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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허어. 내 어찌 그런 자에게 JG투자운영을 맡기려 한 건지....”
이거야 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려한 꼴이지 않나? 윤재구는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 된 많은 전화번호 중 하나를 콕 집어 거기로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박 상무. 오랜 만이야.”
-그러게요. 제가 회사를 나온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윤재구의 전화를 받은 박 상무라는 사람은 살짝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윤재구는 상대의 반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자기 페이스로 계속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폐지 주우러 다니는 게 잘 지내는 건가?”
-....
“돌아 와. 내일 당장.”
-네?
“자네에 대한 뒷조사 결과 모든 게 모함임이 밝혀졌어.”
-하지만....
“구 전무 때문이면 걱정 할 거 없네. 그는 한 동안 회사에 없을 테니까.”
-그, 그게 무슨....
“배임, 횡령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할 테니 말이야.”
-....
“왜? 오기 싫어? 그럼 김 상무 부르고.”
윤재구의 김 상무라는 말에 상대 박 상무가 다급히 외쳤다.
-갑니다. 가.
“차 보낼 테니까 그 차타고 출근해. 주소는 그대론가?”
-아, 아뇨. 바뀌었습니다.
“그럼 바뀐 주소 인사팀에 당신이 알려 줘.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네. 회장님.
“자세한 얘기는 내일 출근해서 하자고.”
윤재구는 통화를 끝내자 곧바로 내일 아침 서울 가는 7시 5분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그 시간에 이코노미 석은 이미 매진이었지만, 비즈니스 석은 좌석이 하나 남아 있었다.
“서울에 다시는 안 가려 했건만....”
아무래도 회사 때문에 서울에 갈 수밖에 없었다. 이왕 간 김에 윤재구는 백준열의 문제도 다 해결해 버리고 홀가분하게 제주도로 돌아 올 생각이었다.
“녀석이 뭘 달라고 할지야 뻔하지.”
백준열은 재벌 3세다. 그것도 국내 최고라 할 수 있는 삼명그룹의 후계자.
그런 녀석이 자신에게 돈이나 부동산 따윌 달라고 할 리 없었다. 거기다 녀석은 자신처럼 투자사를 운영 중이었다. 그것도 요즘 제일 잘나가는....
“내 밑천을 제대로 털리게 생겼군.”
윤재구가 아직 대한민국 경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초창기 대기업들의 모기업 주식을 자신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대기업에 있어 모기업의 주식 3%는 결코 적지 않은 지분이었다. 그 지분으로 인해 경영권의 향배가 좌지우지 될 수도 있었으니까.
현재 윤재구는 그 대기업의 모기업 주식을 3-5%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해서 몇몇 대기업들이 아직까지 윤재구의 눈치를 살폈고, 그걸로 윤재구는 대한민국 경제계에 여전히 제법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한데 그 대기업들의 모기업 주식을 이번 기회에 누군가에게 내 주어야 할 거 같았다.
그 누군가는 바로 백준열이었고. 원래는 그 주식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나눠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물려줘 봐야 그건 오히려 자식들에게 독이 될 게 뻔했다.
그가 죽고 나면 그 대기업에서 무슨 수를 쓰든 자신들의 모기업 주식을 회수해 가려 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자기 대신 구재경을 내세워서 후손들을 지켜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틀린 거 같았다.
“하긴 누굴 믿어.”
자식도 애비를 죽이려 하는 마당에 말이다. 윤재구는 이번 기회에 자기 소유 주식을 싹 다 정리해 버리기로 했다. JG투자운영도 인수할 투자사가 있으면 거기로 넘겨 버리고 말이다. 그리고 남은 자신의 개인 자산을 자식들에게 나눠주고, 그렇게 속세의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린 채 제주도로 돌아와서 여기서 죽을 생각이었다.
해서 이번 서울 행에서 그는 자식들에게도 확실히 주지 시켜 둘 생각이었다. 그가 죽고 나면 제주도의 집과 재산은 전부 사회에 환원 될 것임을 말이다.
* * *
박범수는 3년 전 JG투자운영의 상무로 윤재구 회장의 최측근 인사였다. 하지만 당시 구재경 이사와의 사내 경쟁에서 뒤로 밀리면서 결국 퇴출 되는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당시 임원들의 세대 교체를 원하고 있었던 윤재구 회장은 박범수를 비롯해서, 그 위의 전무 1명과 상무 2명을 같이 내쳤다.
그 뒤 구재경 상무가 주축이 되어서 JG투자운영은 자체 내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 지금의 탄탄한 JG투자운영이 될 수 있었다.
그 공을 인정한 윤재구 회장은 제주도에 가기 전 구재경 상무를 전무로 승진시켜서 실질적으로 JG투자운영을 경영하게 했다. 그 뒤 JG투자운영의 주요부서는 구재경 전무 사람으로 채워지고 거기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이 꽤나 많이 퇴사를 한 상태였다.
박범수는 퇴직 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퇴직금을 비롯해 주변 지인들의 투자를 받아서 투자사를 창업했다. 하지만 대차게 말아먹고 빚더미에 앉게 된 그는, 이혼 당하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고 길바닥에 나앉았다.
나이 덕분에 어디 취직도 하지 못하고 폐지나 주우러 다니던 그에게, 윤재구 회장의 전화가 걸려 온 건 정말 천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무엇보다 내일 당장 출근하라는 윤 회장의 말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던 박범수. 그는 자신의 볼을 손으로 꽉 꼬집었다.
“아악! 아프네. 아파.”
그랬더니 볼이 떨어져 나갈 거처럼 많이 아팠다. 순간 이제 말라 버린 줄 알았던 그의 두 눈에서 굵은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차.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내 정신을 차린 박범수. 그는 예전 자신의 명함을 찾아서 JG투자운영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거기 인사팀 부탁드립니다.”
박범수는 JG투자운영 인사팀으로 전화를 돌리게 해서 자신이 누군지 밝히고, 자신이 사는 곳이 어딘지 그 주소를 메모로 남겼다. 나머지야 윤재구 회장이 어지간히 잘 알아서 챙길 것이고.
그 뒤 잠시 망설이다가 박범수가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건 곳은....
“여, 여보. 나야.”
-왜 전화했어요? 내가 다신 전화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박범수는 작년에 헤어진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업이 망하면서 집도 절도 없어진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중 아내는 현재 천안에 있는 장모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나이 많으신 장모님이 오늘 내일 하고 있어서, 그 장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집은 처남이 팔아치울 거라 아내는 또 갈 곳이 없어졌다.
그런 사정을 아내의 여동생인 처제에게 전해 듣고 박범수가 가슴 아파 얼마나 술을 마셨던가?
뭐 그런다고 해서 해결 될 일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가 JG투자운영으로 복귀하면 임원을 위한 복지 일환으로 오피스텔이 따로 제공 되었다.
그 오피스텔에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불러 들여서, 예전의 가족이 함께 모여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혼한 상태의 아내가 그의 그런 말을 들어 줄지는 아직까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사이 아내에게 딴 남자라도 생겼다면....
박범수는 불안 불안해하며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보.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그러자 전처가 빽 소리쳤다.
-미쳤어요? 아니 노망이 났나? 내 나이가 몇인데....이 나이에 무슨 남자를 만나요?
그러고 보니 그의 아내도 환갑이 낼모레다. 자신만 나이 먹는 게 아니라 그의 아내도 그 동안 열심히 나이를 먹어 온 것이다.
“미, 미안. 내가 괜한 말을....”
-그런 미친 소리 할 거면 다시는 당신 전화 안 받을 테니 그런 줄 알아요.
“잠깐만. 할 말이 있어.”
-하아. 그러니까 그 말을 빨리 하라고요. 나 지금 친구 마트에서 알바 중이라고요. 바쁘다고 바빠!
“알았어. 바로 말할게. 여보. 나 복직 될 거 같아.”
-뭐,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죠?
“윤 회장이 전화 왔어. 내일부터 회사 도로 나오래.”
-진, 진짜요?“
“어. 차 보내 주신다는 거 보니 옛날 자리로 복귀할 거 같긴 한데....”
-상, 상무로 돌아가면....거기 임원들에게 오피스텔 제공하잖아요?
역시 그의 전처도 알고 있었다.
“맞아. 해서 말인데 당신과 아이들....다시 서울로 올라와도 될 거 같은데....”
-....
잠시 말이 없던 아내. 하지만 이내 그녀의 울음소리가 박범수의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흑흑흑흑....내일 당장....서울 갈게요....아이들은 서울 있으니까....당신 복직 되면 오피스텔 주소하고 몇 호인지나 빨리 내게 알려줘요.
“그럴게. 그럼 내일 거기서 보자.”
-뭐 그러던지.
박범수는 그렇게 전처와 무사히 통화를 끝내고 나서 두 팔을 번쩍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외쳤다.
“됐다. 됐어. 이제 예전으로 되돌아가는 건만 남았다.”
박범수는 자신이 복직 되면 아내와 자식들과 다시 한 가정을 이뤄 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으음....”
하지만 그가 복직이 된다고 해도 과연 회사에서 버틸 수 있을까가 걱정이 됐다.
보아하니 그의 상대는 구재경 전무였고, 현재 JG투자운영은 구 전무의 사람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회사에 복직해 들어간다고 해도 과연 그가 얼마나 목소리를 낼지 알 수 없었다.
내일 윤 회장을 만나보면 알겠지만 윤 회장이 자신의 손에 어떤 칼을 쥐어 줄지도 아직 정확하게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박범수는 지금 그가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는 다시 폐지나 주우러 다녀야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뿔뿔이 헤어져서 말이다. 그러니 박범수는 확실하게 동기부여가 됐다. 내일 복직 되면 죽을 각오로 일할 생각이었다. 윤 회장이 죽으라고 하면 설사 죽는 시늉까지 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려면....사람이 필요해.”
박범수는 자신이 JG투자운영에 있었을 때 자신의 오른팔, 왼팔 노릇을 했었던 서 부장과 정 부장에게 연락을 했다. 두 사람 역시 박범수가 퇴출 되고 몇 달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나왔다. 작년 까지 어떻게 연락이 되었지만 박범수가 사업이 망하고 나서 두 사람과 연락이 끊긴 상황. 하지만 그가 JG투자운영에 복귀한다면 반드시 그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니면 그들을 대신할 다른 사람을 소개 받던지. 그렇지 않으면 복귀하더라도 자기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없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박범수로서는 지금 전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 할 수밖에 없었다.
“받아라. 제발....”
* * *
차는 MVC방송국으로 갔지만 최종 목적지는 방송국 정문 앞에 위치한 건물 10층에 위치해 있는 최고급 일식집 ‘겐지’였다. 정확한 약속 시간은 12시였지만 나는 그보다 10분 정도 빨리 그곳에 도착했다.
“예약하셨나요?”
그곳 종업원의 물음에 내 수행비서 김종훈이 대답했다.
“네. 도종국이란 이름으로....”
“아네. 이쪽입니다.”
드문 경우지만 오늘 자리를 주선하고 여기를 예약한 게 전부 칠복이 아빠 도종국, 그러니까 KVS방송국 드라마 국장 도종국이었다. 그래도 도종국은 나보다 먼저 여기 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일식집은 널따란 개방형이었지만 안쪽으로 가자 프라이빗한 개인 룸이 3개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곳으로 종업원이 안내를 했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자리에 앉고 5분쯤 지났을까? 도종국 국장이 룸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국장님.”
그런 그를 내가 반갑게 맞았다. 내가 도 국장과 웃으며 악수를 하는 사이, 내 곁에 서 있던 김종훈이 눈치껏 알아서 조용히 개인 룸 밖으로 나갔다.
“칠복이 잘 지내죠?”
“하하하하. 네. 뭐....대표님이 처음 우리 칠복이 얘기를 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자신을 구해 준 내게 고마움을 전하겠다고 만났던 자리. 그 자리에서 내가 뜬금없이 도 국장이 키우던 애견 이름을 얘기하니 도 국장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종국 당신이 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칠복이 때문이었어. 그러니 당신 그 개새, 아니 칠복이에게 잘 해주라고.’
당시 어색했던 그 자리가 칠복이 얘기로 인해 화기애애하게 변했고, 나는 같은 애견인으로서 도 국장과 더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도 국장이 MVC 예능국장과 만남을 주선해 주기로 했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종국 선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로 나를 다 부르고....”
MVC 예능국장 홍윤석이 룸 안으로 들어오며 도종국을 보고 말하다가, 그와 마주보고 같이 앉아 있는 나를 보고서 말을 얼버무렸다.
“이리 와.”
그런 그를 향해 도종국이 손짓을 했고, 홍윤석은 쪼르르 도종국이 앉아 있는 자리 옆에 앉으며 물었다.
“누구에요?”
그러자 도종국이 싱긋 웃으며 내게 고갯짓을 했다. 그걸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 명함을 꺼내서 홍윤석에게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JYB엔터 백준열 대표입니다.”
“JYB엔터? 그쪽이 정말 거기 대표라고?”
홍윤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옆에 도종국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건드리며 어서 명함 받으라고 턱짓을 하자, 그제야 못이기는 척 손을 내밀어서 내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힐끗 내 명함을 살핀 후 나를 보고 말했다.
“보아하니 내가 누군지는 아는 거 같으니까, 내 명함은 안 줘도 되지요?”
“네. 그럼요. 홍 국장님.”
“목 아프니까 앉아요.”
JYB엔터가 싫은 건지,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모르지만 홍윤석은 내 소개를 듣고 나서 별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