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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611화 (607/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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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양태석이 내게 한 말은 사실상 최철기의 무용담이었다. 그가 어떻게 조직 내부의 배신자를 처리하고 또 남은 간부들을 휘어잡았는지 말이다.

‘역시....’

내 예상대로 조폭 출신이었던 최철기는 태석파에 가자마자, 조직 내부에 암적 존재를 제거하고 자신의 자리를 꿰찼다. 그것만 봐도 최철기를 조폭 조직에나 박아 두는 건 인력 낭비였다.

‘1년이면 충분하겠어.’

혹시나 1년이 짧으면 2년으로 파견 기간을 늘려야 하나 하는 내 생각은 하나마나한 걱정에 불과했다.

-....데 대표님 안목이 어디 가겠습니까? 괜찮은 사람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철기씨가 거기 조직의 기틀을 확실히 잡아 줄 겁니다. 태석파가 향후 10년은 끄떡없이 버틸 수 있게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대표님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네. 뭐....그리고 부탁 좀 하려고요.”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림산업이라고....”

나는 양태석에게 박성철이 곧 헤어질 자신의 아내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데, 그걸 좀 중간에서 잘 커버 쳐 달라고 부탁했다. 내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양태석. 그가 내 말을 다 듣자마자 평소와 달리 기가 차하며 말했다.

-뭐 그런 새끼가 다 있습니까? 아무리 이혼 할 사이라지만 그래도 살 부비고 살았던 자기 여자를 해치려 하다니요?

“그러게요. 살다보니 그런 놈도 다 있네요. 아아. 그리고 죽이는 데 까지 가지는 말고요.”

-네. 다시는 그짓 못하게 제대로 손 봐 주도록 하겠습니다.

양태석이 제법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어허. 이러면 박성철이 좀 불쌍해지는데....’

왜냐하면 사람이 산다고 다 사는 게 아니다. 살아도 죽은 건만 못하게 살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그러니까 양태석을 제대로 화나게 만들면 그는 아주 지능적으로 그 사람을 살아도 산 게 아닌, 오히려 죽는 게 더 낫다고 여길 정도로 비참한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나야 그걸 알면서 일부러 양태석에게 박성철이 어떤 놈인지 얘기를 한 거고. 이에 격분한 양태석은 아마도 박성철을 확실히 손봐 줄 거였다. 좀 많이 신경을 써서 말이다.

“그럼 수고 좀 해 줘요.”

-수고라니요. 잘 처리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그렇게 양태석과 통화를 끝낸 뒤 시간을 확인한 나는 아직 출근하기까지 30분 정도 시간이 남은 것을 확인하고 TV를 켜려는 데 내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서지연의 전화. 이제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같이 있어야 할 내가 없자 이렇게 전화를 건 거 같았다.

“네.”

나는 그 전화를 받았다. 그랬더니 그녀가 버럭 화를 내더니 따지고 들었다.

-너 어디야? 어떻게 나를 두고 혼자 갈 수 있어?

“미안. 누구 좀 만나야 해서.”

-만나? 누구? 새벽에 누굴 만나?

“그게....

나는 그녀가 화를 내도 차분히 김종훈 얘기를 했다. 뭐 이제 서지연도 내 여자 중 한 명이 되었으니 이 정도는 참고 또 해줄 수 있는 한 배려도 해 줘야지.

원래 어제 김종훈과 만나기로 했는데, 누구랑 만나서 빠구리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를 만나지 못했고, 그로인해 그가 밤 새 나를 기다렸다는 걸 말이다.

-아니. 연락이 안 되면 그냥 집에 기어 들어갈 것이지. 무슨 그런 미련한 짓을....

서지연은 나와는 감성 자체가 달랐다. 나는 그런 우직한 모습의 김종훈을 좋게 봤는데, 서지연은 그런 그가 미련 곰탱이 같은 자라며 질색을 했다.

뭐 어째든 그걸로 해명이 된 듯 서지연의 화가 완전히 누그러졌다. 나는 혹시 그녀가 나보고 싶다고 29층으로 올라오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녀도 출근을 해야 하고, 특히 여자는 치장을 해야 하는 만큼 지금부터 시작해도 그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니 섣불리 나를 부르지는 못하는 것일 테고.

-오늘 끝나고 뭐해?

내가 매일 묵는 호텔을 바꾸듯 한 여자를 연이어 만나지는 않는다. 그 버릇 때문일까?

“약속 있어.”

-여자?

“....”

나의 침묵이 대답이 된 걸까? 핸드폰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지연,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 * *

서지연과 통화 직후 문대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내려 가.”

나는 그 말만 하고 문대식의 말은 더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서 로얄 스위트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나는 로비를 가로질러 호텔 출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였다.

“준열아!”

누가 나를 불렀다. 나는 걸음을 늦추며 시선을 왼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로비 한쪽 소파에 앉은 채 웬 젊은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구지?’

당장 내 기억 속에 저 남자는 없다. 그렇다는 건 백준열에게 있어서 지인으로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란 거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고 그 남자가 그런 나를 보고 진득하게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오랜만이지?”

“....”

나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 사이 나는 눈앞의 젊은 남자에게 「개눈깔」과 「개코」아이템을 사용했다. 상대가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도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간파할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상대가 내게 적의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보랏빛이 짙은 게 질투와 부러워하는 감정이 강했다.

“뭐야? 나 기억 못해?”

“....”

나는 또 대답 대신 그와 잡고 있는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그리고 네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내 이름을 대 놓고 부를 정도면 나보다 나이가 밑은 아니다. 그러니까 동갑내기 친구이거나 윗사람이란 건데 반말을 하기도, 존대를 하기도 좀 애매해서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랬더니 상대가 그런 내 반응에 답답했던지 알아서 자기가 누군지 먼저 밝혔다.

“나야. 민혁이. 네 고등학교 동창.”

중학교 동창에 이어서 이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한데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가 없었다. 고로 지금 내 앞의 녀석과 나는 적어도 친한 친구 사이는 아니라고 보면 됐다. 반면 녀석은 내가 자신을 몰라 보는 게 어지간히도 서운한 모양이었다.

“2학년 때 네 옆에 앉아서 같이 밥도 먹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녀석은 자꾸 내게 고등학교 시절 기억을 강요했지만 백준열의 기억을 전부 다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내 입장에서 그런 학창 시절,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기억이 날 리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만 질질 끌 수는 없는 노릇. 거기다 녀석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주변 시선이 우리 쪽으로 집중 되고 있었다. 당장 연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 기억 나. 너희 엄마 김치가 맛있었지.”

밥도 같이 먹었다니 이전 내 삶에 비춰 꺼낸 말인데 그게 먹혔다.

“자식. 기억하는구나? 우리 엄마 김치 맛있다고, 네 햄 소세지와 바꿔서 먹었지. 그때도 잘 살았던 거 같았는데 넌 여전하구나?”

녀석이 내 옷차림과 특히 내 손목의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어. 뭐....”

한데 딱 봐도 녀석은 내가 재벌 3세라는 걸 모르는 듯 했다.

“너도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 보니까 바이어 픽업 하러 온 모양이네? 아니면 방 잡아주고 가는 중?”

“어. 뭐....후자?”

“난 대성 다녀. 너는?”

“나? 나는....삼명.”

“와우. 좋은 데 들어갔구나? 난 삼명 엿 먹고 대성 들어갔는데. 부럽다.”

지금 백준열의 나이에 직장, 특히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를 우연히 만났을 때 나눌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신선하네.’

나로서는 지금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내가 몇 년 젊어 진 기분이랄까?

“동창회에 좀 나와. 아 맞다. 너 모르겠네. 재혁이가 우리 학교 출신 대기업 다니는 애들 위주로 동호회를 만들었거든. 너도 자격이 되니까 거기 가입하면 되겠다.”

“최 대리!”

그때였다. 누가 내 고등학교 동창을 불렀고 그쪽을 돌아 본 녀석이 움찔하더니 황급히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의 명함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연락 줘.”

그리곤 휑하니 자신을 부른 사람이 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고, 그 사람 앞에서 뭘 그리 잘못했는지 굽실거리더니 이내 올라 온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녀석의 명함을 봤다.

“대성ENG, 최민국 대리?”

당연히 그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명함까지 받았고 또 고등학교 친구까지 만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녀석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건 좀 그랬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최민국이 누군지 생각 좀 나게 해 주라고 말이다. 그건 백준열의 기억의 장막너머 꽁꽁 감추고 있는 기억의 편린들 중 일부를 알려 달라는 내 나름의 어필이었다. 다행히 녀석이 그 어필을 들어 주었다.

“아아....최민국. 기억났다.”

녀석의 말대로 내가 녀석에게 햄 소세지 반찬을 주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준 거라기보다는 뺏겼다고 해야 맞았다. 대신 녀석의 도시락을 내가 먹었고. 쉰 김치 뿐인 녀석의 도시락은 더럽게 맛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백준열은 지금껏 김치를 잘 먹지 않았다.

즉 녀석은 나와 그 사이 기억을 왜곡하고 있었다. 나를 괴롭히고 내 도시락을 뺏어 먹은 것을 마치 나와 같이 도시락을 먹은 걸로 말이다.

그러니까 때린 놈은 기억 못하고 처 맞은 놈만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꼴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왜 재벌 3세씩이나 되는 백준열이 고등학교 때 그런 꼴을 당했냐는 거다. 그러나 백준열이 내게 제공해 준 최민국에 대한 기억의 편린은 딱 거기까지 였다.

왜 그랬는지, 또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백준열의 기억은 내게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그걸로 미뤄봐서 적어도 당시에 대해 백준열이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뭐야? 왕따나 괴롭힘이라도 당한 건가?”

뭐 녀석이 말하고 싶지 않은 걸 내가 억지로 꺼내서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출근 안 하실 겁니까?”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문대식이 내 옆에서 물었다. 하긴 출구로 잘 걸어오던 내가 갑자기 발걸음을 옆으로 틀어서 누군가 만나 악수까지 나눴는데 ,정작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도 호텔 출입구로 나오지 않고 멍 때리고 서 있으니 그게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해야지. 출근.”

나는 그 말 후 불퉁한 얼굴로 문대식 옆을 스쳐 지나서 곧바로 호텔 출입문으로 쭉 걸어갔다. 그런 내 뒤를 털레털레 문대식이 뒤따라 왔다.

* * *

이전 삶에서 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다.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의 상처는 컸다.

이건 살아도 사는 거 같지가 않고 삶 자체가 무기력해 진달 까?

그걸 잊어보려고 평소 좋아하는 것도 하고 술도 마셔보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벗어나려고 몸부림 쳐봐도 그뿐, 그냥 그 순간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제풀에 지쳐 잊혀 지겠거니 하면 더 우울함 빠져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백준열의 학창 시절이 그랬을 거란 건 아니다. 하지만 녀석이 일부러 감추려 할 때는 그 만큼의 아픈 기억이 아니겠나 싶었다.

별 말 없이 차창을 바라보고 있는 데 나를 태운 차는 JYB엔터 본사로 잘도 가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 차에 탄, 내 옆자리 문대식이 나를 보고 물어왔다.

“좀 전 호텔 로비에서 만난 사람 누군데요?”

“고등학교 동창. 대성그룹 다닌다더군.”

그 대답을 하면서 나는 여전히 내 손에 쥐고 있던 최민국의 명함을 문대식에게 건넸다. 그걸 문대식이 받아서 살펴보면서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등학교 때 얘기는 일절 하지 않으셨는데....친한 사이였나 보군요?”

“친한 건가? 도시락....같이 먹을 정도면?”

나의 반문에 문대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 정도면 친한 사이죠.”

문제는 상대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도시락을 바꿔 먹었다는 건데....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이번에는 내 중학교 동창인 장혜원이었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전화할 생각이었던 나는 바로 그 전화를 받았다.

“어.”

-어디야?

“지금 출근 중. 너는?”

-난 막 애들 어린이집, 유치원 보내고 이제 한숨 돌리는 중.

“그 집 나오니 소감이 어때?”

-역시 네가 손을 쓴 거 맞구나. 어떻게....아니다. 내가 묻는다고 대답해 줄 너도 아니고. 으음. 나오니까 정말 좋아.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거 같고 무엇보다 마음껏 웃을 수 있어 좋아.

“다행이네. 근데 왜 전화 했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약속한 거잖아? 뭘 그거 가지고....”

-그게 아니라 나와 애들이 묵을 방을 잡아준 거에 대해서 고맙다고.

“아아. 거기 불편하지? 내가 좀 더 넓은 곳을 준비해 두라고 했으니까 관리사무실에서 연락 오면 바로 방 옮겨.”

-아냐. 여기도 좋아. 그러지 않아도....

“애들 생각해서 그냥 옮겨. 널따란 곳에 살다가 거기가 좁은 건 사실이잖아?”

-감동이야. 이렇게 내 애들까지 챙겨 줄지 몰랐다.

“그래? 그럼 앞으로 내게 잘해.”

-알았어. 잘해 줄게.

뭘 잘해 주겠다는 건지 모르지만 장혜원과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통화를 끝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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