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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한국항공 운항본부실. 항공사의 예약 명단은 유출 되어서는 안 되는 기밀 정보였다. 하지만 VIP고객, 즉 일등석 고객에 대한 정보는 최고위층에 한해서 서로 정보를 공유했다. 그랬기에 그 최고위층에 해당하는 한국항공 운항본부장인 최정석은 이번 주 일요일 저녁에 JYB엔터 대표 백준열이 미국에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걸 어쩌지?”
최정석은 한국항공 조태수 회장의 외손자로 경영본부장인 조은아와 외사촌 사이였다.
뭐 국내 대기업의 오너家가 그렇듯 최정석도 족벌 경영 체제의 혜택을 입어, 30대 후반의 상당히 젊은 나이에 운항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너家에서 곁다리일 뿐이었다.
어차피 조씨가 아니면 한국항공의 대표는 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봤을 때 현재 한국항공에서 차기 회장 자리가 유력한 3명, 바로 조태수 회장의 아들과 딸들 중에서 특히 경영본부장인 조은아는 가장 앞서가는 후계자 후보였다.
그랬기에 최정석도 그녀에게 줄을 댔고. 하지만 조은아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 계집애가 설친다고 최정석이 핀잔을 줬었는데 그걸 여태 잊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올해 초에 갑자기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내 부탁 좀 들어 줘.
“부탁? 그게 뭔데?”
-삼명家의 막내, 백준열이 말이야. 그가 비행기 타고 어디가면 내게 바로 좀 알려줘.
“뭐? 아니 그건 좀....너도 알잖아. 개인정보 유출은 범죄인거. 특히 항공사에서 탑승자 명단 유출은 자칫 심각한....”
-아니. 내가 언제 탑승자 명단 유출 시키래? 내 말은 백준열만 말이야. 그는 늘 일등석만 이용하니까 VIP명단에서 혹시 그의 이름이 발견하면 내게 슬쩍 연락 주면 될 일 아냐?
“아아. 뭐 그, 그렇긴 하지.”
조은아의 말처럼 VIP명단은 암묵적으로 항공사에서 확인만 하고 비밀에 부쳐지는 사안이었다. 해서 운항본부장인 그는 그걸 확인은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유출 되었을 시 책임 또한 그가 져야 했지만.
-그래서? 해 줄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그, 그게....해 줄 수 있지 그럼.”
-좋아. 그럼 내게 부탁할 일 있으면 오빠도 나를 찾아 와.
“그, 그래. 고맙다.
최정석은 조은아의 그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조은아의 라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조은아로부터 확실한 신임을 얻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이구. 멍청한 놈. 뭘 망설여? 이걸 알려주면 그 년이 나를 좋게 봐 줄 건데.”
최정석은 잠깐이라도 망설인 자신의 아둔함에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리곤 곧장 조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도 자기 라인이랍시고 조은아가 그의 전화를 받아주었다.
“조 본부장. 왜 전에 나한테 한 부탁 있지?”
-부탁? 내가 오빠한테?
조은아는 그새 까먹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기억나게 다시 되새겨 줘야지 어쩌랴.
“백준열....”
-아아. 그거. 기억 나. 왜? 백준열이 어디 해외 나가?
“어. 이번 주 일요일 저녁에 미국에 갈려는 가 보다. 비행기 표 예매 했네.”
-우리 항공?
“아니. 미국 쪽. 정확히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고.”
-몇 시?
“저녁 7시.”
-알았어. 고마워.
뚜뚜뚜뚜뚜뚜뚜....
자신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듣고 나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싸가지 바가지인 조은아. 하지만 최정석은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래도 끊기 전에 조은아가 그에게 고맙다고 했으니까.
그 싸가지 없는 조은아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최정석에게 그 여운은 제법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살짝 기대도 됐다. 이 일로 그가 좀 더 조은아 라인에 가까워 졌지 않을 까 하는....
* * *
자신에게도 이제 머리를 쓰는 인재가 생겼다는 생각에 들뜬 양태석.
그는 오늘 오후 6시에 열리기로 되어 있는 조직 긴급 간부 회의에 참석차 움직였다. 그런데....
“이거....아직 5시도 안 됐네?”
회의 장소인 삼명 호텔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4시 55분이었다. 곧 5시가 되었지만 어째든 회의 시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은 상황.
“어디 가서 일 보고 오기도 애매하고....”
한 두 세 시간 여유가 있다면 근처 태석파 구역에 순시라도 가겠는데, 그러기에 한 시간의 시간은 또 너무 짧았다.
결국 이곳 호텔의 1층 로비에, 최근 디저트 카페가 유명 하다니 거기 가서 케이크나 먹으며 커피 한잔 마시기로 하고,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뒤 1층으로 올라간 양태석.
“와우....”
유명한 곳답게 카페 안에 손님이 많았다. 물론 양태석이 앉을 자리는 있었다.
그는 곧장 빈자리로 가 앉았다. 그런 그의 눈에 이곳 파티쉐의 것으로 보이는 르꼬르동블루 졸업장이 보였다. 양태석도 르꼬르동블루가 프랑스에 있는 요리, 제과제빵 및 와인전문 학교라는 거 정도는 알았다.
“형님. 뭐 드시겠습니까?”
당연히 양태석이 주문을 하러 가지는 않았다. 양태석 주위에는 친위 조직원들이 늘 그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카페에 그들을 다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양태석은 평소 빵과 커피를 좋아하는 그의 친위 조직원을 데리고 카페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양태석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그 친위 조직원이 주문을 하러 매대로 갈 예정이었다.
“이거저거 알아서 가져 와 봐. 차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돼.”
“알겠습니다.”
양태석의 입맛을 어느 정도 아는 친위 조직원은 곧장 매대로 가서 거기 진열 되어 있는 빵과 케이크를 주문했다.
“얼 그레이드 유자갸또 랑 바스크 치즈 케이크 주세요. 음료는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땅콩크림 슈페너로 주고요.”
친위 조직원은 양태석이 최대한 싫어하는 걸 피해서 주문을 했고, 그가 주문한 얼 그레이드 유자갸또를 맛 본 양태석이 감탄사를 터트리며 말했다.
“오오. 이거 맛있다.”
데코부터가 보통이 아닌 얼그레이드 유자갸또는, 유자와 초코, 얼 그레이드 시트 층이 지어져 있었는데 거기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일정부분 떼어 내서 같이 먹으니 그 맛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역시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양태석은, 바스크 치즈 케이크에 아메리카노 커피를 곁들여서 먹는 걸 더 즐겼다. 해서 얼 그레이드 유자갸또는 한 번 맛 보는 것으로 그쳤고, 바스크 치즈 케이크는 그 혼자 다 먹었다.
그렇게 양태석은 디저트 카페에서 30분의 시간을 흘러 보내고 계산을 하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컨벤션 홀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형님!”
그때 컨벤션 홀 입구에 일찌감치 온, 조직의 간부들이 그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해왔다.
“어어. 그래. 일찍들 왔네.”
양태석은 그런 그들과 컨벤션 센터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안에는 그의 자리가 준비 되어 있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 앉지 않고 조직의 간부 쪽에 붙어서 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 사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 회의 시작 시간인 6시가 다 됐다. 그런데 와야 할 백준열 대표가 보내 준 그 최철기란 자는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양태석의 심기는 점점 더 불편해져 갔고, 그의 주변 조직의 간부들도 점차로 양태석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 *
그렇다면 최철기는 이때 대체 어디 있었는 걸까? 그는 이미 양태석이 있는 삼명호텔에 와 있었다.
단지 회의 장소인 컨벤션 홀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을 뿐. 근데 그곳이 바로 컨벤션 홀로 쓰는 층의 바로 아래층에 위치해 있던 소규모 이벤트 홀 중 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양태석은 그가 백준열의 말을 듣고 찾아 간 유통센터에서, 그곳 센터장과 같이 늦지 않게 삼명호텔에 도착했다. 하지만....
“뭐, 뭐야?”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그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조직원들이었다. 그 조직을 이끌고 있던 태석파 간부가 센터장을 밀쳐 내 버리고 최철기를 맞았던 것이다.
“넌 비켜. 너냐? 오늘 총 보스와 만나기로 되어 있는 놈이?”
그렇게 삼명호텔에서 그를 여기로 데려 온 센터장은 허무하게 최철기를 정준호 밑에 조직 간부에게 빼앗겼다.
그 조직 간부는 바로 양태석의 친위 조직을 맡고 있던 간부 중 한 명인 안병호라는 자였다.
안병호는 정준호의 최측근으로, 그가 양태석을 감시하고 보고하기 위해 친위 조직에 밀어 넣은 자였는데, 30분 전 쯤 정준호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때 안병호는 알게 되었다.
양태석이 일부러 오늘 조직 긴급 간부 회의에서 정준호를 배제 한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걸 대 놓고 양태석에게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알아 볼 수는 있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안병호는 알게 되었다. 양태석에게 오늘 귀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었고, 그 손님을 정준호에게 몰래 소개시켜 줘서 놀래 키려고, 양태석이 회의 시작 한 시간 전에 비로소 정준호에게 연락을 취한 것을 말이다.
즉 안병호가 양태석에게 정준호를 부르지 않은 것에 대해 물었다면, 그가 정준호가 심은 자란 걸 버젓이 털어 놓는 꼴이 되었을 터였다.
“휴우....큰일 날 뻔했네.”
안병호는 자신이 무슨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그런 그가 양태석의 눈 밖에 나버려서 제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된다면 ,그걸 그냥 내버려 둘 정준호가 아니었다. 보나마나 그는 서울에서도 변두리 나와바리로 쫓아버리고, 다른 놈이 그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겠지.
정준호 주위에는 안병호 같은 역할을 해 줄 간부들이야 널리고 널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안병호는 정준호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서 머리를 썼다.
그 결과 양태석이 만나기로 한 그 귀한 손님을 그가 먼저 낚아채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뒤늦게 연락을 받고 여기로 오고 있는 정준호에게 알렸다.
그렇게 되어서 최철기는 태석파 총 보스인 양태석 보다, 여기 조직의 2인자인 정준호를 먼저 만났다.
다행이라면 백준열은 혹시 몰라서 자신의 핸드폰에 찍혀 있던 양태석의 얼굴을 최철기에게 보여 줬다는 점. 그래서 최철기는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난, 누가 봐도 태석파 총 보스가 온 거 같이 주렁주렁 조직원들을 달고 나타난 정준호를 보고 실수 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준호를 보고 그가 총 보스 일거라 미리 짐작하고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
“너 뭐야?”
멀뚱히 자신을 쳐다만 보는 최철기를 보고 오히려 정준호가 불쾌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조폭들에게 기 죽을 최철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백준열 대표가 그랬다. 자신이 그의 사람인 이상 태석파 조직원들은 그의 털끝하나 건드릴 수 없다고 말이다. 그 말을 믿었기에 최철기는 전혀 쫄지 않고 정준호를 향해 말했다.
“JYB엔터에서 온 최철기라고 합니다.”
“JYB엔터?”
정준호야 당연히 JYB엔터를 잘 알았다. 장차 그가 양태석에게서 조직을 넘겨받으면 그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줘야 할 자이니 말이다.
“백준열 대표님의 보내서 온 거란 말인가?”
당연히 정준호의 태도부터가 달라졌다. 그걸 보고 최철기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백 대표가 한 말이 다 사실임을 말이다.
* * *
정준호는 여기로 오면서 눈앞에 남자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 중 그가 양태석 옆에 심어 놓은 안병호로부터 전해들은 말이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뭐 안병호가 한 말이 다 맞을 거다.
양태석을 바로 옆에서 지켜 봐 온 그가 한 말들이니 말이다. 한데 지금까지 정준호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지금 그의 눈앞에, 백준열이 대표가 보내서 왔다는 저 최철기란 자를, 백 대표가 왜 양태석에게 보낸 건지 말이다.
“형님. 늦었습니다. 빨리 올라가시죠?”
그때 시간을 확인하고 있던 정준호의 최측근 수하, 장용건이 말했다.
지금 태석파의 총 보스 양태석에게 정준호와 손대명이 있다면 정준호에게는 장용건과 안병호가 있었다.
그만큼 정준호의 장용건에 대한 신뢰는 확고부동했다. 그랬기에 그의 말을 듣고 정준호는 일단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양태석이 늦게 알려주는 바람에 늦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10-20분이지, 30분 이상 늦었다가는 그 사이 조직의 비상 간부회의가 끝나 버릴지 몰랐다.
여태 간부회의 시 정준호가 있었기에 그 회의 시간이 1시간 이상 끌어 왔지, 그가 없다면 30분이 아니라 10분 안에도 끝날 수 있었다.
조폭들이란 게 그렇다. 생각이란 걸 잘 안한다. 지금 태석파의 간부들 중에 머리를 쓰는 자는 드물다. 때문에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 열리는 조직의 비상간부 회의에 정준호는 10분 이상 늦을 수 없었다.
“가자.”
정준호와 장용건이 먼저 이벤트 홀 밖으로 나갔고, 그 뒤을 안병호가 뒤따랐다.
“그 인간 찾기 전에 바로 올려 보내. 그리고 너도 간부잖아? 참석해야지.”
“네.”
정준호는 뒤쪽 안병호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의 대답을 들은 뒤, 장용건과 같이 계단을 통해 위층 컨벤션 홀이 있는 층으로 먼저 올라갔다.
그걸 보고 있던 안병호도 이내 몸을 돌려 최철기가 있는 이벤트 홀로 돌아갔고, 최철기에게 자신이 들어오며 열어 놓은 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위층에 양태석 전무 있으니 그만 가 봐.”
“....”
최철기는 힐끗 안병호의 눈치를 보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이벤트 홀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