 그의 인맥과 막후 영향력 또한 대단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런 내 생각은 정확했다.
“....데 그 두 사람 어디 좀 멀리 보내 줄 수 있을까요? 네. 뭐 가급적 빨리 처리가 됐으면 합니다만.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죠.”
도 국장은 내 말을 듣고 나서 바로 그렇게 해주겠다고 확답을 했다. 뭐 과격하게 내가 두 사람을 잘라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근데 왜 그러냐며 귀찮게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군.”
나로서는 그런 그의 시원시원한 일처리가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러니 KVS라는 거대 방송국에서 국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걸 테지만. 그렇게 도종국 국장과 통화 후 나는 더는 임연수에게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딴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당연히 서진그룹 쪽과 관련 된 생각도 있었고.
“어디....”
나는 민영석이 내가 시킨 대로 서진그룹 인수합병에 관한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견신 시스템의 「개 짖는 소리」 스킬을 통해 그의 주변을 도청, 감청했다. 그랬더니..
“뭐 잘하고 있군.”
내가 서진그룹 회장 자리를 제안해서 일까? 민영석은 거의 쉬지도 않고 그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맡긴 일보다 그의 건강이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에휴....좀 살살 할 것이지.”
이래서 사람의 욕심은 과소평가해선 안 됐다. 나는 이대로 뒀다가 민영석이 서진그룹 회장 자리에 앉기도 전에, 김명진 회장처럼 병원에 드러누울 게 걱정이 됐다. 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민 실장님. 좀 쉬어가면서 하세요.”
-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어리둥절해하는 민영석. 그런 그에게 나는 염려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아아. 네....
영리한 사람이니 내가 한 소리가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겠지. 마지막으로 나는 그가 혹시 방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조언을 했다.
“오너가를 살피는 거 잊지 마시고요. 차미진과 김학수가 다가 아닙니다.”
김명진 회장이 코마 상태에 빠진 후, 서진그룹을 표면적으로 이끌고 있는 건 그 두 사람이다. 하지만 서진일가의 사람은 그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일가가 가진 주식도 결코 무시해선 안 됐다.
-걱정 마십시오. 그에 대해 철저히 준비해 뒀으니까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는 민영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기분 좋게 그와 통화를 끝마쳤다. 민영석 같은 인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 *
그 뒤 나는 퇴근하기 전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윤재구 회장의 근황을 견신 시스템의 「개 짖는 소리」 스킬을 통해 그의 주변을 도청, 감청했다. 그 결과....
“윤 회장이 내일 확실하게 자신의 신변, 뒷정리를 하려는 가 보군.”
윤 회장의 입을 통해서 나는 그가 내 예상대로 보유 중인 10대 그룹 지주사 지분을 넘겨주려 한다는 걸 알게 됐다. 한데....
“으음....윤 회장의 자식들이라....”
윤 회장은 그뿐 아니라 자신의 남은 자식들에 대해서도 이번 기회에 싹 정리를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고 피붙이인 자식들의 아버지였다.
“과연 생각대로 될까?”
당연히 안 될 것이다. 자식들의 말에 분명 흔들릴 것이고....
그런 고로 나로서도 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왜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여기서 나무는 윤 회장이 될 것이고 바람은 그 자식들이니, 나로서는 애초에 바람이 나무로 불지 않게 만들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 일 역시 양태석에게 맡기면 될 거 같았다. 이제는 내 전속 해결사가 된 철수 쪽에게 이 일을 맡길까 했는데 그들은 아무래도 쪽수가 적었다.
그에 비해 윤 회장의 자식들은 많았고. 부자답게 윤 회장은 자신의 호적상에 올린 자식들이 많았다.
윤 회장도 소싯적 어지간히 여자를 밝힌 듯 그의 호적에는 10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올라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죽고 나면 법적으로 상속 상 문제가 복잡해 질 가능성이 충분히 컸다.
아마 이런 점이 윤재구 회장의 장남이자 JG투자운영의 대표인 윤현수로 하여금 성급하게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르게 한 걸 테고 말이다.
하지만 윤현수는 몰랐다. 역모가 실패하면 그가 죽는다는 걸 말이다.
하긴 실패한다고 해도 아버지인 윤 회장이 설마 자신을 죽일 거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역으로 윤 회장에게는 아직 9명의 자식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장남이지만 자신을 죽이려 한 괘씸한 아들 하나쯤 영영 보지 않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고.
-네. 대표님.
양태석은 어김없이 내 전화를 통화 연결 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
“내일 말인데....”
나는 윤재구 회장의 자식들을 내일 하루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 주기를 양태석에게 부탁했다.
서울 최대 조폭 조직 두목인 양태석이다. 그 밑에 조직원들만 수백 명이고. 그러니 윤재구 회장의 남은 9명의 자식들을 통제 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뭐 그들도 가만 안 있겠지만 그래봤자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곳은 공권력 뿐. 하지만 내일 하루, 아니 윤 회장이 내게 10대 그룹 지주사 주식을 넘길 때까지 몇 시간 공권력이 제 역할을 못하게 만드는 건 내게 일도 아니었다.
“검경에 협조 부탁해 놓을 테니까, 그들이 눈치 주면 밑에 사람들 즉시 빼시고.”
-네. 알겠습니다.
“그쪽과 트러블 안 생기게 밑에 사람들 잘 챙겨요.”
-물론입니다.
“내가 앞서 맡긴 일들은....”
-처리 됐거나 지금 처리 중에 있습니다. 염려 놓으셔도 좋습니다.
양태석이 그렇다면 그런 그겠지. 그 역시 내가 아는 한 그쪽으로는 최고 유능한 인재이니 말이다.
* * *
그렇게 퇴근 시간이 다 됐고 나는 먼저 김 비서에게 연락해서 퇴근하라고 했다.
그런 식으로 김 비서를 먼저 퇴근 시킨 뒤 내가 대표실을 나오자 내 수행비서인 김종훈과 문대식이 나란히 선글라스를 끼고 서 있었다.
“뭐야?”
실내에서 무슨 선글라스를 낀단 말인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쏘아보았고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끼고 있는 선글라스를 벗어보라고 말이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푸웃....푸하하하하....”
나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흘기던 두 사람. 하지만 이내 서로를 쳐다보며 쌍심지를 켰다.
아까 같이 계단실로 들어가더니 거기서 한판 제대로 뜬 모양이었다. 한데 의외인건 김종훈이었다. 물론 그가 국정원 최정예 요원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내 경호팀장인 문대식의 왼쪽 눈을 판다 눈으로 만들어 놓을 줄이야.
뭐 김종훈도 오른쪽 눈이 판다 눈이긴 했지만 체구로 봐서, 둘이 싸울 경우 나도 문대식이 압도적으로 이길 거로 봤으니까.
“쯧쯧....문 팀장....실망이야.”
내가 혀를 차며 문대식을 쳐다보고 말하자 그가 나를 볼 면목이 없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반면 김종훈은 턱을 들어 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걸 보고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다가 이내 앞장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내 주위를 대기하고 있던 경호팀원들이 에워쌌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주차장에 대기 중인 차에 타자, 문대식이 퉁명스레 물어왔다.
“어디로 모실까요?”
퇴근 이후 내 스케줄에 대해 내가 따로 김 비서에게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경호팀장인 문대식도 지금부터 내가 어디 가서 뭘 할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김 비서도 내 여자인데 그런 그녀에게 오늘 저녁에 선 보러 간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걸 지금 확인해야지.”
나는 핸드폰을 꺼냈고 오늘 저녁에 나와 선보기로 약속이 잡혀 있는 류상현 경기 도지사의 딸 류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제법 상냥한 여자 목소리. 나는 일단 그녀가 류지혜가 맞는지부터 확인했다.
“류지혜씨 되십니까?”
-그런데요?
“오늘 그쪽과 선보기로 한 백준열입니다.”
-....
내가 누군지 밝히자 정작 류지혜가 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