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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박 비서를 통해서 나는 내가 벌려 놓은 또 하나의 난제와 직면했다.
그러고 보면 청와대 쪽, 그러니까 대통령과 나 사이의 문제가 사실 돌발적으로 터진 거지, 실은 서진그룹 문제가 이번 주에 내게 닥친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었다.
물론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이 코마 상태에 빠지면서, 그 문제는 완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지만 말이다.
김 회장의 가족들이 그다지 유능해 보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풀릴 거로 보였다.
특히 김 회장의 장남인 김학수는, 나를 상당히 얕잡아보고 있었다. 자신의 부친인 김 회장도 내 눈치를 보기 급급했는데 말이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굳이 유추해 보자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라는 말이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내가 자신을 잡아먹을 호랑이 인줄도 모르고 하룻강아지처럼 까불거리는 거지.
박 비서의 말에 따르면 김학수는, 부친이 코마 상태에 빠진 그날 바로 서진그룹 임원 회의를 열고, 자기 맘대로 경영권을 챙기며 그룹 부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 박 비서가 말해서 알았는데 김학수의 모친, 그러니까 김명진 회장의 부인인 차미진이 글쎄, 청와대 쪽 영부인과 접촉을 했다나 뭐래나? 아마도 영부인 쪽으로 꽤나 많은 돈을 찔러 준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 돈은 돌려받을 수 없다. 그랬다가는 영부인뿐만 아니라 차미진도, 손목에 쇠고랑을 찰 테니 말이다.
‘가만....’
그런데 이게 또 내게는 좋은 정보였다. 대통령이야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나를 해하려 한 데 대한 응징이 됐다지만, 영부인은 아니다. 대통령의 그늘에 가려져서 이대로 그녀에 대한 처분이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나는 누구든 나를 건드리면 절대 가만 두지 않는다. 그게 나의 소신이고 원칙이었다. 그 원칙을 깰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박 비서와 서진그룹 인수합병에 대해 아웃 라인만 간단히 잡고 통화를 끝냈다. 그리곤 곧바로 이동훈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도련님.
이 실장은 목소리가 상당히 잠겨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내가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한숨도 못 자고 지금도 뺑이를 치고 있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닙니다. 어차피 겪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생각보다 잘 처리 되어 다행이죠. 한데 무슨 일로....
“네. 사실은 좀 전에, 저의 정보 라인을 통해 알게 된 건데....”
나는 청와대 안 주인, 그러니까 영부인이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의 부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얘기하며, 그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이동훈 실장의 메일로 보냈다고 말했다.
물론 그 정보는 나대신 박 비서가 아마 지금쯤 이 실장의 메일로 보냈을 거고.
-아아. 여기 있네요. 제가 보고 잘 써 먹겠습니다.
이동훈 실장의 잠긴 목소리가 확실히 확 밝아졌다. 아마도 내가 준 이 소스가 상당히 마음에 든 거 같았다. 나는 속으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이 실장과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때 통화 끝나기 직전 이 실장이 말했다.
-내일 아침에 본가에서 식사하시는 거 아시죠?
“네. 압니다.”
-회장님께서 꼭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 같으셔서....꼭 참석 하십시오.
“그러죠.”
백승렬 회장이 내게 꼭 할 말이라? 그게 뭔지 궁금해서라도 나는 내일 아침에 본가로 갈 생각을 굳혔다. 그렇게 이 실장과 통화를 마친 뒤, 내가 식탁 쪽을 쳐다봤더니 나나미도 식사를 마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곧장 내 쪽으로 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욕실로 갔고, 나는 식사 후 손을 씻거나 볼 일을 보러 거기 들어간 줄 알았다. 그런데....
쏴아아아아!
갑자기 욕실 안에 샤워기 물줄기 소리가 예민한 내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가 끊겼다가를 반복했다. 그게 무슨 소리겠나?
“샤워를 해? 왜?”
나는 나나미가 왜 점심을 먹자마자 샤워를 하는지 의아해 했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내가 그에 대해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내 핸드폰이 또 울렸다. 확인하니 양태석이다. 그에게 시켜 놓은 일이 좀 있다 보니, 나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양태석은 자신이 조폭이라고 생각했다. 밑에 수하들을 상당히 많이 거두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조폭두목이라고 불렀는데, 그에 대해서 양태석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도둑을 보고 도둑이라고 하면 도둑은 화를 낸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됐다. 도둑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나?
양태석은 자신이 조폭인 것이 부끄럽지도 쪽팔리지도 않았다. 조폭으로 먹고 사는 데 어쩌랴? 당장 조폭 노릇을 때려 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 명문대 다니는 학생이 한 말을 듣고 생각이 좀 많아졌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차별은 있다고 했던가?”
사실 조폭들은 많은 차별을 받고 산다. 사람들은 가오나 잔뜩 잡고 다니며 주위 사람들 돈이나 뜯어 먹고 사는 조폭들을 기생충에 비유한다. 하지만 조폭들도 이리저리 꽤 눈치를 보고 살아야했다. 특히 공권력 앞에서 조폭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조폭 조직들도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석파 앞의 태천파 역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음지에서만 살아야 하는 자들 때문에, 양지로 나오는 게 방해 받았고 결국에는 그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공권력이 움직였고, 태천파는 무너졌다. 물론 그 태천파의 조직의 80-90%를 태석파가 흡수한 상태였지만.
문제는 흡수가 끝났으니 이제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워 나가는 일이 양태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으로는 영 젬병이인 양태석. 그런 그가 기대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백준열이었다.
뭐 거창하게 백준열을 주군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양태석의 백준열에 대한 충성심은 확고했다.
“뭐? 삼명호텔에서....”
그런 양태석에게 백준열은 그의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존재. 그런 존재를 양태석이 신경 쓰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래서 백준열이 청와대와 국정원, 검경에 의해 잡혀갈 처치에 놓인 사실을, 양태석은 누구보다 빨리 알아냈다.
“지금 즉시 애들 준비 시켜.”
그래서 그는 언제든 백준열이 연락을 주면, 삼명호텔로 쳐들어가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놈들로부터 백준열을 빼내서, 그를 중국이나 일본, 홍콩, 혹은 백준열이 원하는 나라로 그를 빼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준열은 그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고, 그날 밤에 모든 게 해결이 됐다.
백준열을 잡으러 혈안이 되어 삼명호텔에 진을 친 청와대와 국정원, 검경이 그날 밤에 다 철수를 했고, 다음 날 오전에 뜬금없이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오겠다는 기자 회견을 했다.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얘긴지....”
양태석은 머리 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지금 백준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지 백준열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에게 직접 물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는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런 그의 생각에 아침 댓바람부터 백준열에게 전화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백준열이 점심을 먹고 난 뒤에 그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됐다. 이제 전화 걸어 보자.”
양태석은 시간이 오후 1시가 다 되어가자, 더는 못 참고 백준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백준열이 그의 전화를 바로 받았다.
-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양태석은 인간적으로 백준열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먼저 그의 안부부터 물었다. 이때만큼은 자신이 뭐가 궁금해서 백준열에게 지금 전화를 걸고 있는지 다 까먹고 있었다. 그만큼 양태석은 인간적이었다.
* *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준열은 양태석의 이런 인간적인 면을 좋게 봤다. 기본적으로 백준열은 누가 자신을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굳이 상대를 먼저 괴롭히거나 악의적인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양태석처럼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자는 당연히 좋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 때문에 양태석 주위로, 자잘하니 처리해야 할 귀찮은 일들이 생겨나더라도 말이다.
“네. 네. 아아. 그래요? 잘 됐다니 다행인데....”
양태석은 적어도 백준열이 시킨 일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처리했다. 그저 시킨 대로 하기만 하면 되니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필요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양태석은 어제 백준열이 시킨 일들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그에 대한 보고를 했다. 이어 그 보고를 듣고 난 양태석이 몇 가지 그의 조직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였다.
“그렇군요. 네. 네. 으음....”
백준열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다. 아무래도 백준열의 물음에 대해 대답하는 양태석의 대답이 영 그의 성에 차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던 그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양 전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곡해해서 듣지 말았으면 해요.”
-곡해라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지시만 내려 주십시오.
“내가 양 전무 밑으로 사람 한 명을 보낼까 하는데....”
-....
양태석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백준열이 자신 옆에 떡하니 감시 역을 붙이겠다는 말에 꾹 입을 다물었다.
양태석은 여태 자신을 믿고 이쪽 일을 전부 맡겨 준 백준열에게 고마워서 늘 최선을 다해왔다. 그랬기에 이런 백준열의 반응이 사실이 많이 서운했다. 그걸 안다는 듯 백준열이 말했다.
“양 전무를 감시하겠다는 게 아니라, 유능한 인재 한 명을 옆에 붙여서 조력자 역할, 그러니까....으음....그래. 책사. 머리 쓰는 걸 양 전무 대신 해 줄 사람을 보내겠다는 뜻이니까 오해 말아줘요.”
-책, 책사....말입니까? 제갈공명, 순욱, 정욱 같은....
“네. 뭐....”
백준열은 양태석이 조폭치고는 상당히 고루한 편임을 잘 알았다. 종교로 치자면 유교 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나 할까?
뭐 조폭들이 의리를 중요시 하니까, 유교적 의(義)를 양태석이 많이 따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전에 보니까 양태석이 타고 다니는 차에 삼국지 책이 보였는데, 그게 떠올라서 자신이 양태석에게 보낼 사람을, 제갈공명과 순욱, 정욱 같은 책사에 비유해 봤다. 근데 그게 어떻게 양태석의 취항에 딱 맞아 떨어진 거 같았다.
-그, 그렇다면야 저야 고맙지요.
“그쪽에 대해 잘 아는 자이니, 바로 거기에 적응해서 양 전무님을 잘 보필할 겁니다.”
백준열이 양태석에게 붙여 주려는 자는, 바로 제주도에 있는 윤재구 회장의 눈과 귀 노릇을 해 줬던 흥신소 사장 최철기였다.
윤 회장이 최철기가 한 때 조폭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백준열도 지금 같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터였다.
-네. 제가 그 자 말을 잘 듣도록 하겠습니다.
양태석이 상당히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걸로 봐서, 최철기가 태석파에 가도 양태석이 잘 챙겨 줄 거 같았다. 그렇게 백준열이 양태석과 통화를 끝냈을 때였다.
달칵!
욕실 문이 열리고 샤워를 끝낸 듯, 나나미가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 * *
수건 한 장으로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위와 아래를 가린 나나미. 그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나를 보고 삐죽거리며 말했다.
“뭘 보세요?”
“아, 아니. 보이는 걸 안 볼 수는 없잖아?”
내 그 말에 나나미가 후다닥 욕실 옆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곤 황급히 방문을 닫았다.
하지만 수건 한 장으로 앞만 가리고 있던 그녀로서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뒤태를 전부 훤히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뭐 늘씬하니 쭉 빠진 S라인의 나나미의 몸매야 더 말할 거야 있나. 말하면 입 아프지. 하지만 갈아입을 옷은 있나? 여기는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나나미. 속옷하고 갈아입을 옷 좀 구해 줄까?”
그러자 방 안의 나나미가 바로 대답했다.
“그래 주면이야....나야 고맙죠.”
보아하니 입었던 옷을 도로 입을 모양인 거 같았다. 그런데 나나미는 옷 입은 채로 욕실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나올 때 수건 한 장으로 가리고 나왔고.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입었던 옷은 욕실에 그대로 있다는 얘긴데....
저 방에 나나미가 입을 옷이 있을 리는 없고. 막말로 하늘에서 그녀가 입을 옷이 뚝 떨어지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나미는 지금 저 방에서 뭐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의뭉스럽게 그녀가 들어가 있는 방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