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고 싶으면 해-582화 (578/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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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선이라뇨?”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빤히 백 회장을 쳐다봤다. 그러자 백 회장이 팍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놓이면 지어보이는 표정이다.

‘아차....’

나는 김 집사의 경고가 그제야 생각났다. 가급적 백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에휴....이놈에 반골기질....’

누가 정답이 A라고 하면 그 답이 A가 아닌 이유부터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이놈에 기질이 또 한 건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한 번 입에서 내 뱉은 내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할 말을 마저 다 해버렸다.

“저번에 만나라고 한 경기도지사 딸내미도 아직 정리가 안 됐는데 또 선을 보란 말씀이십니까?”

백 회장의 전처이자 내게는 법적 모친이 되시는 그분이 삼명 재단 이사장으로 있을 때, 경기도지사의 막내딸과 나를 엮어 주려 벌인 그 선을 내가 비꼬아서 한 말이었다. 근데....

“그것도 좋겠군. 선보기 싫다면 말이다. 그 경기도지사 여자랑 결혼 하는 게 어떠냐?”

“네?”

이번에는 내 눈살이 팍 찌푸려졌다. 백 회장이 무슨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백 회장은 그런 거 가지고 질질 시간을 끄는 사람은 아니었다.

“류상현 경기도지사가 여당의 유력한 대권 후보 중 하나란 말이지. 물론 내가 그 여식과 맺어진다면, 좀 전 내가 말한 말에서 유력한 이란 말이 빠지게 되겠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내가 류상현 경기도지사의 막내딸과 맺어진다면, 류 도지사가 이번 대통령 선거의 여당 측 대통령 후보가 된단 소리였다. 하긴 삼명그룹에서 미는 데 그거야 당연한 일인 것이고.

나야 당연히 경기도지사의 딸 류지혜와 맺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낮엔 ‘요조숙녀’고 밤에는 ‘문란녀’인 그녀는 나와는 애초 맞지 않는 여자다.

클럽에서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일 일은 소수점 열자리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서지현 사모님 문제로 류지혜와 선도 보지 않았군.’

사실은 당시 선 자리는 잡혔는데 내가 나가지 않았다. 당시 서지현 사모님은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바빴기에, 거기에 대해서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었고.

하지만 그 상대는 다를 터.

‘류 도지사와 류지혜 모두 내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겠네.’

한번 틀어진 사이다. 그런 사이를 다시 복원한다고 해도 나빴던 감정이 잊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악연은 악연대로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고 싶은 생각....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김승현 의원 딸을 만나 봐라.”

김승현 의원? 그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백준열의 머릿속에서 다행히 그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여당의 2선 의원으로 차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 되던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뭐 아직은 깨끗한 이미지에 스캔들이나 여타 추문 같은 건 없으니 나름 잠룡으로 불리고 있는 거겠지.

그런 그가 이번 대통령 선거에 칼을 빼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삼명그룹에서 밀어주기로 한 거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삼명장학생 출신이니까....’

삼명그룹에서 키워 낸 인재가 이제는 국회마저 장악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승현 의원 말고도 여당 내 꽤 많은 삼명장학생 출신들이 포진 되었고, 그건 여당 뿐 아니라 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번 총선에서는 더 많은 삼명장학생 출신들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대거 출사표를 던진 것으로 안다.

‘그냥 삼명그룹이 다 해먹으려네.’

왜 16년 전인가? 국내 굴지의 대 재벌이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적이 있었다.

그 대기업 다니는 직원들과 그 친척들만 그를 찍어도 대통령에 당선 될 거라면서,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었다. 하지만 그는 보기 좋게 낙마했고 그 뒤 정치 보복 속에 그 굴지의 대기업은 그냥 대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걸 반면교사로 삼은 걸까? 삼명그룹은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고 대신 정치판의 인재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삼명장학생 출신들 중 법조계의 인물들이 대거 정치판에 밀어 넣었는데, 그들이 이제야 그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김승현 의원은 삼명장학생 1기로 백승렬 회장이 특히 아끼는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나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네.’

백준열의 기억 속에 깐깐하게 생긴 김승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시 대법관 후보였던 그가 인사차 백 회장을 찾아왔었는데, 그때 백승렬 회장이 그 자리에 일부러 자기 자식들을 불러내서 김승현과 대면 시켰던 것이다.

아마 당시 백 회장은 김승현을 삼명그룹의 머슴으로 가까이 두고 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 같았다. 그가 대법관에서 물러나면 삼명그룹으로 불러서 중임을 맡기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대법관에서 끝나지 않고, 승승장구하며 대법원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곤 존경 받는 법조인으로 자연스럽게 여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현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대통령에 도전해 볼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 * *

내가 김승현 의원에 대해 잠깐 생각하는 사이 백 회장은 내 선을 저돌적으로 밀어 붙였다.

“시간 끌 거 없이 내일 저녁에 만나 봐라.”

뭐 김승현 의원 딸과 선보라는 백 회장의 말은 이미 통보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내게 선택은 어차피 두 가지 뿐이었다.

‘배 째는 것과 선을 보는 것.’

근데 알다시피 사람은 배를 째면 죽는다. 참고로 내가 아는 백 회장은 배 째라는 놈의 배를 째서, 그 뱃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살펴보는 게 취미인 양반이고. 고로 나는 백 회장의 말대로 내일 저녁에 김승현 회장 딸내미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시간과 장소는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정하고. 김 집사?”

“네.”

백 회장이 김 집사를 부르자 쪼르르 백 회장 옆으로 다가 선 김 집사. 그런 그의 손에 메모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백 회장이 그 메모지를 보고 내게 턱짓을 하자, 김 집사가 그 메모지를 네게 건넸다. 나는 김승현 의원의 딸내미 이름과 핸드폰 번호가 적혀져 있는 메모지를 일단 받았다.

‘김민지?’

다행인지 그 이름을 머릿속에 되뇌어도, 백준열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그리고 내일부터 본사로 출근 해 후계자 수업을 받거라.”

백 회장이 진짜 본론을 꺼냈다. 당장 나를 후계자로 키우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뭐?”

“저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그걸 당장 어떻게 정리합니까? 또 다음 주에는 미국출장도 잡혀 있고요.”

“그래서?”

백 회장이 나를 쏘아보는 눈빛이 매섭기 그지없다. 하지만 내가 삼명그룹을 맡는 건 내 자의에 의해서지 백 회장의 강압 때문은 아니다. 내게 삼명그룹이 필요하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후계자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지.

뭐 그런 마당에 내가 백 회장 눈치보고 굽히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최소 보름,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름 안에 정리해라.”

최소라고 했는데 백 회장의 인내심의 한계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아....알겠습니다. 대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사업은 그대로 유지해 나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삼명그룹 후계자로 후계 수업을 받으면서도 ,지금 내가 꾸려 나가고 있는 사업체들은 그대로 경영해 나가겠다는 얘기였다.

“뭐 그러던지. 단, 제대로 삼명그룹의 후계자 노릇을 한다는 전제 하에.”

백 회장은 내가 후계 수업을 받게 되면 알아서 지금 하고 있는 사업들을 정리할 거라고 보는 듯 했다. 하긴 말이 후계 수업이지 백 회장이 하고 있는 그룹 수장 노릇을 그대로 답습하는 과정일 텐데, 분초를 다투는 그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고려할 때 딴 데 한 눈을 판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또 내 장기가 아니던가?

나는 그럴 자신이 있었고 그랬기에 삼명그룹을 맡기로 한 거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바로....내 견신 시스템이었고.

갈수록 늘어나는 내 새로운 능력들을 잘 활용한다면, 시간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 * *

현재 내 상태 창은 13까지 레벨업이 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각각 4UP이 된 「개목걸이」, 「개방울」아이템의 경우 특별한 두 가지 능력이 생겼다.

바로 ‘상사의 품격’과 ‘의지 통제’인데, ‘상사의 품격’을 쓰게 되면 내 밑에 직급의 직원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선보 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의지 통제’의 경우 내가 내린 지시를 거역할 수 없게 만들어 준단다.

대기업도 결국 일은 직원들이 다 한다. 임원은 그들을 관리 감독하면서 대표 혹은 회장을 떠받들고.

CEO는 선두에서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나가는 존재고, 나는 그 CEO가 되기 위해서 후계 수업을 받아야 할 입장이다.

그런 내게 있어서 상사의 품격과 의지 통제 능력은, 내가 앞으로 이끌어 나가야 할 임원들과 직원들을 통제하고 내 의지대로 끌고 가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능력들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내게 그 두 능력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삼명그룹에 스스로 들어가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떡하든 시간을 끌면서 백승렬 회장이 최대한 오래 삼명그룹을 이끌어 나가게 온갖 꽁수를 다 부렸을 테지.

“....니까 이 실장과 잘 상의해서....”

아침 식사 후 당연한 수순으로 나는 백 회장에게 이끌려 그의 서재에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잔소리라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백 회장도 내가 자기 말을 허투루 듣고 있다는 건 아는 듯 했다. 하지만 회장 자리에 오르고 40년 가까이 해 온 꼰대 근성을 버리지는 못했다.

“여기까지 하자. 자세한 건 네가 본사로 정식 출근하는 날, 그때 다시 짚어주도록 하마.”

그 말에 내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니까 앞으로 보름 동안 백 회장이 나를 찾을 일은 없을 거란 소리가 아닌가?

백 회장이 내가 고난의 후계 수업을 받기 전, 나름의 자유 시간을 주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나야 고맙지.

“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백 회장의 서재를 나왔다. 그러자 서재 밖에 김 집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김 집사 쪽으로 걸어갔고 자연스럽게 그와 같이 걸으면서 저택의 거실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김 집사가 살짝 목소리 톤을 낮추면서 내게 물어왔다.

“도련님. 이 집에는 언제 들어오실 겁니까?”

그러고 보니 좀 전 백 회장의 잔소리 중에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사는 게 어떤지에 대한 은근한 물음도 있었다. 나야 당연히 싫지.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싫다고 했다.

그랬더니 백 회장도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다른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 백 회장은 아마 그걸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했고, 그로인해 내가 이 집에 들어오는 건 내 결혼 문제의 후 순위로 밀려 난 거 같았다.

“당장은 어렵고, 혹시 내가 결혼이라도 한다면 바로 여기 들어와서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김 집사가 내 말에 먼저 호응을 하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안주인께서 집안을 챙기셔야 하니까요.”

안주인? 맞다. 그러고 보니 지금 삼명家에 안주인이 없구나. 근데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없던 안주인이 생기는 셈이었고. 즉 내가 결혼 하면 백 퍼 나는 여기 들어와서 살아야했다. 아니 백 회장이 그렇게 만들 거다. 삼명家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면 더더욱 결혼을 할 수 없지.’

나는 백 회장이 죽기 전에 이 집에 다시 들어 와서 살 생각이 없었다. 누구 발목 잡으려고 말이다.

내가 보니 김 집사는 내가 빨리 결혼해서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뭐 그건 김 집사의 생각일 뿐이고. 내가 굳이 그의 생각을 뜯어 고치거나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내 그런 의도를 백 회장이 눈치 차릴 수 있는 문제고. 나는 순탄하게 김 집사와 얘기를 나누며 현관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작별하기 전 내가 자식으로써 형식적인 말을 그에게 내 뱉었다.

“김 집사님. 아버지 잘 좀 부탁드려요.”

“네. 회장님 걱정은 마십시오. 제가 앞으로도 쭈욱 잘 챙길 테니 말입니다.”

누가 그랬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충성은 없다고. 만약 측근 중 배신자가 생긴다면, 그건 그 측근이 충족할 만큼 돈을 쓰지 않아서라고 말이다.

“김 집사님 월급 계좌로 매달 5백씩 더 들어 갈 겁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도련님.”

내가 이 집에 들어 올 때부터 김 집사는 내게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허리는 꼿꼿했는데 지금 김 집사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혀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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