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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실제 국정원 기조실장 강성혁이 한 시간 전쯤에 1차장 배종석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그리고 배종석에게 납작 엎드리며 살려 달라고 했다. 달리 배종석이 국정원 2인자이며 사실상 국정원을 장악하고 있는 실세인 게 아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배신자를 거두는 게, 그의 앞으로 행보에 얼마나 플러스 요인이 될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강성혁의 백기 투항을 흔쾌히 받아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배신자의 정보력을 이용해 먹고 있었다.
“쯧쯧. 정말 멍청한 작자로군. 하필 거기에 기어 들어가 있다니 말이야.”
배종석이 혀를 차며 말하자, 눈치 빠른 강성혁이 바로 물어왔다.
-국정원장.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모난 돌을 그냥 내버려뒀다가, 그 돌부리에 그쪽이 걸리기라도 해 봐. 누가 책임 질 거야?”
사태 파악에 있어서 누구보다 빠른 강성혁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배종석이 말하고 있는 ‘그쪽’이 어디인지 모를 리 없었다.
‘삼명그룹!’
그때였다.
-그 일을 제가 맡으면 안 될까요?
“기조실장이?”
배종석은 강성혁이 국정원장을 직접 제거하겠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피식거렸다.
‘이 새끼가 어디서....’
그러니까 지금 강성혁은 자기 손으로 국정원장을 제거하므로 해서, 배종석이 수확할 전리품 중에서 가장 큰 것을 자신이 슬그머니 챙기려 들고 있었다.
이거야 말로 재주는 배종석이 부리고, 돈은 강성혁이 챙기려는 꼼수가 아닌가?
무엇보다 국정원 안에 있는 국정원장 제거하는 건, 그냥 독 안에 든 쥐를 없애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손쉬운 일이었다.
-차장님께서야 그거 말고도 할 일도 많으실 텐데. 자잘한 그런 일은 제가 처리하는 것이....
번드르르하니 말을 잘 포장해서 떠들어 대는 강성혁. 하지만 배종석은 이미 그의 속내를 훤히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뭐 하러 그래. 애들 둘 만 보내면 끝날 일을. 기조실장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 일을 나대신 좀 처리 해줘.”
-네? 아아....뭐....그러시죠.
배종석의 말에 이내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강성혁. 그런 그에게 배종석이 웃으며 말했다.
“삼명호텔 측에 나간 우리 쪽 인원들 파악해서, 그 중 대리급 이상 신상정보를 내 책상에 가져다 놔주게. 내일 아침에 출근하는 대로 바로 볼 거니까, 그런 줄 알고.”
한마디로 너는 이번 일에 꿀 빨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 밤새 서류 작업이나 하란 소리였다. 물론 서류 작업도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현장에서 활약하지 못하면, 그 공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걸 모를 강성혁이 아니었지만, 그는 배종석의 다음 말에 질끈 눈을 감고 수긍하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 뭐 불만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지시하신대로 보고서 작성해서, 내일 아침에 출근하시면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줘.”
그렇게 통화를 끝낸 뒤, 배종석은 그와 통화 후 똥 씹은 얼굴로 일그러져 있을 강성혁의 얼굴을 떠 올리며 피식거리고 웃었다. 그러다 퍼뜩 생각 난 게 있었는지, 어딘지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본원에 가서....”
뭔가 은밀한 지시를 내린 뒤 배종석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서 제 1차장실을 나섰는데, 그의 방밖에는 이미 십 수 명의 국정원 요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그들을 이끌고 배종석은 한껏 살기등등한 눈빛을 내 뿜으며 어딘가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그의 뒤에서 잰걸음으로 그 옆까지 따라 붙은 요원이 목소리 톤을 낮춰 말했다.
“차장님. 삼명호텔에 나가 있던 3차장이 거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배종석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바로 대응책이 나왔다.
“바로 미행 붙여. 그리고....”
배종석은 뭔가 더 구체적인 지시 몇 가지를 얘기했고, 그 말을 전부다 듣고 난 요원은, 곧장 그들 대열에서 이탈해서 어딘가로 서둘러 움직였다.
그 사이 배종석과 국정원 요원들은 건물 밖으로 나왔고, 줄지어 늘어서 있는 차량에 빠르게 탑승을 했다.
배종석도 국정원 요원이 열어 주는 차의 뒷좌석에 탔고, 이내 그들 차량 중 선두 차량이 움직이자, 그 뒤쪽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중과부적(衆寡不敵)은 무리가 적으면 대적할 수 없다는 뜻으로, 적은 수로는 많은 적을 대적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국정원 3차장 민중배는 지금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국정원의 수장은 누가 뭐래도 국정원장이다. 하지만 현 국정원장인 원상벽은 그 국정원을 완벽히 자기 수중에 넣지 못했다. 그럴 것이 그는 전 정권 인사였고, 또 1차장인 배종석을 자신의 권위로 찍어 누르지 못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국정원 요원들 대다수가 배종석의 눈치를 봤다. 국정원장이 지시를 내리더라도 배종석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던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종석이 직접적으로 국정원장과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았고, 가급적 국정원장의 지시를 따라주었다는 건데....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다 삼명그룹에 위해가 가지 않은 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삼명그룹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짓을, 이쪽에서 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차장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빨리 여기서 철수를....”
“닥쳐! 원장님 지시다. 우리는 반드시 백준열을 잡아서 간다.”
국정원 3차장 밑에 심리전단 1팀장인 김혁수는 답답했다.
그 동안 1차장 쪽이 가만 있은 이유를 모르는 국정원 간부급 인사는 없었다. 그리고 그 간부들을 통해 그 밑에 직원들도 다들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니 1차장이 삼명그룹의 하수인이란 걸 모르는 국정원 요원은 없다고 보면 됐다.
문제는 그 1차장이 매번 뿌리는 돈이었다. 그 돈을 받지 않은 국정원 간부는 없었고, 그 간부 밑에 요원들도 그 돈 맛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간부와 요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였고, 지금 이곳 삼명호텔에 다들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 인원으로는 당장 눈앞에 족히 100명도 넘어 보이는 삼명그룹 경호원들의 인간방벽을 뚫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차장은 백준열을 잡아 갈 거라고 이렇게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3차장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바로 1차장 쪽 움직임, 그러니까 같은 국정원 요원들이 어떻게 나올지 그걸 살펴야 했다.
삼명그룹 경호원들이야 국정원 요원들에게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동료들인 1차장 쪽 요원들은, 언제든 지금 여기 있는 요원들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었다. 그렇게 훈련 받은 자들이었고, 위선의 지시가 떨어지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자들이었으니까.
“뭐? 알았어.”
다행히도 3차장이 어디선가 연락을 받고 삼명호텔 현장에서 이탈을 했다.
그 사이 3차장 밑에 그의 심복인 심리전단장이 이곳 지휘를 맡았다. 해서 그에게 다가간 김혁수가 말했다.
“단장님. 1차장 쪽이 언제 움직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모여 있는 건, 저들에게 이쪽을 제거할 명분만 줄 뿐입니다.”
“하아....나도 알아. 하지만 원장님의 지시가 그런 걸 어쩌겠나?”
3차장뿐만 아니라 심리전단장 역시도, 아직까지 국정원장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 국정원장은 대통령을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고. 하지만 김혁수는 대통령의 운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이미 직감했다.
조직의 배신자 김종훈이 대통령 비리를 언론에 터트린 순간 대통령은 그 권위를 잃었다.
그런데 국정원장은 그런 대통령이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거라는, 잘못 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심리전단장과 더 얘기해 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은 김혁수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였다.
벨레레레레~
김혁수의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하니 발신제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혁수는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그 전화를 받았다. 김혁수가 국정원 소속이 아니었다면, 그는 안 그래도 지금 골치 아파 죽겠는데, 어디 누군지도 모를 출처 불분명한 전화를 받지 않았을 거다.
허나 그는 뭔가 집히는 게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김 팀장.
“네.”
김혁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침착하게 대답을 하면서 주위부터 살폈다. 다행히 그 주위로 그가 통화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몰랐기에 김혁수는 복도 끝에 있는 계단실 쪽으로 움직였다. 그 사이 그에게 전화를 건 상대, 2차장 밑에 대공수사팀장 공형석과 계속 통화를 이어나갔다.
공형석은 김혁수와 같은 특수부대 소속 전 상관이었다. 그랬기에 둘은 막역했고, 국정원 안에서도 은근히 서로를 챙겨 주는 사이였다.
-제수씨하고 민주는 무사해.
“....”
공형석으로부터 아내와 딸 얘기를 전해들은 김혁수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던 말든 공형석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서 했다.
-1차장님이 움직이셨다. 그게 무슨 소린지 넌 알지?
“알지요. 아주 잘....”
-그렇다면 얘기 길게 안 할게. 우릴 도와라.
한마디로 여기 있는 국정원 요원들을 배신하라는 얘기였다. 당연히 그걸 받아 드릴 생각이 김혁수는 추호도 없었다.
나하나 살자고 이들을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 자기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여기 있는 요원들에게도 그 가족들이 있을 터. 나와 내 가족이 살자고 그들과 그들 가족을 죽이는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그가 국정원에 일하며 밥 벌어먹고 살면서, 언제든 생길 수 있는 불운한 일이었다.
물론 그가 사정이 있어 그만 두거나,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김혁수는 공형석의 제안을 바로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이쪽이 원하는 사람은 딱 다섯이다. 그 다섯만 넘기면 나머지 요원들은 다니던 직장, 계속 다닐 수 있을 거다.
“다섯이요?”
공형석의 말에 김혁수는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 3차장과 심리전단장, 그리고 심리전단 1팀장, 2팀장, 3팀장과 외부지원단장이다.
공형석이 언급한 사람들은 전부 국정원장의 최측근 간부들이었다. 그 중에는 심리전단의 1팀장인 김혁수도 포함 되어 있었고. 그런데 그 수가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었다. 그 이유는 공형석이 바로 밝혔다.
-어쩔지 바로 말해라. 네가 거부하면, 기회는 다른 자에게 넘어간다.
그러니까 지금 공형석은, 김혁수가 하기 싫다고 하면 조금 전 그가 언급한 사람들 중, 다른 사람에게 지금처럼 제안을 할 거란 얘기였다.
그들 중 누구라도 그의 제안을 받아드리면, 그 자는 살아남게 되는 거고 말이다.
‘미친....’
당연히 김혁수가 이 제안을 거부하면, 그 다음인 심리전단 2팀장인 하용석과 3팀장인 유병선은 보나마나, 공형석의 제안을 냉큼 받아드릴 거다.
공형석이 김혁수에게 가장 먼저 이런 제안을 한 것은, 그와 친분이 있어서 였을 테고.
한마디로 김혁수가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런 운을 자기 발로 걷어 찰 정도로 김혁수는 어리석지 않았다.
무엇보다 출세지향적인 3차장과 심리전단장을 비롯해서, 언제든 자기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2, 3팀장, 그리고 3차장의 꼬붕인 외부지원단장을 살리자고, 귀한 자기 가족들의 목숨과 자기 목숨을 내걸 생각이 김혁수는 추호도 없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 뒤 공형석은 이미 1차장 밑에 국정원 요원들이 삼명호텔에 침투해 있으며, 언제든 여기 있는 3차장 밑에 국정원 요원들을 제압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김혁수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좀 전 한 선택이, 얼마나 잘한 선택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 뒤 공형석으로부터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시를 들으면서 김혁수가 눈빛을 형형하게 빛냈다.
* * *
김혁수가 또 다시 나타나자 심리전단장인 최일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최일호도 알았다. 김혁수가 왜 저러는지 말이다. 여기 있는 요원들 하나라도 더 구해보려고 저러는 거겠지. 하지만 그건 김혁수의 오지랖이 넓어서였고, 어차피 이들 대부분은 곧 국정원에서 옷 벗고 나가야 했다.
‘C발....’
그 중에는 자신도 포함 될 것이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카인 김종훈과 척을 지는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최일호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이 질 책임은, 심리전단장 자리를 내 놓고 국정원을 나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조카와 누나 볼 면목이 없지만,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될 것이고. 괜히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했겠는가?
하지만 피가 물보다 진하기에, 그만큼 김종훈이 외삼촌인 최일호에게 받은 배신감이 더 클수밖에 없을 거라고, 최일호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돌멩이를 던졌지만, 그 돌멩이에 맞아 죽을 뻔했던 김종훈은, 지금 잔뜩 칼을 갈았고 그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이제 최일호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었건만, 정작 최일호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