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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크으. C발. 독하네.”
그 동안 비싼 술만 마셔 온 박성철에게 국산 양주는 쓰기만 할 뿐 맛은 없었다.
하지만 취기만큼은 빠르게 올랐다. 이러니 돈 없고 별 볼 일 없는 놈들이 이런 술을 마시는 거겠지. 하지만 그는 달랐다. 급이 다르달 까? 해서 박성철은 뚜껑을 따 놓고 한 모금 마신 국산 양주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리고 설수연이 그가 마실 술을 사올 때까지 기다리며 아까부터 하던 생각을 마저 했다.
“바득....한혜원. 네가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네년이 어떻게 나한테....”
지금 생각해도 아내의 그 말과 행위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자세한 건 내일 강 부장 만나서 얘기할 테지만, 그는 최악의 경우 아내를 없애 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한혜원이야 그렇다 쳐도 자신의 두 아들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혼 후 아내가 아이들의 양육권을 가져간다고 해도, 어차피 그녀가 죽고 없으면 아이들의 양육권이 아빠인 그에게 돌아온다는 것 정도의 법률 상식은 박성철에게도 있었다.
“근데 왜 이리 안 와? C발. 수연이 이것도 지금 날 무시하는 거 맞지?”
설수연이 집을 나간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박성철은 괜한 트집을 잡고 있었다.
박성철은 씩씩 거리다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근데 이 집 안에서는 금연이었다.
설수연이 그에게 담배만큼은 집 안에서 피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고, 박성철은 여태 그녀의 그 부탁을 들어 줘 왔다. 하지만 지금 열 받은 박성철은 그녀와의 약속 따윈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후우....”
이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박성철은 그걸 입 밖으로 길게 내뿜었다. 그러며 생각 난 게 10여 년 전이었던가? 그가 처음 대마초를 피웠을 때가 생각났다.
“C발....한 대 생각나네.”
지금도 그라면 충분히 대마초를 구해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끝장이었다.
대마초 피우다 걸려서 경찰에 잡혀 갔을 때 부친이 그를 빼낸 뒤, 그의 뺨을 수차례 때리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대마초 피우다 걸리면 그길로 널 남해 섬에 있는 정신 병원으로 보내 버리겠다고 말이다.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키는 부친이었다. 한 입에 두 말할 양반이 아닌 건 누구보다 그 아들인 그가 잘 알았다.
당연히 정신 병원에서 평생을 썩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박성철은 그때 바로 대마초를 끊었다. 한데 그 대마초가 지금 그에게 간절했다.
철컥!
그때 술을 사러 갔던 설수연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에 가득 술과 안주거리를 사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그걸 본 박성철이 빽 소리쳤다.
“야! 왜 이리 늦어?”
하지만 그가 버럭 화를 내도 설수연은 끄덕도 하지 않고 되레 그를 향해 물었다.
“집에서 담배 폈어요?”
그녀의 입에서 담배 얘기가 나오자 그제야 그녀의 부탁이 떠오른 박성철. 하지만 그의 심성은 이미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져 있었다.
“그래. 한 대 피웠다. 그래서 뭐?”
“아니. 나하고 이 집에서 담배 안 피우기로 약속했잖아요?”
“시끄러. 빨리 술이나 가져 와.”
박성철은 더 이상 설수연과 말 상대하기 싫었다. 말이란 것도 말이 되는 상대와 얘기를 해야 말이 통하지, 약속 운운하며 그를 짜증나게 하는 설수연과는 딱히 긴 말 하고 싶지 않았다.
도끼눈으로 박성철을 쏘아보던 설수연. 하지만 박성철이 대 놓고 그녀를 무시해 버리니 그녀도 별 도리가 없었다.
“하아....”
긴 한숨을 내 쉰 뒤 설수연은 그래, 어디 마시고 싶은 대로 퍼 마셔 봐라며 사 온 술을 죄다 박성철에게 가져 다 주었다. 박성철은 그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술에 취해 뻗어버렸다.
“쯧쯧....”
그럴 줄 알았다며 박성철을 보고 혀를 차던 설수연은 뻗은 그를 그대로 두고 자기 방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평소라면 그가 덮을 이불이라도 한 장 챙겨 줬을 텐데,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박성철에게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 * *
다음날 아침. 오늘 뮤지컬 때문에 미팅이 있었던 설수연. 하지만 그 미팅 시간은 오전 11시로 아직 한창 남았건만 그녀는 외출 준비로 분주했다. 씻고 화장하고 옷 챙겨 입고, 그렇게 외출 준비를 끝낸 뒤 차 키를 챙겨 든 그녀는, 어젯밤에 술 쳐 먹고 거실에 뻗어서 자고 있는 박성철을 일별하고는 곧장 아파트를 빠져 나갔다.
“으으으....추워.”
박성철은 이불 하나 없이 오들오들 떨면서 거실 바닥에서 계속 자고 있었는데, 어차피 여기 있어 봐야 박성철의 시다바리 노릇이나 하다가 그에게 욕이나 쳐 먹을 것이 뻔 한터라, 설수연은 더 이상 이 집에 있기 싫었다.
그래서 일을 핑계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물론 박성철이 깨서 미쳐 날 뛰지 않게 메모 한 장은 남겼다.
“뭐 그 인간도 출근은 해야 할 테니....”
혹여 박성철이 그 더러운 성질에 못 이겨서 그녀 집을 다 때려 부셔 놓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마 잠에서 깬 그는 출근하기 바쁠 테니 그러지는 않을 터였다.
아버지 회사에 다니는 박성철은 아버지만큼은 무서워했다. 때문에 늦더라도 출근을 꼬박꼬박했다. 그걸 알기에 설수연은 이렇게 안심하고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침으로 뭘 먹지?”
어차피 지금 그녀에게 넘쳐 나는 게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설수연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의 자기 차에 타서 근처 주유소로 갔다. 그리고 차에 기름을 넣은 뒤, 차를 몰고 오늘 만나기로 한 뮤지컬 관계자와의 미팅 장소와 가까운 해장국 집으로 갔다.
“술은 그 인간이 쳐 마셨는데....왜 내가 해장국이 당기는 건지....”
뭐 어째든 설수연은 당장 해장국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해장국 집으로 가서 특대로 해장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아아. 배불러.”
부른 배를 두드리며 근처 카페로 가서 차 한 잔을 마신 설수연. 그러며 그녀는 좀 있다가 만날 뮤지컬 관계자와의 미팅에 대해서 생각을 좀 정리했다. 그쪽은 그녀가 이번 뮤지컬의 주, 조연으로 참가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녀를 좋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수연은 하고 있는 연극 공연 때문에 생각을 해 보겠다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해 놓은 상태였다. 왜냐하면 박성철 그 인간 때문에 말이다.
아마 오늘 만나게 될 뮤지컬 관계자는 그걸 확실하게 매듭짓고 싶은 거 같았다. 해서 설수연은 제법 심각하게 고심을 했고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래. 하자. 어차피 연극도 이달까지 끝이니까.”
새로운 도전에 누구 때문에 늘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설수연. 하지만 그녀도 지금껏 참을 만큼 참았다.
“좋아. 해 보자.”
어제 보니 박성철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강 부장이라는 그 조폭새끼와 통화하는 걸 보니 분명 또 불법적인 짓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고.
해서 어젯밤에 쉬이 잠 못 들며 생각해 본 설수연은, 어쩌면 지금이야 말로 자신이 박성철에게서 벗어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녀가 이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번 주말에 만났던 그 대형 연예기획사의 젊은 임원 때문이었다.
그 임원은 설수연 또래의 여자였고, 그녀가 처한 사정을 듣자 피식 웃으며 걱정 할 거 없다고 했다. 그 상대가 누가 됐던 자신이 커버 쳐 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며 그 상대가 혹시나 불법적인 짓을 저지르는 게 있으면 자신에게 바로 알려 달라고 했다. 바로 감옥에 쳐 넣어 버리겠다며 큰소리 떵떵 치면서. 자신이 이래봬도 경찰 쪽에 연줄이 있다나?
근데 신기하게도 그 임원의 말이 설수연에게 크게 위로가 됐다. 또 이상하게 믿음도 갔고.
해서 설수연은 그 임원을 믿고 한 번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우선 집부터 팔자.”
박성철이 마련해 준 집이지만 어째든 그 집 주인은 그녀였다. 설수연은 박성철과 관계를 끊기 위해서 그와의 접점인 그 아파트부터 팔아 치우기로 했다. 물론 박성철이 저지르려는 불법적인 짓에 대해서 그 임원에게 알려 주는 게 먼저였다.
설수연은 뮤지컬 관계자와 약속 장소로 가면서 그 연예기획사 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그 임원이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거처럼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설수연 배우님.
“안녕하세요. 차 부문장님.”
그 임원은 바로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고 또 제일 규모도 큰 대형연예기획사, JYB엔터 차은석 부문장이었다.
* * *
이제는 명실 공히 JYB엔터의 실세 중 한 명이 된 차은석. 임원이 된 그녀는 회사에게 제공한 기사 달린 차를 타고 매일 편하게 출근을 했다. 하지만 출근한 후 그녀는 매일 격무에 시달려야 했다. 백준열 대표가 믿어 주는 만큼 그 성과를 내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밖에 없었으니까. 특히 최근 두 개의 신인 걸그룹을 론칭하면서 차은석은 안 먹던 두통약까지 먹었다. 커피야 옆에 달고 살았고. 그랬던 걸그룹들의 준비가 모두 끝나고 이제 그 승패를 하늘에 맡긴 차은석.
그러니까 걸그룹들이 데뷔하기 직전까지, 그녀가 할 일이 전부 끝이 나서 그녀의 손을 떠난 것이다.
백준열 대표가 두 걸그룹 모두 성공할 것을 장담한 만큼 차은석도 더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정시에 퇴근한 그녀는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을 만났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그래도 소위 말해 잘 풀린 케이스의 동기들이었다.
경찰대를 그만두고 바로 편입으로 들어가면서 동기들의 나이는 그녀와 비슷했다. 그녀가 한 살 빨리 초등학교에 간 것도 거기에 한몫 했고.
“이야. 부럽다.”
“나는 언제 저런 기사 달린 차를 타 보나....”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신경 꺼.”
“뭐?”
“여기 있는 우리들 중 대기업 임원이 될 사람이 있을 거 같아?”
“그, 그건....”
대기업 임원. 그건 군대에서 별을 다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이 자리에 모인 차은석의 동기들은 누구도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아직 과장을 단 사람도 없었으니까.
차은석은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속으로 후회를 했다. 괜히 기사 달린 차를 타고 여기 와서 말이다.
“자자. 그래도 우린 다 대기업 다니잖아. 기죽을 거 없어.”
그나마 차은석과 대학 다닐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기가 그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띄웠고, 한 두 잔씩 술이 들어가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 대학 다닐 때부터 술을 못 마셔서 동기들의 민폐녀로 불렸던 양은지가 차은석에게 와서 말했다.
“은석아. 우리 그만 나가자. 애들 너와 나 여기 있는 거 싫어하는 거 같은데.”
양은지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그랬다. 그녀의 눈치를 보는 동기부터 그녀를 철저히 무시하는 동기까지. 그들은 이 자리에 차은석이 있는 걸 불편해 했다.
“그러자.”
해서 차은석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양은지와 같이 동기들이 그렇게 부러워하고 질투하던 그 기사 딸린 차를 타고 홍대 근처로 향했다.
“저기야. 저기.”
그리고 양은지가 사촌 동생에게 받았다는 연극 티켓 두 장. 그 연극이 상연 중이라는 홍대의 한 건물 앞에서 내린 두 사람은 그 건물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공연 티켓을 내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막 시작 된 연극을 관람했다.
“아아....”
별 생각 없이 양은지와 공연을 보던 차은석. 그런 그녀 눈에 무대 위에서 유독 빛나는 여배우 한 명이 보였다.
차은석의 눈에 그녀는 이미 스타, 별처럼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차은석 보고 어필하는 듯 했다.
[너 대체 뭐하고 있는 거니? 나 여기 있는데. 어서 와 나를 데리고 가서 스타로 만들지 않고서....]
라고 말이다.
* * *
연극이 끝나고 나서 차은석 옆에 양은지가 말했다.
“어때? 생각했던 것 보다 재미있었지?”
“어? 어어. 그래.”
사실 연극의 내용이 뭔지도 차은석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연극보다 여 주인공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동시에 그녀를 반드시 JYB엔터로 데려 와야겠는데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접근할지 그 고민 중이었다.
“잠깐만....”
해서 차은석은 양은지는 그 자리에 두고 먼저 몸을 일으켜서 연극 무대 뒤쪽 배우 대기실로 향했다.
“손님. 여기는 관계자 외에는....”
그런 그녀를 연극 관계자가 가로막았다.
“오하영 역의 배우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그 연극 관계자에게 차은석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JYB엔터 특수 1부문장....헉! 상, 상무이사?”
차은석이 요즘 그 유명한 JYB엔터에서 나온 사람이란 것만으로도 쇼킹한데, 거기 임원이라는 사실에 연극 관계자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