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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은 결국 뇌사, 그러니까 코마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김 회장을 깨워서 차미진과 김학수, 김학진을 확실히 서진家에서 분리 시켜 버릴 생각이었던 민영석. 하지만 김 회장이 언제 뇌사 상태에서 깨어날지 모를 상황이 되어 버리자, 민영석의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다.
반면 차미진과 김학수, 김학진은 아주 대 놓고 노골적으로, 김 회장이 코마 상태인 걸 기뻐했다.
“호호호호.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저도요. 하하하하.”
“그래도 아찔했습니다. 민 실장이 아버지를 세브란스 병원으로 데려 가기라도 했다면....”
“흥! 어차피 거기가기 전에 상태가 나빠져서 그렇게 됐을 앙반이다. 민 실장이 헛고생 한 거지.”
“그러니까요. 하하하하. 이게 다 하늘도 우리 편이란 말인 거죠.”
특히 장남인 김학수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럴 게 차기 서진그룹 회장 자리는 그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반면 둘째인 김학진은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장남인 김학수에 비해서, 자신이 서진그룹에서 가지는 영향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
‘괜히 크리스탈 호텔을 맡아서....’
그룹에서 외직이나 마찬가지인 호텔보다는, 어째든 형인 김학수처럼 서진그룹 본사에서 틀어 박혀 알 박고 있었어야 했다.
“일단 그룹은 비상운영체제로 바꾸고 그 위원장 자리를 학수 네가 맡으렴.”
“네. 어머니.”
“엄마. 그럼 나는?”
“너는 호텔 경영하기도 벅차면서 무슨....”
“설마 나보고 호텔 하나 먹고 떨어지라는 건 아니지요?”
얼굴이 시뻘게 진 김학진이 두 눈을 부라리고 자신에게 따지고 들자, 차미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은 그룹부터 지켜야지. 계열사를 나누는 건 그 다음 일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네 아버지가 삼명그룹 막내와 싸움을 시작한 상황이잖아. 여기서 우리끼리 내분이라도 일어난다면, 자칫 그룹이 풍비박산 날 수 있어. 괜히 죽 쒀 개 주진 말아야지. 그러니 그룹이 정상화 되고 나면, 그때 가서 그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 보자구나.”
“네. 어머니.”
차미진의 말에 넙쭉 대답하는 장남 김학수. 하지만 차남 김학진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차미진 눈치를 보다가 못내 대답했다.
“쳇. 뭐 그럽시다. 단, 그때 가서 사전에 얘기 했던 거, 뒤집고 딴소리들 하면 나 가만 안 있어요.”
그렇게 세 사람이 합의가 이뤄지면서 차미진과 김학진은 서진그룹 본사로, 김학진은 대표로 잔뜩 일이 밀려 있는 크리스탈 호텔로 향했다.
이때 차로 이동 중 차미진과 한 차에 같이 탄 김학진이, 심각한 얼굴로 모친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쪽에서 저희 제안을 받아드릴까요?”
“안 받아드리면? 네 아버지 그렇게 됐는데 싸우자고 달려들면 그게 사람이니?”
“그 새끼 이 바닥에서 개새끼로 불리잖아요?”
“뭐 여차하면 청와대에 중재를 요청하면 되고. 안 그래도 경제가 엉망인 마당에 대기업끼리 싸움이 가당키나 한 일이니? 하여튼 미친 인간이라니까.”
차미진은 또 불만의 화살을 뇌사 상태에 빠져 있는, 자신의 남편 김명진 회장에게로 돌렸다. 애초 삼명그룹 막내와 싸우긴 왜 싸우냐는 말이다. 자기 아들 뻘 녀석과 쪽팔리게.
차미진은 서진그룹 본사로 들어가는 즉시 그룹을 비상체제로 돌리고, 제일 먼저 백준열과 합의부터 볼 생각이었다.
그 다음 그룹을 빠르게 정상화 시키고 장남인 김학수를 회장 자리에 앉힌 뒤, 자신이 막후에서 김학수를 움직여서, 서진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갈 계획을 짰다.
그런 모친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김학수는, 어떡하면 백준열과 쉽게 합의를 볼지에 대해 나름의 열나게 통빡을 굴렸다.
* * *
민영석은 차미진과 김학수, 김학진이 서진병원을 나서는 걸 넋 놓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이미숙 여사. 민영석은 황급히 그 전화를 받았다.
왜냐하면 30분 전부터 이미숙이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
“이 여사님. 지금 어디십니까?”
-그 동안 수고 많았어요. 그 얘기 하려고 전화한 겁니다.
“여, 여사님!”
-학민이와 나는 이 나라를 떠납니다. 그러니 민 실장님도 이제 자기 살길 찾으세요.
뚜뚜뚜뚜뚜뚜뚜....
자기 할 말은 끝낸 이미숙이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고, 민영석은 핸드폰을 들고 선 체 넋을 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니까 민영석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모자母子가 한국을 떠난단다.
이미숙이 어떤 여자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민영석이었다. 마음을 정하면 실행력 하나 만큼은 김명진 회장도 인정한 그녀였다.
그녀가 떠난다고 했으면 떠난다고 봐야했다. 아마 지금 비행기에 타고 있을 지도 몰랐다.
“크크크크....다 끝났어.”
반쯤 실성한 얼굴로 민영석이 허탈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핸드폰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고는 털레털레 그대로 병원 출입구 쪽으로 쭉 걸어갔다.
그때 그런 그를 주시하는 한 쌍의 눈이 있었으니....
“이거 바로 안 가고 더 남아 있길 잘 했군.”
어느 새 다시 서진병원 직원으로 변신을 꽤한 철수. 그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저 철숩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
철수는 서진그룹 민영석 실장의 지금 처한 상황과 모습에 대해 간략히 누군가에게 보고를 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백준열이었고.
“....네. 아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백준열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철수는 뛰기 시작했다. 저기 서진병원 출입구를 막 통과 한 민영석을 향해서 말이다.
“하아....”
권력 싸움의 끝에 패배한 신세인 민영석. 원래는 그 주위에 경호원들이 있어야 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서진그룹 2인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명진 회장이 뇌사 상태에 빠지자, 본사 경호실장이 재빨리 차미진에게 붙어 버린 것이다. 경호실장이 오라니 민영석을 경호하던 경호원들도 우르르 서진그룹 본사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 회사 차까지 다 가져 가버렸기에, 민영석은 당장 탈 차도 없었다.
자신의 신세가 왜 이렇게 됐나 낙담하며, 민영석이 병원 입구 앞에 늘어서 있는 택시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저기요.”
누가 뒤에서 그를 불렀고, 발걸음을 멈춘 민영석이 뒤를 돌아보자, 웬 남자가 그에게 헐레벌떡 뛰어와서 말했다.
“이거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 특징 없는 그 남자가 민영석에게 건넨 것은....바로 명함이었다.
“그게 뭡니까?”
민영석이 묻자 그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누가 이걸 그쪽에 전달해 주기만 하면 사례를 하겠다고 해서요.”
“사례요?”
“네. 벌써 받았습니다.”
남자는 호주머니 속에서 5만원 지폐를 꺼내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여기....”
그리곤 재차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민영석에게 건넸다. 민영석은 일단 그 명함을 받았다.
그러자 홱 돌아선 그 남자가 올 때처럼 뛰어서 후다닥 사라졌고, 그런 그에게 명함을 살핀 뒤 뭘 좀 더 물으려 했던 민영석은 허탈하게 그 모습만을 지켜만 봤다.
“허어. 근데 누가....허억!”
그때 별 생각 없이 손에 쥐어져 있는 명함을 본 민영석.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것이 그가 지금 상상도 하지 못한 인물의 명함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명함의 주인은 바로 서진그룹과 피터지게 싸울 예정인, JYB엔터 백준열 대표의 명함이었던 것. 그러니 민영석이 기함할 밖에.
전장에서 적장이 은밀히 상대 적장에게, 할 말이 있으니 자신에게 연락 하라고 사인을 보내 온 거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민영석. 그가 눈앞에 택시를 보고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나를 이렇게 홀대 하다니....”
만약 차미진과 김학수, 김학진이 모른 척 민영석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그는 그들이 내미는 손을 잡을 의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서진그룹과 함께 해 온 세월이 얼만데. 비록 모시는 주인은 달라져도, 서진그룹은 그에게 있어서 여전히 서진그룹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냉철하게 민영석을 버렸다. 아마 오늘 내일 사이 비서실장이 바뀔 공산이 컸다. 당연히 민영석은 이렇게 허망하게 내쳐짐을 당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 걸자. 건다고 해서 내게 나쁠 건 없으니까.”
민영석은 웬 남자가 주고 간 백준열 대표의 명함에 적힌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 *
일본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다음날 다시 한국, 서울로 온 일본 여배우 나나미.
아직 일본 열도에서는 톱스타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녀를 알아보는 한국 사람들은 많았다. 그 만큼 한국 내에서도 일본 드라마, 그러니까 일드를 즐겨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저 여자 하시모토 나나미 아냐?”
“뭐? 어어. 진짜 닛본TV의 드라마 ‘마녀의 손길’에서 나온 그 주연배우 나나미다.”
“싸인 받으러 가자.”
“당근 빠따 지.”
김포공항에서 사람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톱스타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인 나나미는, 한국의 자기 팬들을 위해서 성심껏 사인을 해주고 나서, 천천히 공항을 빠져 나왔다.
“힐튼 호텔로 가주세요.”
나나미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곧장 서울 힐튼 호텔로 향했다. 엊그제 묵은 호텔도 괜찮았지만, 이번은 소속사 경비로 처리 되는 만큼 세계적인 브랜드의 특급 호텔에 묵겠다는 게 나나미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소속 된 일본의 연예기획사 하이브 사쿠라의 대표인 안도가 어쩐 일인지 나나미에게 경비로 쓰라고 법인카드를 넘긴 것이다.
소속사 직원이라면 법카를 눈치 보고 긁겠지만, 나나미는 그 소속사의 배우였다.
그녀가 안도 사장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안도 사장이 그녀의 눈치를 봐야지 말이다.
“손님. 다 왔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생생했고 공항에서도 에너제틱 했던 나나미. 근데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만 꾸뻑 졸았다.
“아하아암!”
늘어지개 기지개를 켜고 난 나나미. 일본에서는 차마 보일 수 없었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야 무슨 상관인가? 눈앞에 중년 택시 기사 분은, 그녀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거 같았으니까.
“여기요.”
나나미는 안도 사장에게 받은 전 세계에서 거의 다 쓸 수 있는 법인카드를 택시 기사에게 건넸고, 택시기사는 능숙하고 그 카드를 긁고 택시비를 챙겼다.
잠시 후 택시에서 내린 나나미는 간단한 짐 가방 하나를 챙겨 든 채 힐튼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차마 스위트룸까지는 잡지 못한 나나미. 혼자 쓰는 방치고는 가장 큰 디럭스 룸을 잡았다. 그리고 그 룸 안으로 들어간 나나미는 일단 고픈 배부터 채우기 위해서 룸서비스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 주문한 음식들이 오기 전에 먼저 샤워로 몸부터 정갈히 한 나나미. 그녀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주문한 룸서비스로 온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아아. 배불러.”
배가 부르자 잠이 쏟아졌고, 나나미는 조금만 자자 생각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그녀가 깨어보니 벌써 저녁 7시였다.
“미쳤어.”
그녀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백준열을 만나고 있거나, 만나러 어딜 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백준열은 그녀가 지금 한국에 있는지 조차 몰랐다. 해서 나나미는 급하게 백준열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아까 전화해서 약속 잡고 자도 잤어야 했는데....”
자기는 몰랐는데, 그 동안 혹사당해 온 그녀 몸이, 하필 여기서 휴식을 원할 건 뭐란 말인가?
-네. 여보세요?
어째든 다행스럽게도 백준열이 그녀 전화를 바로 받아 주었다.
* * *
대표실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 안에 타고 있던 백준열과 두 명의 경호팀원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곤 곧장 대표실로 향했고, 백준열을 발견한 김 비서가 책상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늦으셨습니다.”
“미안. 그럴 일이 좀 있어서.”
백준열은 그 말 후 곧바로 김 비서 앞을 지나쳐서, 자신의 방인 대표실로 들어갔다.
그런 그를 보고 잠시 어이없어하던 김 비서. 그녀가 자기 책상에 잔뜩 쌓아 둔 서류 뭉치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대표실 앞으로 가서 노크를 했다.
똑똑똑!
“들어 와.”
백준열의 허락이 있자 곧바로 대표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김 비서.
그런 그녀 눈에 정장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는 백준열의 모습이 보였다.
백준열은 옷을 걸고 곧장 자신의 책상에 앉았고, 그걸 보고 김 비서는 서류 뭉치를 들고 책상 쪽으로 쭉 걸어갔다. 이어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백준열의 책상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오늘 중에 대표님 결재가 시급한 서류들입니다.”
“알았어.”
백준열은 평소와 달리 많은 서류 량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서 서류 뭉치 맨 위의 서류를 챙겨서 자기 앞에 두고, 본격적으로 그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 백준열을 잠시 넋놓고 쳐다보던 김 비서.
“안 나가?”
백준열이 서류에 시선을 둔 체 말하자,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김 비서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 네. 나, 나갑니다. 나가요.”
어째 오늘따라 몇 군데 나사가 빠져 어리바리 해 보이는 김 비서.
그런 그녀가 대표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잠시 고개를 쳐들어 쳐다보던 백준열이,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 서류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답답하네. 할 말 있으면....그냥 하면 될 것을....”