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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나는 차분히 최철기가 파견 나가서 일하게 될 곳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네? 거, 거기가 어디라고요?”
당연히 내 말을 듣고 최철기는 화들짝 놀랐다. 하긴 나라도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내 얘기가 이어지자 놀랐던 최철기의 얼굴이 당황에서 점차 흥분으로 변해갔다. 그도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빠르게 이해해 가고 있다는 게 나에게도 확연히 느껴졌다.
“그러니까 태석파에 가서 카운슬러 역할을 하란 말이로군요?”
“카운슬러? 뭐 그렇죠. 거기 총 보스인 양태석 전무에게 이미 양해를 구해 놓았고, 그도 최 실장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에 대해서요?”
“네. 내가 최 실장 칭찬을 좀 많이 해뒀거든요.”
내 말에 최철기가 팍 얼굴을 찌푸리며 부담스럽다는 듯 말했다.
“대표님이 저에 대해 아시면 얼마나 아신다고....근데 아까부터 왜 저를 최 실장이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그야 오늘부로 최철기씨가 저희 회사 실장이 될 예정이니, 미리 그 직함으로 불러 본 겁니다만. 아무래도 내가 대표다 보니 사람이름으로 부르는 것 보다 그게 더 편하기도 하고. 듣기 거북하면 다시 최철기씨라고 칭하도록 하죠.”
“아, 아닙니다. 최 실장으로 계속 불러 주십시오."
최철기도 평사원보다 실장이 더 낫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내가 그를 평사원에서 실장으로 직급을 수직상승 시켜 준 건, 그가 조폭 조직으로 파견나가 주는 데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매달 JYB엔터에서 그의 계좌로 월급이 꼬박꼬박 지급 될 예정이었다.
그것도 실장급에 맞춰서 말이다. 그러니까 최철기는 누가 뭐래도 JYB엔터 직원인 것이다.
“그쪽 세계도 결국 회사를 경영해 나가는 거나 다를 게 없습니다. 최 실장이 하기에 따라서 양 전무가 많은 인센티브를 줄 거고요.”
내 인센티브란 말에 최철기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최철기도 알 것이다. 그쪽 바닥에 눈 먼 돈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잘만 하면 거기서 카운슬러 역할을 하는 동안 평생 쓰고 남을 돈을 벌어서 나올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최철기의 소속은 누가 뭐래도 JYB엔터였다.
그런고로 최철기는 내 말대로 자기가 더 잘 할 수 있는 곳에서, 그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최철기는 그걸 이미 눈치 차리고 있었다.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내 설득에 결국 마음을 정한 듯 최철기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오늘 오후 중으로....”
나는 태석파의 거점 중 한 곳을 최철기에게 말해 주었다. 그가 거기 가서 양태석을 찾으면 연락을 받은 양태석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기로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다.
“딱 1년만 봐주고 돌아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최철기라면 1년이면 태석파의 체질을 개선시키고, 조직 체계까지 확실한 반석 위에 올려 놓아 줄 거라 확신했다.
무엇보다 최철기라는 아까운 인재를 1년 이상 조폭 조직에 박아 둘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최철기를 태석파에 보내지만, 최철기라는 그릇을 담기에 태석파라는 조폭 조직은 턱도 없이 부족했으니까.
그렇게 최철기와 악수 후 그를 대표실에서 내 보낸 뒤, 나는 김 비서를 불러서 그에 대한 후속 조치를 빠르게 지시했다.
“최철기씨. 오늘부로 실장으로 진급 시키고....흥일건설로 파견 가는 걸로....”
내 입에서 흥일건설이라는 말이 나오자 김 비서도 바로 눈치를 챘다.
흥일건설은 바로 태석파가 양지로 나가기 위해 세운 유령 회사 중 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 * *
외삼촌 때문에 모친을 볼 면목이 없었기는 했지만 김종훈은 안면몰수하고 토요일 저녁에 집에 갔다.
토요일 오후에서야 겨우 삼명그룹에서 그를 풀어 준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종훈은 삼명그룹 측에서 내 놓는 서류에 꽤 많은 사인을 해야만 했다. 그게 뭐든 김종훈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들어 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본인 하나라면 김종훈도 이번 생은 조졌다 생각하고 그냥 배 째라고 했을 거다.
사람 죽이는 훈련을 받은 만큼 김종훈은 자기 목숨도 언제든 끊을 수 있게 훈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건 그가 죽는 걸로 끝날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그랬다면 삼명그룹은 남은 그의 가족들을 못 살게 굴 터였다.
대신 삼명그룹에 협조하면 자신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앞으로 꽤나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나만 삼명그룹에서 시킨 대로 하면, 이 땅에서 그의 가족이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데....
“종훈아! 너....얼굴이 반쪽이네.”
“허어. 거기는 밥도 제때 안 먹이고 일만 시키나? 여보. 빨리 밥상부터 차려.”
“벌써 다 차려 놨어요. 가자.”
김종훈의 부모가 몇 달 사이 핼쑥해져 나타난 아들을 보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일단 반겼다.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모친의 손에 잡혀 곧바로 식탁에 앉혀진 김종훈. 그는 밥 세 공기를 비우고 나서 식탁에서 일어났다.
“바둑이나 두자.”
그랬더니 거실에서 부친이 바둑판을 두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아들과 바둑이 두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네. 좋죠.”
김종훈은 이럴 때 자식 노릇 좀 하자 싶어 부친과 마주 앉아서 바둑을 뒀다. 그 사이 설거지를 다 끝내고 과일을 가지고 거실로 오신 모친.
“과일 먹고 해요.”
그녀가 과일 접시를 바둑판 옆에다 가져다 놓고, 그 근처에 있던 TV리모콘을 챙겨서는 TV를 켜며 중얼거렸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드라마 시작 했겠댜.”
그리곤 TV드라마에 이내 흠뻑 빠져서 넋을 놓고 거기 집중해 있었다. 그런 모친을 힐끗 쳐다보며 김종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때였다.
“자아. 이러면 아다리지?”
“네?”
부친의 단수라는 말에 놀란 김종훈. 그가 바둑판을 쭉 훑어보다가 이내 피식 거리며 말했다.
“아다리는 무슨....”
김종훈은 자신의 대마를 빙두르고 있던 부친의 백돌 중 하나를 끊어 먹었다.
그러니까 패싸움이 시작 된 것이다. 이는 김종훈이 노리고 둔 수였기에 부친은 그것도 모르고 눈앞에 대마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김종훈이 도발한 패싸움에 말려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아아....”
눈앞의 나무만 보고 진작 숲을 보지 못한 부친은 결국 대마몰사(大馬沒死), 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한 판의 바둑을 더 뒀지만 역시나 부친은 김종훈이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어서 또 지고 말았다.
“한 판 만 더 해.”
화난 부친이 씩씩거리며 말하자, 이미 주말 드라마 시청을 끝내고 가족 예능까지 한 편 다 본 모친이 말했다.
“그만 좀 해요. 피곤에 쩔어 온 애를 더 피곤하게 만들 생각이에요? 종훈이도 쉬어야죠.”
“뭐....그렇기는 하네. 여긴 내가 치울 테니 그만 들어 가 쉬어라.”
“네. 그럼 저는 이만....”
부친이 가라고 할 때 가야 했다. 아니면 잡혀서 밤새 바둑을 둬야 할지 몰랐다.
그만큼 부친의 승부욕은 대단했으니 말이다. 김종훈은 곧장 자기 방으로 갔고 자신의 체취가 여전히 남아 있는, 그가 10년 넘게 쓴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러자 심리적 안정감 때문인지 바로 수마가 그를 덮쳐왔고, 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김종훈이 잠에서 깼을 때 벌써 오후 3시였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15시간을 넘게 잤는데 아직도 피곤했다.
꼬르르르....
하지만 배가 고팠던 김종훈은 방을 나왔고, 그런 그를 위해서 모친이 차려 놓은 밥상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밥상을 들고 거실로 간 김종훈은 순식간에 밥상의 밥과 반찬을 비웠다.
평소라면 자기가 먹은 그릇은 깨끗하게 설거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김종훈. 하지만 여기는 본가였고 여기서 그가 설거지 한 건 열 손가락에 꼽혔다.
지금의 엄마세대에서 아들 녀석이 설거지 하는 걸 좋아할 엄마는 없었으니까. 그냥 자기가 하고 말지.
해서 김종훈은 자기가 먹은 밥상을 그대로 식탁 위에 도로 올려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털썩!
그리고 침대에 다시 쓰러졌고, 이번에는 배가 불러 스르르 잠이 왔고, 그대로 잠이 든 김종훈은 부친이 깨워서 겨우 일어났다. 그랬더니 오후 7시가 다 된 시간.
“저녁은 같이 먹어야지.”
“네.”
그렇게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했고 또 먼저 식사를 끝낸 부친이 거실에 바둑판을 꺼내는 걸 보고 김종훈이 피식 거리며 웃을 때였다. 모친이 그런 김종훈을 보고 살짝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한판 져 드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주무시더라.”
그 말에 김종훈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식사 후 부친과 바둑을 둔 김종훈은 내리 두 판을 졌고, 입이 귀에 걸려서 주무시러 안방으로 들어가는 부친을 보고 바둑판을 정리했다. 그런 그에게 모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모친으로부터 오랜만에 받는 칭찬에 김종훈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웃는 모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녀와 똑닮은 얼굴의 외삼촌 최성진이 생각났다.
‘쳇....’
그리고 최성진의 아내이자 김종훈을 친 아들처럼 대해 준 외숙모와 유독 자신을 잘 따른 외사촌들. 앞으로 그들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엄, 엄마. 나 그만 자러 갈게.”
“그래. 푹 자. 내일 일찍 갈 거지?”
“어.”
원래는 9시까지 삼명그룹 본사로 출근하면 됐지만, 외삼촌 생각 때문에 이 집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그가 혼자 살고 있는 원룸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부모님들이 또 그를 걱정할 걸 알기에 김종훈은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고민에 빠져 든 김종훈. 그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겨우 그 생각의 정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종훈아?”
“네.”
아침 6시에 모친이 깨워서 일어난 김종훈. 그는 7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길에 올랐다.
그의 집에서 국정원까지 가려면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움직여야했다. 물론 아침 식사를 거른다면 한 시간 정도 더 잘 수 있었겠지만, 김종훈에게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밥이 그의 잠자는 시간 1시간 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으음....”
하지만 오늘부터 새롭게 출근하게 된 그의 새 직장인 삼명그룹 본사는 그의 집에서 가까웠다. 그래서 7시 30분에 거기 도착한 김종훈은 그곳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핸드폰에 한 시간 알람을 맞춰놓고 차안에서 잠을 청했다.
국정원에서 일할 때 틈만 나면 자던 버릇 때문인지, 김종훈은 그 한 시간 동안 꿀잠을 잤다.
* * *
8시 30분. 하나 둘 출근하는 삼명그룹 직원들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차에서 내린 김종훈.
“으아아아함....”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는 삼명그룹 본사 건물 주변에 있는 커피차로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삼명그룹처럼 큰 회사는 이렇게 이동식 커피차가 와서 영업을 해도 충분히 돈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커피차가 한 두 대도 아니고 4대씩이나 보이고 말이다. 그 중에 2대는 커피 말고 간단한 토스트나 샌드위치를 같이 팔고 있었다.
김종훈이 들린 커피차도 그 2대 중 한 곳으로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출근한 김종훈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서 토스트를 주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커피차 안에서 나는 토스트 냄새가 장난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여기 커피차를 찾은 대부분 직장인들은 커피와 토스트를 같이 주문했다.
달랑 커피만 주문해서인지 몰라도 김종훈의 커피가 먼저 나왔고, 바로 계산을 하고 커피를 챙겨 든 김종훈은 천천히 삼명그룹 본사 건물로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다른 삼명그룹 직원들과 달리 목에 사원증을 걸지 않은 그는, 건물 안으로는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1층 홀의 출입게이트 안으로는 더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서 출입게이트 옆에 안내 데스크로 걸어간 그가 그 안에 보안직원에게 말했다.
“비서실장실에 김종훈이 왔다고 전해 줄래요?”
“비서실장실이요?”
“네.”
“잠시만....”
안내 데스크 안의 보안 직원이 비시실장실에 전화를 걸더니 이내 김종훈을 보고 말했다.
“비서실에서 사람을 보낸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김종훈은 불과 며칠 전에 여기로 출퇴근을 했었다. 그때는 국정원 요원으로 이 안의 중요한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 말이다. 한데 지금은 진짜 여기 직원이 되어 이렇게 와 있다 보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어째든 국정원을 배신한 이상 그는 더 이상 공직에 몸담을 수 없게 됐다. 뭐 대신 대한민국 최고 대기업인 삼명그룹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기서는 스파이였던 전력이 문제가 되겠지.”
아마 김종훈이 일했었던 회장 비서실에서 다시 일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부서에 배치가 될 텐데, 거기가 어딜 지 사실 궁금하긴 했다.
“김종훈씨?”
그때 비서실에서 그를 데리러 나온 직원이 그 앞에 나타났다.
“네.”
그런데....
“이거 받으세요.”
그 직원이 대뜸 김종훈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김종훈을 얼떨결에 그걸 받았고.
“그 안에 보시면 김종훈씨 일할 곳의 인사 발령서와 거기 사원증이 있을 거예요. 확인하시고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 말 후 그 불친절한 직원은 뒤돌아서 휑하니 혼자 출입게이트를 통과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 직원을 멀뚱히 쳐다보던 김종훈. 그는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 안내 데스크 안의 보안 직원들이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 시선을 피해서 한쪽으로 걸어가면서 서류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인사 발령서를 먼저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